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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nesday, October 7, 2026

‘탱크데이’와 ‘암살자(들)’…우리에게 어떤 자유가 필요한가 [신진욱의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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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한 영화관에 걸린 영화 ‘암살자(들)’ 홍보물. 연합뉴스
서울의 한 영화관에 걸린 영화 ‘암살자(들)’ 홍보물.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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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진욱 |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영화 ‘암살자(들)’로 촉발된 사회적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사회학적으로 가장 주목되는 것은 ‘자유’의 문제다. 이 영화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창작과 표현, 상상, 질문의 자유를 말한다. 그러자 반대편이 묻는다. 그렇다면 5·18을 의심할 자유, 세월호와 노무현으로 웃을 자유도 인정할 것인가. 이 논란은 한편의 영화에 대한 평가를 넘어 우리 사회가 깊이 성찰할 근본 문제를 던진다. ‘자유’는 어떤 조건에서 옹호되거나 비난받을 수 있는가? 사람들에겐 어떤 자유의 이름으로도 모욕당해선 안 되는 신성한 무엇이 있는가?

비판자들은 이 영화에서 육영수 여사 저격의 배후에 박정희 대통령이 있다는 음모론을 본다. 그래서, 이 영화는 스타벅스 ‘탱크데이’ 이벤트, 배재고 야구부의 5·18 희화화 응원과 거울상을 이루는 것으로 여겨진다. 나아가 노무현 대통령 서거, 세월호 참사 등을 놀이 소재로 삼거나 의문을 제기하는 것을 비난해온 것과 같은 기준을 왜 여기에는 적용하지 않느냐는 항의가 제기된다. 반면 옹호자들은 이 영화는 독재 폭압에 대한 것일 뿐, 박정희 배후설과 무관하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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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를 배후로 암시했다는 주장은 이 영화가 허용하는 ‘해석의 공간’(폴 리쾨르) 밖인가? 안인가? 밖이라면 그런 주장은 왜곡이라고 반박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안이라면 그런 해석의 공간이 생긴 것을 어떻게 볼지가 문제다. 영화가 박정희를 직접 배후로 지목하진 않는다. 박정희는 연설 장면 외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당시 1인 독재체제의 맥락, 일부 대사와 장면 때문에 그렇게 읽힐 여지는 분명 있다. 따라서 영화가 박정희를 겨냥했다는 주장은 과도하지만, 누군가 박정희를 연상했다면 이를 억지 해석으로 치부하는 건 독단이다.

감독은 의도치 않게 이런 해석의 여지를 남긴 데 대해 후회와 유감을 표했다. 그런데 사태가 더 넓은 정치·사회적 차원으로 확대된 건 제작진과 옹호자들이 ‘자유’의 기치를 내걸고 대응하면서다. 감독과 영화계, 민주당 정치인들은 창작·표현·상상·해석·질문의 자유를 시종일관 주장했는데, 반대편은 즉각 이를 ‘미러링’ 했다. “그럼 5·18 배후설은?”, “노무현 뇌물설은?”, “스타벅스, 배재고는?” 비판자들은 여기서 ‘이중잣대’, ‘내로남불’을 보았고, 일부는 이 틈을 타 ‘혐오의 자유’를 확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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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자유’란 대체 무엇인가? 과거 보수는 관습과 특권으로 유지되어온 것들을 지키는 게 과제였다. 하지만 지금은 진보가 제도 내부로 진입했고 세상은 과거보다 다원적이 됐다. 그래서 오늘의 우파와 극우파는 보수적 금기를 지키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이 원하지 않는 금기를 깨려 한다. 그 슬로건이 ‘자유’다. 도널드 트럼프는 ‘프리덤 파이터’를, 윤석열은 ‘자유대한’을 외쳤고, 세월호 참사 희생자 부모님들의 단식농성장 앞에서 소위 폭식 투쟁을 하며 희롱한 단체는 ‘자유청년연합’이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막연한 추상적 자유가 아니라 ‘어떤 자유인가?’를 말해야 하며, 정당한 자유 행사의 보편적 조건이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 이때 유념할 점은 법적 허용과 도덕적 옹호가 같지 않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불쾌하고 모욕적인 표현도 상당 부분 법적으로 허용하지만, 모든 합법적 표현이 바람직한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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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자유의 문제는 법적 권리와 한계의 관점에서만 해결할 수 없으며, 사회구성원들의 정체성에 대한 도덕적 존중을 고려해야 한다. 철학자 찰스 테일러는 모든 가치와 신념이 동등하게 타당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타인의 정체성을 동등하게 대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해야 하며, 그러한 지평 위에서 상대를 평가해야 함을 강조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타인의 정체성에 연결된 대상에 대한 무시·경멸·모욕은, 어떤 구체적 행위에 대한 정당한 비판과 구분되는, 도덕적 부정의에 해당한다.

