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방암 3기 아내 그리고 사춘기 두 아들과 유럽여행을 떠나자 생긴 일 [장주영 기자의 여책저책]

현실에서는 누구나 크든 작든, 많든 적든 힘든 일이 있을 겁니다. 각자 그 힘겨운 시간을 견뎌내기 위한 방법 또한 다를 텐데요. 상당수는 해답을 못 찾아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여책저책은 고된 현실을 여행이라는 힘으로 이겨낸 작가의 책을 소개합니다.
노정호 작가는 아내의 암 투병이라는 시련 속에서 가족이 유럽여행하며 작은 따스함을 발견한 기록을 책 ‘그 따스함이 나를 살렸다’에 담았는데요. 여행이 고통을 없애주진 않지만 다시 살아갈 마음을 회복시켜준다는 의미를 함께 들어봅니다.
그 따스함이 나를 살렸다
노정호 ㅣ 하움출판사
여행을 하다 보면 이상하게 오래 마음에 남는 풍경이 있다. 자유의 여신상, 에펠탑, 콜로세움 등 눈부시고 압도적인 위용에 누구나 감탄할 만한 명소도 그 중 하나지만 때로는 어린 딸 아이의 손을 꼭 잡고 이름 모를 거리를 걸었던 기억이 가슴을 울리기도 한다. 심지어 여행이 아닌 일상에서 받는 그 느낌도 충분하다.
낯선 풍경 앞에 서면 잠시 숨을 고를 수 있고, 평범한 하루에서 미처 보지 못했던 따스함을 발견할 수 있다. 노정호 작가의 포토 에세이 ‘그 따스함이 나를 살렸다’는 그런 순간들을 붙잡아 시와 사진으로 옮겼다.
노 작가는 2024년 2월 영국 유학길에 오른 지 한 달 만에 아내의 유방암 3기 진단을 받았다. 한국의 주요 병원에서 진료를 받으려 했지만 당시 의료대란으로 유방암 진료조차 쉽지 않았다. 결국 가족은 영국에서 1년 6개월 동안 항암치료와 수술, 방사선 치료, 후 항암치료를 이어갔다.
처음 발견된 것은 왼쪽의 삼중음성 3기 종양이었다. 이후 오른쪽에서도 허투 양성 종양이 발견됐고, 치료 과정에서 항암제를 변경해야 하는 우여곡절까지 겪었다. 가족에게 닥친 시련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사춘기를 지나던 두 아들은 우울감을 겪었고, 막내딸은 영국 학교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으며 말하는 것 자체를 거부하기 시작했다. 삶의 가장 시린 계절이었다. 그때 가족에게 유럽 여행이 들어왔다.
가족은 유럽 17개국, 80여 개 도시를 오갔다. 누군가에게는 사치처럼 보일 수도 있는 선택이었지만 작가에게 여행은 현실을 잠시 외면하기 위한 도피가 아니었다. 힘겨운 시간을 견디고 다시 살아가기 위한 작은 숨구멍이었다.
여행지에서 만난 것은 거창한 사건이나 극적인 풍경만이 아니었다. 길 위에서 마주친 사람의 미소, 자연이 건네는 위로, 가족과 나눈 짧은 대화와 손길 같은 평범한 순간들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작가는 그 순간들을 사진과 짧은 시로 기록했다. 그렇게 모인 기록은 한 가족이 힘겨운 시간을 지나며 발견한 ‘따스함’의 목록이 됐다.
책은 ‘희망과 긍정의 따스함’ ‘자연의 따스함’ ‘사랑의 따스함’ ‘꿈을 향한 따스함’ 등 네 개의 장으로 구성된다. 제목만 보면 다소 거창해 보이지만 책 속에서 말하는 희망은 의외로 소박하다. 여행길에서 딸의 손을 잡는 일, 아름다운 풍경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는 일, 가족과 함께 음식을 나누는 일처럼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순간들이다. 작가는 특별할 것 없는 장면 속에서 삶을 다시 바라보게 하는 힘을 발견한다.
특히 자연을 바라보는 시선이 인상적이다. 넓은 들판과 푸른 하늘, 나무와 바다, 계절의 풍경은 단순한 여행 사진의 배경이 아니다. 때로는 지친 마음을 받아주는 품이 되고, 때로는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주는 상징이 된다.
그래서 이 책에서 여행은 단순히 ‘어디를 다녀왔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얼마나 멀리 갔느냐보다 그곳에서 무엇을 발견했는지가 중요하다. 낯선 도시와 아름다운 풍경을 지나며 작가는 결국 자신의 삶과 가족을 다시 바라본다.
아내의 투병이라는 현실은 여행을 떠났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치료도 계속되고, 불안과 두려움도 따라온다. 그럼에도 가족은 길을 걸었다. 어쩌면 이 여행의 가장 큰 의미는 현실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 현실을 견딜 힘을 얻었다는 데 있다.
여행 중 마주한 따스한 순간들은 병을 없애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지친 마음을 잠시 쉬게 하고 내일을 생각할 여유를 준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도 깨닫게 한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여행 사진과 시 사이에서 한 가족의 시간이 보인다. 웃음이 있었고, 걱정도 있었으며, 때로는 두려움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감정이 겹쳐져 있었기에 여행의 풍경은 더욱 깊어진다.
결국 ‘그 따스함이 나를 살렸다’가 말하는 여행은 ‘떠남’보다 ‘돌아옴’에 가깝다. 낯선 곳으로 떠났다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길, 우리는 이전과 조금 다른 사람이 된다. 평범한 하루가 얼마나 소중한지, 곁에 있는 사람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귀한지를 알게 된다.
책은 막바지로 갈수록 한 가족의 여행 이야기를 넘어 독자의 이야기로 확장한다. 누구에게나 삶이 버거운 순간은 찾아온다. 그때 우리를 다시 일으키는 것은 거창한 기적이 아니라 아주 작은 따스함일지도 모른다. 작가는 여행을 통해 그 따스함을 하나씩 건져 올렸다. 그리고 그것을 사진과 글로 남겼다. 그래서 이 책은 아름다운 유럽 여행기가면서 동시에 삶을 견디는 한 가족의 기록이다.
여행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은 어쩌면 새로운 풍경이 아니다. 다시 살아갈 마음을 얻는 것, 그리고 지금 곁에 있는 사람과 오늘이라는 시간을 조금 더 소중히 바라보게 되는 것이 아닐까. 책은 그 사실을 조용하지만 따뜻하게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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