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이자 예술가, 누군가의 벗이자 제자…‘인간 정선’을 만나다
대구간송미술관 ‘겸재 정선’ 특별전에 전시 중인 <경교명승첩> 중 ‘독서여가’. 툇마루에 걸터앉은 이가 정선이다. 간송미술문화재단 제공
국보·보물 등 216점 ‘역대 최대’
50대의 자화상 담긴 ‘독서여가’
스승 향한 존경 ‘미호-석실서원’
시인 이병연과 나눈 시·그림 등
정선의 삶·교유 관계 초점 맞춰
반듯한 기둥과 가지런한 마루, 책으로 빼곡한 작은 방이 선비의 단정한 취향을 드러낸다. 하지만 툇마루에 걸터앉은 인물의 자세는 느슨하고, 마루 아래 신발 한 켤레는 흐트러져 있다. 한 손에 부채를 든 채 화분을 바라보는 이는 겸재 정선(1676~1759). ‘독서여가’는 50대 초반 정선의 모습을 담은 자화상으로 여겨진다. 선비의 기품과 예술가의 자유로운 기질이 함께 비친다.
대구간송미술관 특별전 ‘겸재 정선- 조선의 눈으로 조선을 그리다’의 첫머리에는 이 작품이 든 보물 <경교명승첩>이 펼쳐져 있다. 1741년 양천현령으로 있던 정선과 평생의 벗인 시인 이병연이 시와 그림을 주고받으면서 시작된 화첩이다. 한양·한강 일대 풍경과 고사인물화 등 그림 33점을 담았다. 그동안 낱점으로 소개됐던 그림 전부가 이번 전시에서 처음 한자리에 나왔다.
전시 1부에선 겸재의 고향이자 화업을 시작했던 한양과 한강을 그린 작품들을 선보인다. 인왕산 동쪽 기슭의 명소를 그린 ‘청풍계’. 간송미술문화재단 제공
작은 화면들을 따라가면 보이는 것은 ‘인간 정선’이다. ‘인곡유거’에는 인왕산 자락의 자택, ‘미호-석실서원’에는 스승 김창협을 향한 존경이 담겼다. ‘촉재제시’와 ‘시화환상간’엔 이병연과 시와 그림을 주고받던 우정을 기념사진처럼 남겼다. ‘종해청조’는 그의 직장인 양천현아 주변 풍경을 그린 것이다. 화첩은 양수리에서 행주산성까지 한강을 따라 이어진다. 광진·압구정·상암 등 익숙한 동네의 옛 모습을 오늘의 풍경과 겹쳐 보는 재미도 있다.
지난해 간송미술문화재단과 삼성문화재단의 협업으로 호암미술관에서 열린 ‘겸재 정선’이 정선의 회화와 후대 영향까지 조망한 1부였다면, 이번 2부에선 정선의 삶과 교유 관계에 초점을 맞췄다. 국내 최대 규모의 정선 컬렉션을 소장한 간송이 128점을 내놓는 등 총 84건 216점이 나왔다. 국보 1건 1점, 보물 7건 71점을 포함한 국내 정선 전시 사상 최대 규모이다. 그간 연구자들도 도판으로만 접하던 그림을 실견할 수 있는 기회다.
전시는 정선의 작품을 지역과 주제로 나누어 소개한다. 한양에서는 <경교명승첩>에 이어 그의 생활권이던 장동(오늘날 효자동·청운동)의 명소를 담은 <장동팔경첩>을 만난다. 인왕산 동쪽 기슭의 명소를 그린 ‘청풍계’에는 따로 공간을 내줬다. 천으로 굽이진 동선을 만들어 관람객이 그림 속 골짜기로 들어가듯 공간을 연출했다. 정선이 64세 되던 해 그려진 이 작품은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는 고원법을 적용해 고목과 절벽이 더욱 웅장하게 표현됐다. 지방관 시절과 각지 명승을 다룬 전시장에선 ‘달성원조도’를 비롯해 대구 일대의 옛 풍경도 만날 수 있다.
겸재 정선의 <경교명승첩>을 펼쳐 놓은 모습. 전시 1부에선 겸재의 고향이자 화업을 시작했던 한양과 한강을 그린 작품들을 선보인다. 간송미술문화재단 제공
진경산수로만 알려진 정선은 고사인물화와 화조영모화에서도 자신만의 미감을 보여줬다. 당나라 시인 백거이의 고사를 소재로 한 ‘여산초당’은 초당 주변을 정선 특유의 진경산수화법으로 그리고, 인물들은 조선식 복장을 입혔다. 중국의 대표적 산수 주제인 소상팔경을 그린 <소상팔경도첩>에서도 풍경은 조선의 모습을 닮았다. <화훼영모화첩>의 꽃과 동물에는 전통적 형식에 세밀한 관찰을 보탠 생동감이 있다.
마지막은 정선의 상징인 금강산이다. 위에서 굽어본 듯 산 전체를 한 화면에 붙잡은 ‘금강전도’와 40여곳의 지명을 적어 넣은 ‘풍악내산총람’ 등 금강산 전도 8점이 한자리에 모였다. 36세에 그린 <신묘년풍악도첩>과 72세 때 <해악전신첩>을 나란히 보며 반평생에 걸친 화법의 변화도 살필 수 있다. <해악전신첩>에 실린 그림 21점이 모두 공개되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조선 후기 문장가 이덕수는 겸재의 진경산수화풍을 극찬하며 “원백(정선)의 흉중에는 산을 옮기고 돌을 모는 기술이 있다고 하는데 어찌 과장된 말이겠는가”라고 평했다. 이번 전시는 그 솜씨뿐 아니라 정선의 생애와 사회적 맥락으로 이해를 넓힌다. 허용 대구간송미술관 학예총괄은 “이 정도 규모의 겸재 전시는 50년 뒤 탄생 400주년쯤 돼야 다시 가능할 정도”라고 했다.
이번 전시를 위해 대구간송미술관을 찾았다면 지난 7월 문을 연 상설전시실 ‘아름다운 사람이 있는 방, 미인도실’도 놓치기 아쉽다. 한지로 마감한 작은 방에서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와 오롯이 마주할 수 있다. 겸재 정선 전시는 12월27일까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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