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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nesday, November 4, 2026

도배하다 사라진 어느 민족주의자의 운명 [금자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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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의 노일환. 노주상 제공
젊은 시절의 노일환. 노주상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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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 주 : 국가권력에 의해 ‘프락치’로 몰려 구원받지 못한 채 북으로 간 국회의원들. ‘금자’는 소녀 금자의 시선을 따라 70년이 훌쩍 넘은 그 시간 속으로 여행을 떠난다. 대한민국 친위쿠데타와 내란의 기원을 마주한다. 월화수목금 연재.

“당신의 사상은 무엇인가요?“

판사가 물었다. 피고 노일환이 답했다.

“민족주의적인 가정에서 성장했기에, 민족주의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식인의 자유는 보장돼야 한다는 것이 기자 생활을 통해 얻은 신념이기에, 저는 자유주의자입니다.”(1949년 11월17일 국회프락치 사건 제1차 공판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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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의 사상은 무엇이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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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물었다. 노일환의 손자 노주상이 답했다.

“지주 계급 출신으로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를 신봉했습니다. 본인의 신념과 정치적 사상이 북한의 김일성과는 너무나 달랐는데, 이승만에게 제거된 뒤엔 김일성에게 이용만 당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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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자, 자유주의자, 민주주의자 노일환(1914~1982)은 1950년 9월 중순경 서울 삼청동의 집에서 도배하다 갑자기 사라졌다. 가족들은 처음에는 행방을 몰랐다. 노일환은 북한으로 갔다. 1956년부터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를 구성해 활동했으나 1958년 반혁명 분자로 몰려 숙청되었고, 1982년 타계해 평양시 북쪽 용성구역 재북인사 묘역에 안장됐다.

9월의 첫날 서울 충무로의 카페에서 만난 노일환의 후손 두 명이 가장 강조한 말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노일환이 강직하고 청렴한 민족주의자였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도배하다 사라진 정황으로 볼 때 자진월북일 수 없다는 거였다.

노일환의 동생인 노국환(1923~1987)의 막내아들, 즉 조카 노시수(67) 선생은 “대표적인 친일 기업인 박흥식이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특별경찰대에 체포되기 전 반민특위 특별검찰부 차장이었던 백부(노일환)에게 사람을 보내 3천만원을 건네려 했지만 ‘더러운 돈’이라는 호통만 들었다고 한다. 그 현장을 지켜본 아버지 노국환에게 들은 이야기”라고 말했다. 그는 “당시 정당 하나를 창당할 수 있는 거금을 물리친 분이 남로당 공작원에게 고작 10만원을 받고 프락치가 됐다니 고소를 금할 수 없다”고 했다.

노일환의 큰아들인 노시학(1940~2021)의 큰아들, 즉 큰손자 노주상(58) 선생은 “할아버지가 막 이사한 집에서 도배하다가 장도리와 못을 구하러 간다며 밖으로 나간 뒤 돌아오지 않았다. 부인 김묘숙(1913~2006)이 ‘해진 팬티를 갈아입고 나가라’고 했는데, ‘다녀와서 목욕 뒤 갈아입겠다’고 했다 한다.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자진해서 월북할 수 있었겠느냐”고 했다. 그는 “할아버지가 정치적 성향과 사상적으로도 맞지 않는 북으로 자발적으로 갔을 리 없다. 타인에 의해 강제적으로 납북되었다고 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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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전남 순창군 쌍치면에 쌍치초등학교의 전신인 사립 순성학교를 설립하는 등 지역에서 민족교육에 힘쓴 지주계급의 명문가 노씨 집안은 1949년 노일환이 국회프락치 사건에 연루되며 서서히 몰락했다. 노일환은 집 안팎의 기대를 한몸에 받던 전도유망한 청년이었다. 보성전문학교 상과를 나와 동아일보 기자를 하다 한민당 소속으로 1948년 5·10선거에 고향 순창에서 출마해 당선한 그는, 제헌국회에서 소장파의 핵심 리더로 활약했다. 그러나 프락치·월북자로 전락했다. 첫 공판에서 판사에게 “남로당에 가입하지 않았고, 프락치를 구성한 적 없으며, 헌병대에서 한 자백은 고문에 의한 것이었다”고 말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노일환이 남쪽에서 사라진 뒤 가족과 인척들은 무자비한 경찰 고문의 먹잇감이 됐다. 선혈이 낭자하도록 두드려 맞은 채 임시유치장으로 쓰는 창고에 열흘간 방치됐던 당숙 노두환(1903~1965)은 병원에서 다리를 절단해야 했다. 일상적 사찰과 연행, 연좌제의 늪에서 가족들은 평생을 허우적댔다.

노일환(왼쪽서 세번째)이 젊은 시절 사촌들과 찍은 사진. 노주상 제공
노일환(왼쪽서 세번째)이 젊은 시절 사촌들과 찍은 사진. 노주상 제공

문 : 진술인은 납북규명대상자의 납치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되셨습니까?

답 : 1950년 6~7월경에 집에 계시다가 방 도배한다고 도배지 사러 나간 후 돌아오지 않았음. 이후 소식이 없음. 당시 프락치 사건 연루된 국회의원 13명을 당시 북한에서 끌고 갔음.*

문 : 대상자를 누가 납치해서 납북시켰는지요.

답 : 모름.

문 : 대상자가 북한으로 가게 된 계기가 강압에 의해서 가게 되었다는 것을 무엇으로 입증하면 좋을까요?

