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 찧던 곳에서 추억을 빻다”… 마을기록관으로 변신한 정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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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남양주 조안면 송촌리에 있는 생태공원 ‘물의 정원’ 건너편 골목 안쪽으로 들어서면 나무 골조에 함석(양철)지붕을 얹은 낡은 건물 하나가 보인다. 벽에 붙은 간판에는 ‘송촌리 마을살이 기록관 용진정미소(용진정미소)’라고 쓰여 있다.
헐릴 위기 맞은 낡은 마을 사랑방
용진정미소는 1966년 정광희·이영자 부부가 이곳에 정착하며 문을 열었다. 이후 30여년간 쌀을 찧고, 고추를 빻고, 국수를 뽑으면서, 마을 주민들이 드나들던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그러나 정광희씨가 세상을 떠나고 문이 닫히자 점점 노후화됐다. 이영자씨는 남편과 함께 평생 일했던 곳이었지만 “정미소를 헐고 빌라를 짓자”고 했다. 그러나 맏딸 정은하(60)씨가 반대했다. “정미소 자체가 아버지 같았”기 때문이다.

“새벽부터 밤까지 무거운 쌀가마를 짊어지며 땀 흘리시던 아빠 모습이 그대로 보여서요. 정미소를 없애면 아빠까지 사라진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정은하씨의 목소리에는 그리움이 배어 있었다. “설이면 가래떡을 빼러 오는 사람들이 골목 저편까지 줄을 섰어요. 엄마가 양념 된장을 내놓으면 떡을 빼면서 사람들이 찍어 먹고요. 밥때가 되면 방에 들어와 다 같이 식사도 했죠.” 정미소는 아버지의 노동과 마을의 인심이 켜켜이 쌓인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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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소, 오래된 나무와도 같은 존재”
2016년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에 사는 김양현(58)씨에게 마을 한가운데 희한하게 생긴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항상 문이 닫혀 있던 그곳의 문이 어느 날 열렸다. 밖에는 벼 낱알을 실은 트럭이 서 있고, 안에서는 기계가 돌아가고 있었다. 사진기를 차에 싣고 다니던 그가 들어서며 말했다. “사진 좀 찍을게요.”
그렇게 정미소와 첫 인연을 맺은 이후 김양현씨는 전국을 찾아다니며 정미소 풍경을 기록했다. “저마다 생긴 게 달라 신기하고도 재밌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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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수밖에 없었다. 정미소는 전문 건축가가 아닌 마을의 손재주 좋은 사람들이 동네 뒷산의 나무를 베어 골조를 짜고, 옥수숫대와 진흙을 이겨 벽을 치는 등 현지의 재료로 얼기설기 지었기 때문이다. 이후 새마을운동을 거치며 양철이나 시멘트 블록으로 보수했는데, 그때도 마을의 사정에 따라 다른 형태로 만들어졌다.

특히 김양현씨가 주목하는 것은 ‘시간이 만들어낸 바랜 색과 낡음’이었다. “양철 지붕이 비바람을 맞으며 은색에서 짙은 철색으로 변해가는데, 그 위에 덧칠해진 페인트가 함께 바래가는 모습은 사람이 인위적으로 절대 만들어낼 수 없는 예술”이었다. “정미소는 마을의 변화 과정을 묵묵히 지켜봐 온 오래된 나무와도 같은 존재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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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소를 소유한 정은하씨와 정미소를 기록하는 김양현씨는 20년 전 ‘팔당생명살림 소비자생활협동조합’에서 만났다. 오랫동안 알고 지냈지만, 정미소라는 공통분모를 찾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2021년 정은하씨가 낡아 무너져가는 정미소로 고민에 빠졌을 때, 한 지인이 김양현씨와 연결해줬다.

사람이야기 울려 퍼지는 마을기록관
정은하씨의 진심에 김양현씨의 기획력이 더해져 용진정미소 재생 프로젝트가 시동을 걸었다. 경기문화재단에서 주최하는 ‘2021 보이는 마을’ 공모사업 소식이 마침 들려왔다. 두 사람은 뜻을 모아 신청서를 냈고 공모사업에 선정되면서 용진정미소 재생은 본궤도에 올랐다.
그러나 만만치 않았다. 용진정미소는 정통 한옥은 아니지만, 골조는 한옥의 방식을 따르고 있었다. 현대 건축가들로서는 어느 나무를 어떻게 빼고 교체해야 할지, 어디를 주축으로 삼아야 할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결국 전북 전주시 완산구 색장동의 색장정미소를 찾아가 궁궐과 사찰 복원공사를 하는 고형국 도편수를 소개받았고, 그의 팀이 골조와 지붕, 벽을 맡아 작업했다.

2021년 12년간 멈췄던 기계 소리 대신 이야기가 울려 퍼지는 ‘송촌리 마을살이 기록관’으로 용진정미소가 재탄생했다. 기록관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배경을 김양현씨가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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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소는 마을에서 가장 교통이 편한 중심부나 초입에 위치해요. 마을에서 가장 넓은 공간이기도 하죠. 잔치를 벌이거나, 대동회를 열고 윷놀이를 즐기던 마을의 ‘광장’이자 ‘커뮤니티 센터’였습니다.” 정미소는 마을 사람들의 희로애락이 가장 많이 교차하던 곳이기에 그들의 삶을 기록하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라는 설명이다.


