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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November 6, 2026

항일 첩보전 이면에 녹여낸 인간 존엄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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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조선총독부를 배경으로 한 첩보 로맨스물 ‘100일의 거짓말’ 포스터. 시대의 무게를 매력적인 인물과 장르의 활용으로 영리하게 돌파했다. 티브이엔 제공
1930년대 조선총독부를 배경으로 한 첩보 로맨스물 ‘100일의 거짓말’ 포스터. 시대의 무게를 매력적인 인물과 장르의 활용으로 영리하게 돌파했다. 티브이엔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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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드라마 ‘100일의 거짓말’을 둘러싼 국내외 반응이 뜨겁다. 1930년대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첩보물 특유의 쫄깃한 설정과 로맨스를 교차하며 장르적 쾌감을 극대화했다.

한국 대중문화는 일제강점기를 다루며 꽤 오랫동안 시행착오를 겪어왔다. 개인의 욕망을 앞세우다 역사의식의 빈곤을 드러낸 ‘청연’(2005)이나, 각자도생의 생존주의를 투사해 항일마저 유희로 휘발시킨 ‘놈놈놈’(2008)이 과도기적 패착의 예다. 얄팍한 ‘쿨함’의 시대를 지나, 한국 시대극은 영화 ‘암살’(2015)과 ‘밀정’(2016)을 기점으로 중대한 진화를 이뤄냈다. ‘암살’이 잊힌 독립투사들을 대중의 심장에 뜨겁게 부활시켰고, ‘밀정’이 회색인의 서늘한 내면을 섬세하게 해부했다면, ‘100일의 거짓말’은 두 작품이 일궈낸 거대한 유산을 완벽하게 흡수하고 세공해 낸 결과물이다.

극 중 이가경(김유정)이 항일투쟁을 “개죽음”이라 일갈하자, 유소란(김현주)은 “조선인이 아니더라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 죽는 걸 개죽음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이는 작품이 딛고 선 윤리적 마지노선을 보여준다. 드라마는 항일투쟁을 처음부터 모두가 받아들일 절대적인 당위로 상정하진 않는다. 대신 비루한 현실 속에서 헤매던 미완의 개인들이 회색지대를 통과하며 각자 어떻게 역사의 주체로 각성해 나가는지 밀도 있게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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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레를 벗어던진 여성들, 개인과 대의를 잇는 연대와 공감의 창구

드라마의 촘촘한 서사를 견인하는 것은 시대의 무게를 짊어진 입체적인 여성 캐릭터들이다. 유소란은 남성 중심의 독립운동사에서 흔히 인질이나 뒷바라지하는 자로 소비되던 모성 캐릭터의 한계를 통쾌하게 부순다. 3·1 혁명 이전까지 평범한 어머니였던 그는, 실제 제암리 사건을 모티브로 한 극 중 계암리 학살로 딸을 잃은 뒤 총을 든 투사로 거듭난다. 남자현 열사가 겹쳐지는 이 궤적은, 모성이 수동적 가족주의에 머물지 않고 불의에 맞서는 능동적인 혁명의 동력으로 폭발할 수 있음을 훌륭하게 보여준다.

‘100일의 거짓말’ 1회. 구국단의 유소란이 사토 신이치 암살을 위해 총을 겨눈 모습. 3·1 혁명 이전까지 평범한 어머니였던 유소란은 딸을 잃고 투사로 거듭난다. 티브이엔 제공
‘100일의 거짓말’ 1회. 구국단의 유소란이 사토 신이치 암살을 위해 총을 겨눈 모습. 3·1 혁명 이전까지 평범한 어머니였던 유소란은 딸을 잃고 투사로 거듭난다. 티브이엔 제공

