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순 선물 받고서야 확실히 풀린 ‘아버지는 공산당’ 오해 [금자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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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 국가권력에 의해 ‘프락치’로 몰려 구원받지 못한 채 북으로 간 국회의원들. ‘금자’는 소녀 금자의 시선을 따라 70년이 훌쩍 넘은 그 시간 속으로 여행을 떠난다. 대한민국 친위쿠데타와 내란의 기원을 마주한다. 월화수목금 연재.
“아버지 기억나세요?”
“전혀 안 나죠.”
“아버지를 어떤 분이라고 생각해오셨나요?”
“오랫동안 공산당이라고만 알았어요. 감옥 간 뒤 형제들에게도 배척을 많이 당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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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하순, 햇빛이 쨍쨍하던 어느 날이었다. 서울 중랑구 망우역 인근 사무실로 그를 찾아갔다. 강금자 여사님과 첫 인터뷰를 한 뒤 국회프락치 사건에 연루됐던 다른 제헌국회의원의 유족들을 수소문했다. 여사님과 가끔 모임을 갖는다는 사람이 여럿 있었다. 그 중 한명이었다. 강금자 여사님의 막냇동생과 동갑이라고 했다. 1950년 아버지와 어머니를 각각 남북한 요원에게 납치당한 뒤 매일 등에 업고 다녔다는 2살짜리 막내 말이다. 둘 다 1948년생이다. 확인해 보니, 여사님 동생이 네 달 먼저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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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김진원. 대학에서 건축공학을 전공하고 오래도록 대기업 건설회사에 다녔던 그는, 지금 작은 건설회사를 운영한다고 했다. 족히 50평은 될 법한 사무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들 현장근무를 나가 있다고 했다. 나는 그가 어떻게 국회프락치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뒤늦게 나서게 됐는지 궁금했다. 아버지가 구속될 당시엔 1살이었고, 북한으로 끌려갈 때는 2살이었다. 오랜 시간 아버지가 좌익 활동을 했다고만 알았다. 그런 그가 2021년 6월 과거 국가폭력 사건을 조사하는 2기 진실화해위원회에 “국회프락치 사건에 대한 증거조작, 국가의 중대한 인권침해행위에 대해 조사해달라”고 진실규명 신청서를 접수했다.
국회프락치 사건이 발생한 지 72년 만이었다. 김진원 선생이 아니었다면, 이 사건에 대한 국가기관의 그 어떤 조사도 이뤄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아니었다면,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 P가 이 사건의 조사개시를 꼭 하겠다며 내부 반대를 무릅쓰고 좌충우돌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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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헌국회의원이었던 아버지 이름은 김옥주. 1914년생으로, 전남 광양의 재력가 집안 9형제 가운데 넷째였다. 일제 강점기에 식모 2명까지 딸려 5형제를 도쿄에 유학 보낼 정도로 유복했다. 김옥주는 와세다대학 전문부 법과에서 공부했다. 이때 같은 대학에서 공부한 동기가 국회프락치 사건의 수사 검사였던 오제도였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고향에 돌아와선 광양 진상국민학교 교사 일을 했다. 1948년 5·10 총선거에서 광양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하며 형제 중 가장 큰 기대를 받았다.
“아버지가 공산당인 줄만 알았다니요.”
“저야 아무 기억이 없는데 그렇게만 알고 있었어요. 집안에서 아버지만 외곬수로 이승만을 반대했다고 해요. 북한으로 가신 뒤엔 다른 형제분들이 아버지에 대한 관심을 놨죠. 그래도 언제부턴가 누명을 썼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했어요.”
“계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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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년 전부터 유족 예닐곱 명이 가끔 중국집에서 만나 사는 이야기를 나누다 헤어졌어요. 그중에 노일환 제헌의원의 조카인 노시선 선생이 계셨는데, 저보다 네 살 위였죠. 저에게 ‘국회프락치 사건은 조작된 것’이라면서 법원에 소송하겠다고 했어요. 아버지 사건에 관심이 조금 생기기 시작했어요. 그러다가 그 책을 만났어요?”
