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도 사라졌다”는 금시초문 이야기 [금자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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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 국가권력에 의해 ‘프락치’로 몰려 구원받지 못한 채 북으로 간 국회의원들. ‘금자’는 소녀 금자의 시선을 따라 70년이 훌쩍 넘은 그 시간 속으로 여행을 떠난다. 대한민국 친위쿠데타와 내란의 기원을 마주한다. 월화수목금 연재.
“그때 몇살이셨어요?”
“열세살, 국민학교 6학년이었죠.”
내가 묻고, 여사님이 답했다. 진실화해위원회 위원장과 반민특위 사건 유족이 함께한 간담회가 끝난 직후였다. 참석자들이 의자에서 일어나 서로 명함을 주고받는 등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여사님 앞으로 다가가 말을 붙이며 질문했다. 간담회에서 그가 기회를 얻어 발언한 내용 중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아기를 업은 어머니를 연행해 갔다”고 한 대목이 궁금했다.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끌려가셨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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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공안원이 아버지 행방 묻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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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혹시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1938년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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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생이라니. 만 87세. 구순이 멀지 않았다. 그러나 또박또박한 말투와 흐트러짐 없는 걸음걸이는 세월을 이겨낸 듯했다. 챙이 있는 둥근 모자와 파란색 스카프는 단아하고 기품있는 분위기를 자아냈다. 짧게 신상과 관련된 몇 가지 질문을 마저 던졌다.
“7남매라고 하셨는데, 몇째셨어요?”
“제가 셋째예요. 위에 오빠 둘, 밑으로 남동생 넷.”
“그런데 부모가 그렇게 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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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동생들 보살피며 살았어요.”
그는 반민특위 기념사업회 유족들과 함께 진실화해위원회를 찾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반민특위 강제해산 사건에 연루된 피해자의 자녀는 아니었다. 아버지 강욱중은 반민특위 출범을 위한 입법 활동을 적극적으로 한 인물이었다. 그래도 이 사건으로 직접 피해를 본 당사자라고 할 수는 없었다. 강욱중은 국회프락치 사건으로 구속된 제헌국회 의원이었다. 이날 유족의 절반가량은 국회프락치 사건과 관계된 이들이었다.
여사님이 국회프락치 사건 유족이라는 사실은 간담회가 시작하자마자 사회자가 참석자 소개를 해 자연스레 알게 됐다. 국회프락치 사건이란 무엇인가. 이에 대해 여러 차례 기사를 쓴 적이 있었다. 대중들에게는 생소했다. 기사마다 상세한 기본 설명을 반복해서 덧붙이곤 했다. 반민특위는 알아도 국회프락치는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간단하게 말해,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국회의원 13명이 남로당과 내통해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다는 혐의로 구속돼 재판에 넘겨진 사건이다. 13명은 모두 남성이었다. 그런데 그 부인까지 끌려가서 돌아오지 못했다는 말은 금시초문이었다. 호기심을 자극했다.
대한민국은 폭풍의 시대를 지나고 있었다. 여사님은 자신이 당시 13살이라고 했다. 만 나이로 계산하니 12살이다. 공안원이 아기를 업은 어머니를 연행해 가서 아기만 돌려주었다고 했다. 피난길에 엄마 대신 업고 가야 했다던 2살짜리 그 막냇동생이었다.
반민특위 강제해산과 국회프락치 사건은 이승만 정부가 들어선 지 10개월 만의 일이었다. 둘은 떼어놓고 말하기 힘든 역사의 쌍둥이였다. 이날 간담회에서 오간 이야기만으로는 그 관계를 정확히 알기 어려웠다.
“오늘 국회 프락치 사건 관련 분들도 오셨는데, 향후에 어떤 부분들을 주된 과제로 해서 조사를 해줬으면 좋겠다든가 이런 의견들이 있으면 편하게 해주십시오.” (진실화해위원장 S)
“예 솔직히 말씀드리면 지금까지 반민특위 특경대*습격 사건이 진화위에서 다뤄지지 않았다는 게 놀랍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후손을 비롯한 당사자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던 점도 이유가 되지만, 지금까지는 진화위가 지나치게 법조문에 매달려서 법에 규정되지 않은 사건을 좀 피하려는 경향도 있었습니다. 어쨌거나 반민특위 강제 해산에서 해체로 이어지는 과정과 국회프락치 사건 같은 경우에는 대한민국이 출범하고 난 다음에 나타난 첫 번째 헌정 파괴 사건인데 그런 사건의 의미를 진화위에서 제대로 정리해서 역사를 바로잡을 기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반민특위 기념사업회 사무총장 L)
“ 2기** 때 국회프락치 사건을 조사해서 진실규명을 하기는 했으나 재판 자료가 충분히 나와 있지 않아 좀 많이 아쉬운 부분들이 있었어요. 그래서 수사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들, 그리고 이후 계속된 가족에 대한 불이익을 중심으로 접근하긴 했는데, 그때 신청 못 하신 분들도 많습니다. 3기 위원회에 다시 사건이 신청되고 접수된다면 좀 더 시간을 가지고 체계적인 조사가 가능하지 않겠는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진실화해위원장 S)
진실화해위원회는 2005년 첫 1기*** 출범 이후 반민특위 강제해산 사건을 한 번도 다룬 적이 없었다. 반면 국회프락치 사건은 1년 전 조사해 결과를 발표했지만, 위원장 S의 말대로 아쉬움 투성이였다. 유족들의 신청과 함께, 3기 위원회에서 모두 본격적으로 조사할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80년 가까이 지난 일이다. 당사자는 모두 세상을 떠났다. 그 시절을 몸으로 겪으며 지켜본 이도 극소수였다. 여사님은 그중 하나였다. 그의 기억력은 명징할까. 간담회가 끝난 뒤 전화를 건 것은, 기억의 조각을 좀 더 수집해보기 위해서였다.
<다음 회에 계속>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 반민특위 특별경찰대. 서울시경 중부경찰서 경찰들은 1949년 6월6일 서울 명동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해 특별경찰대원들을 무장해제시켰다.
**, *** 1기 진실화해위원회는 2005~2010년 노무현·이명박 정부 때, 2기 진실화해위원회는 문재인·윤석열 정부 때 활동했다.
글쓴이 소개
사회부 기자. 베트남전 시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을 추적한 ‘베트남전쟁 1968년 2월12일’과 유해발굴을 통해 한국전쟁의 상흔을 드러낸 ‘본헌터’를 썼다. 그밖의 지은책으로 ‘유혹하는 에디터’, ‘굿바이 편집장’, ‘대한국민 현대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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