답 : (중략)친일파를 정부에 채용하면 안 된다고 정부와 의견충돌이 있었고 국회에서 똑똑한 사람들이 말을 듣지 않으니까 공산당으로 누명을 씌운 것임. 부자가 공산주의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냐. 순창에서 우리는 지주였음. 부자가 공산주의 찬양할 사람이 어디 있냐. 없는 사람이 현혹되는 거지. 집안에 재력과 기틀이 있는데 공산주의 사상을 따를 사람이 누가 있겠냐. 자진 입북이라면 식구들을 데려가지 혼자 갈 리가 있겠냐. 강제니까 혼자 갔지. 우리는 순창에서 천석꾼으로 소문이 났었음. 순창에서 노부자 집이 어디냐 하면 다 알 정도였음. 이런 지주인데 공산주의라는 것은 말도 안 된다.

답 : 대상자가 국회프락치 사건에 연루된 이유를 다시 한 번 설명해주시겠어요.

답 : 이승만 대통령이 친일파와 가깝게 지내고 있는데 국회에서 해방이 되었으니 친일파를 내보내고 고생하고 깨끗한 사람이 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을 하니까 공산주의로 누명을 씌어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시킨 것임. 국회프락치 사건은 악명 높은 오제도 검사와 이승만 대통령이 조작한 사건임.

이날 노주상·노시수 선생이 건네준 두툼한 자료철 속에는 지금으로부터 11년 전 노주상의 아버지 노시학이 국무총리 소속 6·25전쟁납북피해진상규명및납북피해자명예회복위원회에서 조사받은 진술조서가 있었다. 2015년 1월15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린동에 있던 위원회 사무국 민원실에서 진행된 조사내용을 조사관이 정리한 것이다. 노시학은 2013년 12월27일 아버지 노일환에 대한 납북피해신고서를 위원회에 제출했는데, 1년1개월 만에 진술 기회를 얻은 셈이었다. 아버지 노일환이 첫 재판을 받은 때로부터 65년이 흐른 뒤였다.

최씨 성을 가진 조사관은 노시학에게 “아버지 노일환이 정말 납북된 것이냐, 그렇다면 증거는 무엇이냐”고 물었다. 노시학은 노주상·노시수가 강조했던 그 말, “도배하다가 장도리와 못 등을 구하러 나간 사람이 어떻게 자진월북을 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천석꾼으로 소문난 부자 집안에서 공산주의를 따를 이유가 무엇이냐고도 했다.

9월1일 서울 충무로에서 만난 노시수·노주상씨(왼쪽부터). 고경태 기자
9월1일 서울 충무로에서 만난 노시수·노주상씨(왼쪽부터). 고경태 기자

서류철에 있는 ‘납북피해신고 사실조사 결과서’를 보면, 6·25전쟁납북피해진상규명및납북피해자명예회복위원회는 노시학의 신고서와 관련된 의안을 2025년 1월27일 위원회 회의에 상정했다. 그리고 나온 결론은 ‘판단 불능’이었다. 결과서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신고인과 보증 2인의 진술에서 국회프락치 사건에 연루됐다고 진술함에 따라 당시 사건의 진실을 해명할 수 없어 판단불능으로 판단함.”

신고인은 노시학이고, 보증 2인은 노일환이 집에서 도배하다 장도리와 못을 구하러 나가는 장면을 목격했다는 딸 노시욱(당시 14살, 1936~2019)과 노일환의 조카 노시선이다. 노시욱은 목격자, 노시선은 전언자였다. 그런데 “국회프락치 사건에 연루됐다고 진술함에 따라 판단 불명”이라니. 국회프락치 사건에 연루됐다면 납북될 리 없다는 뜻인가? 신고인과 유족들은 납득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의 신청은 하지 않았다.**

사실 납북이냐 월북이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국회프락치 사건의 조작 여부였다. 노일환을 비롯해 제헌국회의원들이 프락치였다는 증거가 있느냐, 이들의 자백이 고문에 의한 것이었느냐가 핵심 쟁점이었다. 다만 납북 여부를 국가 공식기관을 통해 밝히는 일은 거대한 진실에 이르기 위해 통과해야 할 1차 관문이었다. 국회의원 총람, 국회의원 기록카드, 북한총람 등 자료마다 ‘납북’ 또는 ‘북괴 남침시 탈옥 월북’으로 뒤죽박죽이었다. 이 문제부터 정리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었다.

의외로 진실은 간단했다. 노일환을 비롯한 제헌국회의원들이 자발적으로 월북했다는 정황이나 증거는 거의 없었다. 대신 납북됐다는 정황과 증거는 차고 넘쳤다. 이들의 북한행은 철저히 계산된 납치공작이었음을 증언하는 책 한 권이 있었다. 증언자는 북한의 ‘납치공작 실무자’였다.

<다음 회에 계속>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노일환 유족이 납북신고서에 기재한 실종 시기는 1950년 6~7월이 아니라 9월이며, 국회프락치 사건에 연루된 제헌국회의원 중 북한에 간 이는 13명이 아니라 12명이다.

**6·25전쟁납북피해진상규명및납북피해자명예회복위원회에 납북신고서를 낸 국회프락치 사건 유족은 노일환을 비롯해 신성균·강욱중·김병회·황윤호 의원의 자녀들이었다. 조사 결과 ‘납북자’ 결정을 받은 이는 신성균 한 명뿐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판단 불능’이었다.

​글쓴이 소개

사회부 기자. 베트남전 시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을 추적한 ‘베트남전쟁 1968년 2월12일’과 유해발굴을 통해 한국전쟁의 상흔을 드러낸 ‘본헌터’를 썼다. 그밖의 지은책으로 ‘유혹하는 에디터’, ‘굿바이 편집장’, ‘대한국민 현대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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