“책이요?”
“제 생일이 9월인데, 2018년 9월에 아들과 사위가 ‘생일선물 뭐 필요하냐’고 묻는 거예요. 그때가 만으로 70이 되는 해였어요. 제가 무심코 ‘1950년 전후 시기의 국내 정치상황에 관한 책들 좀 찾아서 사다 달라’고 답 했어요. 뭔가 아버지 시대를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 같아요. 생일선물로 받은 책 중에 그 책이 있었지요.”
그 책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밝히기로 한다. 교수 K의 저서라고만 해둔다. 당시에도 이미 출간된 지 10년 되었으나, 그로서는 뒤늦은 발견이었다. 보물이었다. “1년간 10번 넘게 읽었다”고 했다. “눈과 귀가 열렸다”고 했다. 이 책을 읽고서야 “국회프락치 사건은 조작됐고, 아버지는 공산당이 아니었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안타깝게도 노시선 선생은 2019년 1월에 뇌출혈로 세상을 떠나셨어요. 제가 많이 의지했던 분인데요. 이제 믿을 건 그 책이었어요. 그해 말이었을 거예요. 책을 출간한 출판사가 일산에 있었어요. 전화를 건 뒤 찾아갔어요. 휘경동 집에서 두 시간은 걸리는 곳이었죠. 그날 오후엔 책을 쓴 선생님의 오피스텔로도 갔습니다. 돌아가신 줄 알았는데 생존해 계신다는 말을 들었거든요. 십만원 넘게 택시비가 나왔어요. 그분을 뵙자마자 일단 큰절을 했습니다. ‘아버지보다 더 위대하고 존경스러운 분’이라고 경의를 표했습니다. 그날 이후 제가 열심히 뛰었습니다.”
발동이 걸렸다. ‘국회프락치’ 이름을 넣은 사단법인을 만들려고 했다. 국회·서울시·통일부에 등록하려 했으나 모두 반려됐다. 유족들이 사건 내용을 파악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판단이 섰다. 국회프락치 사건에 관한 학술토론회를 조직했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유족들을 알게 됐다. 법원에서 유무죄를 다시 가려야 한다는 생각도 했다. 그러다가 “법원보다 진화위부터 가보라”는 중요한 조언을 들었다. 그제야 진실화해위원회라는 존재를 알게 됐다. 막상 혼자 신청서를 내려니 겁이 났다. 김병회 의원의 딸 김영자 여사에게 함께 하자고 했다. 그렇게 해서 신청인은 두 명이 됐다.
“어머니가 1925년생이시네요. 김 선생님이 1살 때인 1949년 어머니와 함께 광양경찰서에 구금됐었는데 기억 못하시겠죠?”
“그렇죠. 저야 아기였으니.”
“여기엔 경찰서에서 뛰어놀았다고 나오는데요. 하하.”
질문을 건네는 나의 노트북 화면에는 피디에프 문서 하나가 띄워져 있었다. 그가 신청서를 접수한 지 4년 만에 나온 진실화해위원회의 ‘1949년 국회프락치 사건(고 김옥주, 고 김병회)’ 결정문이었다. 김진원 선생은 ‘사건 조작’을 먼저 조사해달라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그 결과가 결정문에 담겨 있었다. 아기였던 김진원과 20대 어머니 송명순이 당한 일은 진실규명 대상이었다. 아버지만 인권침해를 당한 게 아니었다.
<다음 회에 계속>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글쓴이 소개
사회부 기자. 베트남전 시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을 추적한 ‘베트남전쟁 1968년 2월12일’과 유해발굴을 통해 한국전쟁의 상흔을 드러낸 ‘본헌터’를 썼다. 그밖의 지은책으로 ‘유혹하는 에디터’, ‘굿바이 편집장’, ‘대한국민 현대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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