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시, 시의 세계]신의 일
부엌에 드는 달빛은 신의 표식이다.
당신 자신의 배꼽으로부터 당신을 뽑아내는
검은 흡입관 같은 슬픔, 또 불교도들이
‘무심(無心)’이라고 부르는 것은 신의 표식이다.
인간의 대화와 나란히 이어지는,
채찍질 같은 막다른 골목들은 신의 표식이다.
신 스스로의 평온함은 신의 표식이다.
감자나 돈의 놀랍도록 차가운 냄새.
침묵의 견고한 조각들.
이 다양한 표식들로부터 당신은
할 일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슬픔은 걷어버려라, 그것은 할 일을 가리고 있는 덮개다. - 앤 카슨(1950~)
올해 노벨 문학상은 캐나다 시인 앤 카슨에게 주어졌다. 앤 카슨의 독보적인 개성은 고전학자로서의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여러 장르를 넘나드는 독특한 형식을 창안해냈다는 데 있다. 시집 <유리, 아이러니 그리고 신>에는 5편의 장시와 1편의 에세이가 실려 있다. 이 시는 두 번째 작품인 ‘신에 관한 진실’ 연작 중 한 편이다. 시인은 신의 표식을 성스럽고 드높은 제단이 아니라 낮고 비천한 곳에서 읽어낸다. “부엌에 드는 달빛” “검은 흡입관 같은 슬픔” “‘무심(無心)’이라고 부르는 것” “채찍질 같은 막다른 골목들” “감자나 돈의 놀랍도록 차가운 냄새” “침묵의 견고한 조각들”을 신의 표식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슬픔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대문자로 빛나는 “신 스스로의 평온함”이야말로 신의 표식이라고. ‘신의 발작’이라는 시에서 “신의 외벽은 유리로 되어 있”다고 쓰기도 했다. 투명하지만 차갑게 가로놓인 유리막 너머에서 신은 우리에게 말한다. “슬픔은 걷어버려라, 그것은 할 일을 가리고 있는 덮개다.” 신은 슬픔에 빠진 인간을 위로하기보다는 슬픔을 걷어버리고 할 일을 하라고 명령한다. 신에 대해 꽤 신랄하게 말하는 듯하지만, 새겨 읽어보면 앤 카슨은 전통적 신학을 넘어선 근본적 신의 추구자라는 생각이 든다. “나의 종교는 말도 안 되고/ 내게 도움이 되지도 않는다,/ 그렇기에 나는 그것을 따른다”(‘나의 종교’)고 천명했던 것처럼. 시집 제목을 보라. ‘유리’와 ‘신’ 사이에 ‘아이러니’가 들어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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