이 뜨거운 모성은 이가경의 파격적인 근대적 생존주의와 부딪히며 가장 뭉클한 화학작용을 일으킨다. 오직 미국행이라는 세속적 욕망만을 좇던 이가경은 처음엔 독립운동을 냉소하지만, 유소란의 사연을 듣고 충격을 받는다. 대의를 위해 딸을 버린 것으로 암시되는 친모와 달리, 죽은 딸을 위해 대의를 택한 유소란의 모습에서 이가경은 결핍되었던 모성의 단단함을 발견한다. 이후 ‘유사 모녀’의 관계로 발전하는 두 사람의 연대는 뭉클하다. 특히 시대적 소명 앞에서도 이가경의 미국행 꿈이 사장되지 않도록 도우려는 유소란의 따뜻한 시선은, 대의와 개인의 삶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지를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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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경은 종로 바닥의 소매치기이자 과거 유곽의 기생이었으며, 미국인 기자의 정부라는 꼬리표를 달고 조선총독부로 잠입한다. 그는 민족, 가문, 정조라는 전통적 가치에 얽매이지 않는다. 개인의 욕망을 최우선으로 삼고, 3개국어와 소매치기 기술, 미모와 임기응변이라는 재능을 무기 삼아 험난한 시대를 돌파한다. 경쾌하고 오롯한 근대적 주체인 이가경은 드라마에서 현대의 시청자들이 무거운 역사적 텍스트로 진입하게 돕는 ‘창구’ 역할을 한다. 즉 독립운동이나 민주화 운동에 목숨을 걸었던 부모 세대의 진지함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현재의 청년 세대에게, 이가경의 시선은 곧 관객의 시선이 되어준다. 드라마는 세속적인 청년이 타인의 고통을 목격하며 그 질문의 답을 스스로 체화해 가는 궤적을 경유함으로써, 시청자 역시 자연스럽게 시대의 대의에 공명하게 된다. 만약 이가경이라는 렌즈를 거치지 않고 투사들의 숭고함만 전시했다면, 자칫 이데올로기만 주입하는 관제 중국 항일영화처럼 낡고 공허해졌을 것이다. 철저한 개인주의자가 투사들의 세계를 관찰하다 마침내 시대와 연대해 가는 매력적인 성장 서사야말로 ‘100일의 거짓말’이 대중을 사로잡은 현대적인 성취다.

‘100일의 거짓말’ 3회. 이가경은 금서희라는 이름으로 조선총독부에 밀정으로 잠입한다. 경계와 불신과 위태로움 속에서 새로운 관계와 세계가 열린다. 티브이엔 제공
‘100일의 거짓말’ 3회. 이가경은 금서희라는 이름으로 조선총독부에 밀정으로 잠입한다. 경계와 불신과 위태로움 속에서 새로운 관계와 세계가 열린다. 티브이엔 제공

내선일체의 허상과 제국주의의 가스라이팅

반면 김태웅(박진영)은 친일파들이 은폐하고자 했던 식민지 엘리트들의 뼈아픈 민낯을 적나라하게 들추어낸다. 흔히들 ‘친일은 살아남기 위한 불가피한 순응’이었고, 평범하게 사회생활하려면 저절로 주어지는 ‘기본값’인 양 호도하곤 한다. 그러나 김태웅의 서사는 제국의 ‘이너서클’에 진입하기 위한 과정이 얼마나 기형적이고 비참한 충성 경쟁의 연속이었는지를 여실히 폭로한다. 그는 뼛속까지 일본인이 되어 아버지에게 인정받고자 발버둥 쳤으나 “조선인은 배신한다”는 노골적인 멸시 속에서 끊임없이 생존을 위협받으며 영원한 타자로 머물러야 했다. 그의 내적 분열은, 기만적인 ‘내선일체’의 허상을 예리하게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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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일의 거짓말’ 8회. 김태웅은 계암리 학살을 아버지에게 되묻지만, 돌아오는 답은 죄의식의 확인 뿐이다. 그는 금서희가 자신의 조선 이름을 불러주자, 마침내 정체성을 깨닫는다. 티브이엔 제공
‘100일의 거짓말’ 8회. 김태웅은 계암리 학살을 아버지에게 되묻지만, 돌아오는 답은 죄의식의 확인 뿐이다. 그는 금서희가 자신의 조선 이름을 불러주자, 마침내 정체성을 깨닫는다. 티브이엔 제공

식민 지배의 잔혹성은 경무총감 사토 신이치(진선규)라는 입체적인 악역을 통해 구체화된다. 외지(조선) 출신 일본인으로서 내지인들에게 차별받던 그는 조선인을 향해 더 가혹하고 정교한 폭력을 행사한다. 사토 신이치가 김태웅을 입양하는 장면은 섬뜩함의 백미다. 소매치기하다가 잡힌 어린 김태웅 대신 무고한 아이를 쏴 죽인 후 사토는 김태웅에게 “아버지가 되어주겠다”며 손을 내민다. 총구 앞의 강요는 약자의 ‘선택’으로 위장되고, ‘너도 (살인과 지배에) 동의했다’는 죄의식을 심어, 저항을 봉쇄하는 도덕적 가스라이팅이 된다. 이는 강압적인 외교권 강탈을 ‘보호 조약’으로 둔갑시킨 ‘을사늑약’의 미시적 축소판이자 은유다. “독립의 헛된 희망을 빨리 꺾어주는 것이 자비”라는 사토의 기괴한 신념은 제국주의 특유의 오만한 통치 논리를 대변한다. 김태웅은 사토 히데오가 아닌 조선 이름으로 불리는 순간 조선인의 정체성에 눈을 뜨는데, 그가 겪을 고난은 결국 무의식에 내면화된 공포와 죄의식을 끊어내고 이 거대한 ‘아버지(제국)’를 살해함으로써 자아를 회복하는 지난한 오이디푸스적 주체의 투쟁기가 된다.