옛 음식과 살림 이야기로 가득 찬 정미소
첫 프로그램으로 ‘송촌리 할머니들의 먹거리 품앗이 365’가 진행됐다. 열아홉, 스물에 송촌리로 시집와 60년 가까이 해오신 음식을 함께 해먹는 자리였다. 봄에는 쑥개떡과 수박 화채, 여름에는 칼국수와 술빵, 호박만두, 가을에는 감자 송편과 식혜, 겨울에는 김장과 강정을 했다. 마을 할머니 15~20명이 거의 빠짐없이 참여했다. “옛 음식을 하니 옛이야기도 절로 나와 웃다가 울곤 했죠. 배고픈 시절 이야기도 하고, 엄마 이야기도 하고, 빨래터 이야기도 하고….”(김양현씨)
먹거리 프로그램은 ‘오픈! 송촌리 제철 부엌’으로 나아갔다. 할머니들이 강사로 나서 제철 음식을 가르쳐주는 방식이었다. 장화자(86) 할머니는 젊은 사람들을 가르치는 재미에 푹 빠졌다. “맨날 똑같은 날들인데, 젊은 사람들이 와서 가르쳐달라고 하니 즐겁지. 쑥개떡을 만들었는데 우리야 항상 하던 거지만, 젊은 사람들은 모르니까 같이 한 거야.”
특히 이 프로그램은 엄마들에게 큰 위로를 선사했다. “장애아 자녀를 둔 엄마들을 할머니들이 따뜻하게 맞아주시고 같이 음식을 만들어 먹었어요. 엄마들이 잠깐이라도 힐링하고 가는 모습을 보니 ‘아, 정미소를 이렇게 활용하는 게 참 좋구나’ 하는 확신이 들었어요.”(정은하씨)
‘송촌리 손때 묻은 살림이야기’도 펼쳐졌다. “옛날 물건 뭐 있어요?” 하고 물으면 옛 물건과 이야기가 마구 쏟아졌다. 할머니들의 소박한 살림살이는 그 어떤 화려한 유물보다 깊은 울림을 남겼다.



“나 죽고 나면”…할머니가 호미를 버리지 못한 이유
한호석(89) 할머니는 남편이 깎아준 기역(ㄱ)자 모양의 나무를 보여줬다. 소죽을 끓일 때 바닥에 눌어붙지 않게 저었던 갈고리다. “영감이 만들어준 거라 소중해. 소죽 써가지고 소 키우고, 그 소 팔아서, 땅 샀어. 그렇게 재산을 늘린 거야.”
김정순(83) 할머니는 호미 7개를 들고 왔다. 그중 하나는 닳고 닳아서 날이 손가락 한 마디만큼만 남아 있었다. 1950년대 시집올 때 샀던 첫 호미다. “김을 자꾸 매니까, 풀이 많아서 그렇게 된 거야.”
왜 버리지 않았을까. “아까우니까. 내가 쓰던 물건이니까.” 김 할머니가 담담하게 답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나 죽고 나면 애들이 보면서, 우리 엄마가 쓰던 거라고 할 거 아냐.”
지난해에는 실학박물관의 ‘실·실·실 프로젝트’를 통해 용진정미소의 활동은 더욱 풍요로워졌다. ‘실학의 핵심 가치인 실천, 실용, 실험을 오늘의 시선으로 되살리자’는 취지 아래 송촌리의 색깔을 담은 문화상품(굿즈) 개발에 도전한 것이다.
할머니들은 드로잉 북을 펼치고 난생처음 붓을 들었다. 밭에서 보던 고추, 마당에 핀 꽃 등 일상의 풍경을 그림으로 그려냈고, 이는 엽서로 재탄생했다. 엽서가 팔릴 때마다 할머니들에게 소정의 인세를 주기로 했는데 한호석 할머니가 투박한 글씨로 쓴 ‘사랑해’ 엽서가 인기를 끌고 있다. “노인네들이 그린 걸 누가 살까 싶었는데 신기하고 좋지. 돈 생기는 거 있으면 노인네들은 아주 좋아해.” 한호석 할머니가 아이처럼 웃으며 말했다.
올해는 내부 사정으로 인해 용진정미소 건물 안에서의 북적임은 잠시 잦아들었다. 하지만 온라인 기록관으로서 무형의 자산을 아카이브하는 작업을 이어간다. 특히 올해 상반기 실학박물관에서 여는 기획전 ‘절기: 하늘을 읽어 땅을 살리다’에 할머니들이 강사로 참여한다.


“모여라, 하면 그냥 좋아…하루가 잘 지나가거든”
용진정미소는 “옛이야기를 들을 수 있고, 또 오늘을 사는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곳”이라고, 김양현씨가 말했다. “할머니들이 해맑게 웃으실 때, 그리고 당신들이 겪어온 고단한 삶을 꺼내놓을 때 가장 큰 보람을 느껴요. 가슴 속 응어리진 아픈 이야기들을 밖으로 꺼내야 해소가 되잖아요.”
자신의 삶을 용진정미소에서 풀어내 온 한호석 할머니도 끄덕였다. “모여라, 하면 그냥 좋아. 친구들이랑 같이 하루를 보내면 하루가 아주 좋게 지나가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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