흔히 ‘성역’이라 부르는 쟁점을 이 관점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이 단어에는 무엇인가가 부당하게 보호된다는 뉘앙스가 있어, 이를 ‘신성함’이라는 사회학적 개념으로 번역해 볼 수 있다. ‘5·18 성역화’를 비난한 사람들에게도 ‘육영수 여사의 서거’처럼 누군가 함부로 다루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무엇이 있을 것이다. 80년 광주, 세월호 참사, 노무현 대통령 서거에 대한 희롱이 비난받는 이유도 그런 것이다. 이것들의 역사적 의미와 가치는 같지 않지만,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깊이 소중히 여기며 그것의 모욕에 상처받는다는 사실의 상호성이다.

그러한 신성함의 존재는 사회의 본질이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은 인간 사회의 원형에는 ‘신성한 것’과 ‘평범한 것’이라는 두 범주가 있다고 봤는데 이때 ‘신성한 것’이란 사회구성원들의 집합적 힘으로 절대적이고 불가침의 의미를 부여받아 보호되는 어떤 것이다. 모든 사회에는 그처럼 신성하게 여겨지는 가치와 상징·인물·제도가 있다. 뒤르켐은 예컨대 조국, 공화국, 개인, 인간 존엄 같은 것이 현대사회에서 신성함을 부여받는다고 봤다. 그런 것들은 사회를 결속시키기도 하지만, 서로 다른 집단이 서로 다른 것을 신성하게 여길 때 가장 격렬한 갈등의 발화점이 되기도 한다.

특히 한국처럼 독재 과거가 있는 나라에서는 흔히 사회구성원들에게 경외의 대상이 되는 인물, 가치, 역사적 기억이 극도로 분열되어 있다. 그래서 상호 존중의 문화가 각별히 중요하다. 서로의 정체성의 중핵을 공격해서 공존이 불가능해지면, 사회는 심리적 또는 실질적 내전 상태로 빠져든다. 그러므로 이번에 ‘암살자(들)’에서 촉발된 논란은 서로 깊이 상처 입을 수 있고 또 상처 입힐 수 있는 존재임을 성찰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메가박스 티켓의 육영수 여사 형상 위에 포개진 흉탄 그림은, 노무현 대통령 무덤 위에 그려 넣는 뇌물 시계처럼 슬프고 타락한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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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민주화 이후 40년 가까이 지난 오늘날, 우리에겐 한층 더 깊어진 자유의 개념이 필요하다. 한국 사회는 경쟁과 서열 속에 파편화되고, 정치적으로 양극화됐으며, 12·3 이후에는 체제와 생존을 놓고 분열됐다. 우리가 공유할 공존의 원칙이 무엇인지 얘기해야 한다. 내게 소중한 것에 존중을 바란다면, 상대에게 소중한 것을 대할 때도 절제가 요구된다. 그것은 우리가 서로 일치하지 않을지언정, 함께 ‘사회’를 이루어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상호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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