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르포] “너희를 잊지 않고 보고 있어”···20년째 팔레스타인 아이들 찾는 이스라엘 여성
27일(현지시간) 예루살렘 북쪽 칼란디야 검문소에서 철책을 따라 타마르 플라이슈만(79)이 걷고 있다. 칼란디야|조형국 기자
“이것도 아니고, 이것도 아니고. 여기 있네, 네 사진.”
27일(현지시간) 오후 4시쯤 예루살렘 북쪽 칼란디야 검문소를 지나 서안지구 라말라로 향하는 길. 이스라엘 여성 타마르 플라이슈만(79)이 비닐봉지에 담아온 사진 뭉치를 뒤적이다 한 장을 골라 하밋(14)에게 건넸다. 팔레스타인 소년 하밋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번졌다. 하밋은 타마르가 건넨 사진을 뚫어지게 바라보다 타마르에게 말했다. “또 찍어주세요.”
하밋 뿐만이 아니다. 타마르가 칼란디야에 나타나면 팔레스타인 아이들이 몰려든다. “담배 주세요”라고 장난치는 꼬마에게는 “까불지 마”라고 응수한다. 타마르는 가방 한가득 가져온 테니스공을 나눠주면서 안부를 묻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20년. 그가 이곳에서 보낸 시간 동안 아이들은 청년이, 청년들은 장년이 됐다.
타마르는 이스라엘 여성 인권단체 ‘마흐솜 워치’에서 활동한다. 2001년 설립된 마흐솜 워치는 이스라엘 여성들이 서안지구 검문소 등에서 벌어지는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인권 침해를 관찰·기록·고발해온 단체다.
27일(현지시간) 예루살렘 북부 칼란디야 검문소 인근에서 타마르 플라이슈만(79)과 택시 기사 무사(60·오른쪽)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칼란디야|조형국 기자
기자는 타마르를 따라 칼란디야 검문소를 지나 라말라 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차량이 통과하는 검문소를 왼쪽으로 우회하면 아랍계 주민들이 이용하는 버스정류장을 지나 검문소 위를 가로지르는 교량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나온다. 교량을 건너면 라말라로 이어지는 출입구다. 교량에서 바라본 차량 검문소에서는 총을 멘 이스라엘 군인들이 출입 차량을 통제하는 중이었다.
회전문을 지나자 줄지어 선 택시들이 보였다. 기사들은 타마르를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타마르가 택시 기사 무사(60)에게 다가가 안부를 물었다. “헤브론 사건 이후로 별일 없었어?” 지난 23일 서안지구 헤브론에서 발생한 총격 사건으로 이스라엘군(IDF) 두 명이 숨지고, 팔레스타인 국적의 범인 2명은 사살됐다. 무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했다. “그것보다 일이 너무 없어. 사람들이 택시를 안 타.”
칼란디야를 휘젓는 금발 여성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케밥 노점상도, 택시 기사도, 열쇠고리를 파는 꼬마도 타마르를 친구처럼 반겼다. 하밋이 기자에게 자신이 파는 물을 사달라고 여러 차례 조르자 타마르가 “내 친구야”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아쉬운 표정으로 물러난 하밋은 타마르가 준 테니스공을 바닥에 튀기며 친구와 함께 차도 위를 내달렸다. 다른 아이들도 사진을 찍어 달라며 타마르를 좇았다.
사진은 타마르가 팔레스타인 아이들에게 건네는 시선이다. “너희는 투명하지 않아. 누군가 너희를 잊지 않고 보고 있다고 말하는 거야.” 그의 손길엔 아이들이 떠올리는 이스라엘인(주로 군인)의 이미지를 바꾸어 주려는 마음도 담겼다. “난 총을 메지 않았어. 대신 웃고, 너흴 만지고, 대화하는 사람이야.”
타마르는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고, 팔을 당기고, 손을 맞잡으면서 그의 삶에 닿는다고 생각한다. 그 손길에는 이스라엘인으로서 느끼는 죄책감, 이곳의 삶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책임감, 그 곁을 지키겠다는 연대의 뜻이 담겼다.
27일(현지시간) 예루살렘 북부 칼란디야에서 팔레스타인 소년들이 차도에서 테니스공을 던지며 놀고 있다. 칼란디야|조형국 기자
한 소년과의 연이 계기가 됐다. 격주로 팔레스타인인들이 잡혀간 사건에서 재판 참관을 하던 타마르는 재판정에서 결코 보고 싶지 않았던 얼굴을 만났다. 평소 칼란디야를 오가며 만났던 소년 이브라힘이었다. 칼란디야 난민캠프에 사는 그의 가족은 예루살렘의 재판정을 올 수 없었다. 충격에 빠진 타마르와 이브라힘의 시선이 마주쳤다. 타마르의 당혹감과 달리, 이브라힘은 반가움을 감추지 못했다. “고립무원이던 이스라엘 재판정에서 아는 사람이 생긴 거야.” 집으로 돌아와서도 이브라힘의 얼굴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때부터 칼란디야 아이들의 사진을 찍었다.
