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의 문헌 속 ‘밥상’]맥주의 계절
멋쟁이에게는 긴 옷자락 일부러 휘날릴 만한 계절이다. 유지방 깃든 빙과를 탐하기에도 딱 좋은 때다. 아이스크림부터 젤라토를 한껏 즐기자면 바로 주르르 흘러서도 안 되고, 내내 딱딱하기만 해도 못 쓴다. 맥주당에도 황금 같은 때가 바로 이 즈음이다. 상온보다 살짝 아래로 떨어진 맥주의 질감과 풍미를 아는 이가 맥주당이다. 한반도식 염천과 혹한에 상온 운운이 될 말이냐.
중국 맥주 산업의 효시는 1900년 하얼빈에서 시작한 하얼빈맥주다. 지리적으로 러시아와 마주하고 독일마저 일찍 손을 뻗쳐 유럽 분위기가 상당했던 하얼빈은 ‘동양의 파리’ 또는 ‘동양의 모스크바’로 불렸다. 맥주는 하얼빈에 둥지를 틀 만했다. 그 뒤를 이은 맥주가 칭다오맥주다. 1903년 칭다오맥주가 나온다. 홉은 독일산을 썼고, 마침 라오산의 좋은 물이 든든한 뒷배가 됐다. 하얼빈맥주나 칭다오맥주는 모두 일본제국 시절, 오늘날 아사히맥주와 삿포로맥주의 큰형 격인 다이닛폰맥주주식회사에 흡수된 적이 있다. 그러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서며 중국으로 돌아왔다. 하얼빈맥주는 한동안 소련이 쥐고 있다가 1950년 중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두 맥주 모두 중국 해방의 상징이라는 의미가 있다. 두 맥주 모두 ‘내가 중국 1번’을 두고 다투지만 하얼빈맥주가 해방 전 1번이요, 칭다오맥주가 해방 뒤 1번이다.
동남아시아 사람들은 영국이 동인도회사 소속 인력에게 공급한 맥주를 통해 맥주와 만나기 시작했다. 그 맥주는? ‘인디언 페일 에일’, 곧 홉의 향과 빛깔과 쌉싸름한 풍미가 다 짙은 맥주였다. 하지만 다수 아시아 사람들의 기호는 인디언 페일 에일보다는, 보다 옅은 풍미의 황금빛 라거(lager)에 기울었다. 태국의 싱하와 창, 라오스의 비어라오, 캄보디아의 앙코르, 싱가포르의 타이거를 떠올리면 되겠다.
이미 1869년부터 맥주 생산을 시작한 일본 또한 라거의 기세가 드센 곳이다. 한 세기 넘는 역사의 에비스맥주, 삿포로맥주, 아사히맥주 그리고 그 영원한 맞수 기린맥주가 모두 라거를 주력으로 하고 있다.
일본 맥주 산업은 1933년 조선의 영등포에 공장을 세우고 맥주를 만들기 시작했다. 다이닛폰맥주주식회사는 ‘조선맥주’를, 기린맥주주식회사는 ‘쇼와기린’을 설립했다. 해방이 되고 조선의 자본가들은 이 시설을 차지한다. 조선맥주는 크라운맥주와 하이트맥주로 이어졌다. 쇼와기린의 맥주는 OB맥주와 카스맥주로 이어졌다. 또한 라거 일색이었다.
맥주를 맛보기 시작한 중국 사람들은 맥주에 ‘말 오줌 맛 술’이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했다. 굳이 말 오줌을 맛본 사람이 있었단 말인가? 모를 일이다. 맥주의 또 다른 별명은 ‘보리로 빚은 샴페인’이다. 잘못 빚어 잘못 보관하다 마구잡이로 마시면 말 오줌이 될 테고, 제대로 빚어 제대로 간수했다 내 기호와 취향에 맞춰 잘 마시면 정말 샴페인 못잖을 테다.
부드럽게 입안을 씻는 상쾌함, 무더위에 이가 시릴 정도로 차게 냉장해도 남는 청량감, 황금색 몸에 순백 포말이 빚어내는 조형미를 뽐내는 아시아의 라거 맥주는 그 나름의 매력이 분명 따로 있다. 입에 머금고, 목구멍을 넘기기까지 섬세하게 감각할 만한 이 계절의 맥주 질감과 풍미를 떠올린다. 내 맥주 감각을 섬세하게 발휘할 만한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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