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산단 옆 “농수 부족”…발전소 증설 공사로 “집에 금 가”
대만 신주 고속철도역 인근에서 벼농사를 짓는 톈서우시가 반도체 산단이 들어선 뒤 발생한 물 부족 문제를 설명하고 있다. 양다영 PD
칠순 앞둔 토박이 농부의 한탄
“과학단지 생기기 전엔 없던 일”
물 하루 66만t, 충남 일 사용량
TSMC가 지난해 사용한 전력
대만 전체 소비량의 9% 육박
발전소 늘며 대기 등 오염 심화
대만 신주현 주베이시에 있는 신주 고속철도역은 대만의 경제성장을 상징하는 장소다. 세계 반도체 위탁생산 1위 기업 TSMC를 키워낸 신주 과학단지와는 차로 20분 거리이고, 대만 중부의 타이중, 남부의 타이난·가오슝 과학단지에도 1~2시간이면 닿을 수 있어 역은 반도체 엔지니어들로 항시 붐빈다.
그런데 이 역에서 과학단지보다 훨씬 가까운 곳에는 논밭이 있다. 역 북쪽 출구로 나와 10분만 걸어가면 약 136만평, 여의도 면적의 1.5배에 달하는 광활한 농지가 펼쳐진다.
이곳에서 수십년째 벼농사를 지어온 톈서우시(68)는 지난 3월 모내기 철에 낭패를 봤다. 톈씨를 비롯한 지역 농민들은 월초에 모를 다 심었는데, 3월 중순쯤 정부가 돌연 ‘스마트 절수’라는 이름으로 관개 중단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지난겨울 이례적으로 비가 내리지 않아 따로 논에 물을 대지 않으면 벼농사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톈씨는 봄철 농사를 망쳤다.
톈씨가 이런 일을 올해 처음 겪은 건 아니다. 신주에 반도체 산단이 들어선 뒤 농사철에 농업용수가 끊기는 일이 적잖게 발생했다. 물이 끊기면 쌀 수확량은 반토막 났다. 대만 정부는 공장에 물을 대기 위해 농업용수를 끊었다고 인정하진 않지만, 톈씨는 이를 의심한다. 그는 지난달 25일 기자와 만나 “과학단지가 들어서기 전엔 물이 부족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펑구이즈 대만깨끗한물행동연맹 이사장이 신주 TSMC 오염수 방류 현장에서 수질오염 문제를 설명하고 있다. 양다영 PD
“산단 들어서고 농번기 물 끊겨”
톈씨의 의심이 허무맹랑하진 않다. 반도체 제조 공정은 흔히 ‘물먹는 하마’로 표현한다. 반도체 생산은 눈에 보이지 않는 나노 단위 불순물과의 전쟁이기 때문이다. 웨이퍼 위에 화학물질을 바르고 빛으로 회로를 새긴 뒤(노광), 깎아내고(식각) 덧입히는(증착) 모든 단계마다 잔여물을 씻어내는 세정 공정이 필수다. 전체 공정의 30~40%가 이 세정 작업에 할애된다.
이때 쓰이는 물은 미네랄이나 박테리아, 이온 등을 극단적으로 걸러낸 ‘초순수’(Ultrapure Water)다. 초순수 1t을 정제하려면 일반 용수 1.4~1.5t이 든다. 여기에 극자외선(EUV) 노광장비 등 초고온으로 가동되는 첨단 설비의 열을 식히려면 냉각수도 필요하다.
TSMC가 연간 소비하는 물의 양은 2020년 7700만t에서 지난해 1억5100t으로 5년 만에 두 배로 뛰었다. 1억5100t은 대만 시민 약 140만명이 1년간 쓰는 양보다 많다.
TSMC가 지난달 발표한 ‘2025 TSMC 지속 가능성 보고서’를 보면 지난해 기준 공정에 투입되는 물의 86% 이상을 재활용하는 등 물 사용 효율을 높이고 있다. 그러나 TSMC는 여전히 신주 공장에서만 매일 9만8000t가량의 물을 인근 저수지에서 끌어다 쓴다. 5년 전(5700t)보다 17배 이상 급증한 수치다. 신주 과학단지에 입주한 900여곳의 첨단기업으로 범위를 넓히면 하루 66만t의 물이 근처의 바오산 저수지에서 투입되는데, 이는 한국의 충남 인구 전체가 하루에 쓰는 물양과 맞먹는다.