라말라 초입에 작은 마트에서 담배 2갑과 사이다 한 캔을 산 타마르는 길 건너 노점 뒤로 돌아가 담뱃불을 붙였다. 푸른 눈의 아담(14)이 비스킷 한 바구니를 들고 다가왔다. 타마르는 “아담은 학교에 가지 않는다. 가족이 너무 가난해 학교에 보낼 돈이 없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렇게 일한다”고 말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삶의 굴곡도 크게 보인다. 타마르가 미래를 낙관하지 않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글쎄. 아이들은 돌아가고, 늘 먹던 음식을 먹거나 혹은 먹지 못하고, 또 물과 과자를 들고 찻길로 나오겠지. 나아질 게 없어.” 7살부터 알기 시작해 스무 살이 된 청년은 아직도 13년 전 그때처럼 행상을 하고 있다고 했다. 바뀌는 건 물이었다가 옥수수였다가 수박으로, 계절 따라 바뀌는 품목뿐이다.
“타마르야, 네가 모세구나.”
27일(현지시간) 예루살렘 북부 칼란디야 검문소에서 만난 타마르 플라이슈만(79)과 나딘(12), 그의 동생이 환하게 웃고 있다. 칼란디야|조형국 기자
타마르에게 유대인 정체성은 죄책감의 원인이자 책임감의 원동력이었다. ‘왜 이 일을 하는 것인가’라는 질문에 타마르는 긴 이야기를 풀었다. 수년 전 86세의 나이로 세상을 뜬 그의 이모는 12살 때 아우슈비츠에 끌려간 홀로코스트 피해자였다. 가까스로 가스실은 피했지만, 노역장에 끌려갔다. 작업장으로 향하는 소녀들에게 문을 열어주던 독일군 병사는 매일 남몰래 “참아야 해(Be patient)”라고 속삭였다. 소녀들은 이름 모를 그 병사를 ‘모셰’라고 불렀다. 모세의 유대식 표현이었다. 이후 러시아군이 독일군을 집단처형할 때 유대인 소녀들은 모셰 앞을 막아섰다.
타마르는 칼란디야에 오기 시작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모에게 활동을 말했다. 정치과 점령에 문외한이었던 이모는 두 가지 질문을 던졌다. “너는 안전해?” 타마르는 그렇다고 답했다. “그게 그들에게 도움이 돼?” 타마르는 잘 모르겠다고 했다. 다만 팔레스타인 아이들도 총을 들지 않은 이스라엘인을 만나는 것이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그러자 이모가 말했다. “타마르야. 네가 모셰구나.”
그때의 충격은 이후에도 칼란디야를 찾는 힘이 됐다. 3일 후면 80세 생일을 맞는 타마르는 어느덧 이모의 나이에 가까워졌지만, 아직 이모에게 떳떳하지 않다. 그는 “난 모셰가 아니다. 난 이들을 위해 내 목숨을 걸지 않는다”고 말했다.
“팔레스타인에 권리를 주지 않은 한 아무것도 달라질 것은 없다”는 그는 낙관보다 비관에 익숙하다. 사회주의자이자,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자신의 신념이 이스라엘에서 배척당하는 극소수라는 사실도 알고 있다. 이른 아침 투표장에 다녀왔지만, 팔레스타인인들의 삶과는 무관한 선거였다. 투표용지에 무슨 메시지를 담고 싶었냐는 질문에 그는 “Go to hell(지옥에나 가라)”이라고 답했다. 타마르가 카메라를 들게 한 이브라힘은 도로 충돌방지대를 흔들었다는 이유로 징역 16개월을 살았다. 재판 이후 타마르는 이브라힘을 다시 만나지 못했다.
방향을 돌려 다시 검문소로 향하는 길, 세숫대야를 팔던 남성이 타마르를 보고 다가왔다. “비비(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의 별명)는 오늘 끝날 거야.” “나도 그랬으면 좋겠어.” 타마르는 이곳 모두가 같은 바람이라고 했다. 한국의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고 묻자 짧은 답이 돌아왔다. “이스라엘에 압박을 가해달라(Put a pressure on Israel). 이스라엘의 미래는 세계에 달려 있다.”
회전문으로 들어가려는 타마르의 이름을 멀리서 앳된 목소리가 불렀다. 동생과 함께 쿠란 글귀를 적은 쪽지를 파는 나딘(12)이었다. “타마르. 지난번에 주신 사진, 집에 액자로 걸었어요.” 다시 타마르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27일(현지시간) 예루살렘 북부 칼란디야 검문소 인근에서 타마르 플라이슈만(79)이 한 팔레스타인 소년에게 사진을 건네고 있다. 칼란디야|조형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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