‘100일의 거짓말’ 8회. 사토 신이치는 폭력적인 행동을 일삼기 보다는 궤변과 심리적 가스라이팅을 구사한다. 그는 약자의 정신을 지배하여 저항을 무력화시키는 제국주의자의 통치술을 보여준다. 티브이엔 제공
‘100일의 거짓말’ 8회. 사토 신이치는 폭력적인 행동을 일삼기 보다는 궤변과 심리적 가스라이팅을 구사한다. 그는 약자의 정신을 지배하여 저항을 무력화시키는 제국주의자의 통치술을 보여준다. 티브이엔 제공

한국만이 가능한 팩션, 세계를 향한 보편적 해방 일지와 정치적 스포일러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2018)이 의병들의 투쟁을 전 세계 시청자들에게 알렸듯, ‘100일의 거짓말’ 역시 항일 첩보전 이면에 인간 존엄의 가치를 녹여내며 세계인의 찬사를 끌어내고 있다. 이러한 성취는 한국 콘텐츠가 글로벌 시장에서 쥐고 있는 독보적 무기가 무엇인지 재확인시켜준다.

현재 최고 수준의 글로벌 자본과 영상 문법을 주도하는 할리우드, 영국, 프랑스, 일본 등은 모두 20세기에 제국주의 가해국의 역사를 지녔다. 오직 한국만이 식민 통치의 참상과 치열한 민족 해방 운동의 서사를 최고 수준의 대중 예술로 빚어낼 수 있다. 과거 서구 열강의 지배를 받았던 수많은 제3세계 시청자들이 한국의 시대극에서 자신들의 반제국주의 투쟁사를 겹쳐보며 감동하는 것은 당연하다. 피지배층의 아픔을 세계 보편의 인권과 연대의 서사로 승화시키는 것은 서구열강이 결코 할 수 없는, 한국 대중문화가 사명감을 가지고 개척해 나가야 할 영원한 블루오션이다.

‘100일의 거짓말’ 8회. 화성 제암리 학살 사건을 모티브로 드라마에서 재구성한 계암리 학살 장면. 일제가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마을 성인 남성들을 교회안에 가두고 불을 질러 학살하였다. 당시 외국인 스코필드 박사에 의해 외신에 알려졌다. 티브이엔 제공
‘100일의 거짓말’ 8회. 화성 제암리 학살 사건을 모티브로 드라마에서 재구성한 계암리 학살 장면. 일제가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마을 성인 남성들을 교회안에 가두고 불을 질러 학살하였다. 당시 외국인 스코필드 박사에 의해 외신에 알려졌다. 티브이엔 제공

역동적인 거대서사의 힘은 과거사에 그치지 않는다. 한국은 압축 성장과 민주화를 겪어냈고, 지금도 전 세계 민주주의 국가들이 마주할 정치적 위기를 가장 앞서 보여주는 ‘선행 쇼케이스’ 역할을 하고 있다. 가령 윤석열 정권 말기, 극단적인 여소야대와 거부권 남발로 인한 국정 교착, 그리고 종국에는 계엄과 내란이라는 초유의 사태로 치달았던 한국 정치의 아찔한 경험은 미국 중간선거 이후 트럼프 행정부가 마주할 늪과 놀랍도록 닮아있다. 거창한 정치학적 담론을 빌리지 않더라도, 숨 가쁜 진흙탕 속에서 광장과 제도를 오가며 살아남은 한국의 시민들은 세계 정치의 다음 시즌을 미리 내다보는 생생한 ‘예방주사’요, 살아있는 ‘스포일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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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악을 물리친 정치세력의 타락 과정을 압축해 낸 드라마 ‘돌풍’이 증명했듯, 우리의 대중문화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가 직면한 징글징글한 현실 정치의 파국마저 훌륭한 엔터테인먼트로 가공해 서구 사회를 향해 서늘한 조언을 던질 역량을 갖췄다. 우리의 역사와 우리의 삶이 바로 콘텐츠다.

황진미 | 대중문화평론가. ‘씨네21’ 영화평론가로 출발하여 티브이 드라마, 예능 등을 두루 평론한다. 인권·역사·여성·장애·인구·성·계급·권력 등 사회과학 전반에 관심이 많다. 원래 전공은 의학·보건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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