펑구이즈 대만깨끗한물행동연맹 이사장은 “반도체 산업이 식수로 사용할 물을 강에서 가져가면 강이 오염물질을 희석하거나 감당할 수 있는 능력도 떨어진다”며 “수원지에 의존하는 사람들의 오염 노출 위험이 커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전력 소비량, 2배 빨리 는다
반도체 칩이 빨아들이는 것은 물 외에도 더 있다. 반도체 칩에 나노 단위의 미세한 회로를 새기고 공장 내부를 극한의 청정 상태로 유지하려면 모든 공정에 천문학적 수준의 전기가 필요하다.
초미세 반도체 공정의 핵심인 EUV 노광장비는 눈에 보이지 않는 까다로운 빛을 만들어내기 위해 강력한 레이저를 쏴야 한다. 이때 장비 한 대당 1㎿ 이상의 전력이 소모된다. 심자외선(DUV) 노광장비의 약 10배 수준 전력량이다. 공장 환경을 통제하는 데도 적잖은 에너지가 들어간다. TSMC가 지난해 소비한 전력량은 3만990GWh로 집계됐는데, 이는 지난해 대만 전체가 사용한 국가 총소비전력의 9%에 달한다.
대만 경제부는 지난 6월 ‘2025년 전국 전력 수급 보고서’를 발표하면서 향후 10년(2026~2035년) 동안 연평균 전력 수요 증가율이 2.5% 수준에 달할 것으로 전망했다. 지난 10년(1.2%)에 비해 2배 이상 뛴 수치인데, 대만 정부는 반도체 산업의 전력 수요 급증을 원인으로 들었다.
“반도체로 돈 버는 건 대기업뿐 아니냐”
반도체 전력 수요를 떠받치기 위해 섬 전체가 짊어져야 하는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그린피스 대만사무소가 지난 3월 발간한 보고서를 보면, 현재의 전력 수요 예측에 따라 추가 재생에너지 전환 없이 발전 설비를 꾸준히 확대할 경우 대기오염 등으로 인해 매년 90명의 조기사망자와 277명의 소아천식 환자가 발생할 것으로 분석됐다.
대만 가오슝시 싱다 발전소 근처에서 70년 넘게 거주한 황푸라이(71)는 부모와 장모, 형수를 모두 폐암으로 잃었다. 최근 싱다 발전소 증설 과정에서 지반에 충격을 주면서 황씨의 집 외벽에는 금이 갔다. 싱다 발전소는 추가 전력 수요에 대비해 발전기 2기를 추가로 짓고 있다. 황씨는 “발전기가 이렇게 많이 늘어나면 전체적인 오염 부담도 커질 수밖에 없고 더는 주민들이 감당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반도체 칩 바깥으로 밀려난 사람들은 여느 대만 국민처럼 TSMC가 ‘호국신산’(나라를 지키는 신성한 산)이라고 선뜻 말하길 주저했다. 오히려 불평등과 불공정, 삶을 뒤흔드는 위협이라고 했다.
가오슝시 다린 발전소 근처 마을 펑싱리의 이장인 홍푸라이(61)는 “대만 남부와 중부에서 만든 전기를 반도체 공장이 밀집한 북부로 보내지 않느냐. 그 악영향은 이 지역 사람들이 받게 된다”고 했다.
펑 이사장은 “법적으로 대만의 물 사용 우선순위는 생활용수, 농업용수, 공업용수 순인데 반도체 산업이 국가 핵심산업이 되면서 대만 사람들은 (정부가) 물을 반도체 산업에 먼저 준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톈씨도 “반도체를 위해 농민들이 희생되고 있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반도체 칩으로 따낸 ‘열매’가 칩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고루 퍼질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자오저웨이 대만기후행동네트워크 연구소장은 “TSMC처럼 전력을 대량 사용하는 기업들은 단순한 자원의 소비자로만 존재해서는 안 된다”며 “송전선 구축을 지원하고 재생에너지 보급을 돕는 등 자원 (순환) 시스템을 가능케 하는 조력자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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