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강국 韓, 이제 과학강국으로”…물리학 구루들이 던진 조언[제27회 세계지식포럼]

김영기·믈리네크, 韓 과학전략 제언
저출산·의대 쏠림에 과학인재 우려
“예산 주기 아닌 수십년 내다봐야”
“고립된 역량 대신 글로벌 연결을”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과 산업을 구축할 수 있는 탁월한 역량을 보여줬습니다. 이제 다음 단계는 세계적 수준의 과학 생태계를 구축하는 것입니다.”
반도체·정보기술(IT)로 세계적인 ‘기술 강국’에 올라선 한국이 이제는 기초과학의 체력을 키워 ‘과학 강국’으로 도약해야 한다는 제언이 나왔다. 단기간에 산업 성과를 만들어내는 기술력을 넘어 기초과학과 인재, 연구기관에 대한 장기 투자가 한국의 다음 도약을 좌우할 것이라는 진단이다.
김영기 미국 시카고대 석좌교수는 10일 서울 중구 신라호텔에서 열린 제27회 세계지식포럼 ‘물리학자의 관점에서 본 국가 과학 전략’ 세션에서 “한국의 다음 단계는 탁월한 과학과 뛰어난 인재, 강력한 연구기관, 글로벌 연결을 결합하는 것”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세계적인 입자물리학자인 김 교수는 한국이 산업과 기술 분야에서 보여준 성공을 과학 생태계로 확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를 위한 국가 과학전략의 핵심 원칙으로는 ‘인내(Patience)·연결(Connection)·협력(Cooperation)’을 제시했다. 특히 당장의 산업적 성과로 이어지는 연구뿐 아니라 성과를 내기까지 수십 년이 걸릴 수 있는 기초과학까지 함께 키워야 한다고 주문했다.
김 교수는 “과학에는 과학만의 시계가 있다”며 “어떤 과학적 발견은 비교적 짧은 시간에 나올 수 있지만 어떤 것은 상당히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예산 주기가 아니라 수십 년 단위로 생각해야 한다”며 “단기적인 연구와 함께 호기심에 기반한 연구를 보호하고 사람과 연구기관에 투자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기초과학에 대한 장기 투자가 결국 기술 경쟁력의 토대가 된다는 점도 강조했다. 약 100년 전 등장한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이 당시에는 어떤 산업적 가치를 만들어낼지 알 수 없었지만, 수십 년에 걸쳐 현대 산업과 일상을 떠받치는 기술의 기반이 됐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약 100년 전 양자역학이 등장했을 당시에는 사회에서 어떻게 활용될지 알지 못했다”며 “수십 년이 지난 지금은 양자역학에 기반한 기술 없이 우리의 삶이 존재할 수 없을 정도가 됐다”고 말했다.
한국이 과학 강국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과학 인재를 확보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저출산으로 젊은 인구 자체가 감소하는 가운데 학생들이 과학보다 의학 등 다른 분야를 선택하는 현상이 한국에서 특히 두드러지고 있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학생들이 과학 분야로 충분히 진출하지 않는 것은 중요한 문제”라며 “전 세계적인 문제일 수 있지만 한국에서는 더욱 강하고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과학을 전공하면 어떤 진로와 기회를 가질 수 있는지를 학생들에게 적극적으로 알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학생들의 진로 선택에 미치는 부모의 영향에도 주목했다. 김 교수는 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물리학 아웃리치 활동을 해온 경험을 소개하며 부모들이 물리학을 전공한 뒤 어떤 직업을 가질 수 있는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고 설명했다.
AI 시대에는 과학 인재를 키우는 방식도 달라져야 한다고 봤다. 김 교수는 “AI 시대에는 비판적 사고가 중요하다”며 “어떤 하나의 특정 기술만을 훈련하는 것보다 과학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갖추는 것이 급변하는 세상에 대응하는 데 더 좋은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날 함께 대담에 나선 위르겐 믈리네크 전 독일 헬름홀츠협회 회장은 장기적인 과학 투자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정치의 시간과 과학의 시간 사이의 간극도 좁혀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책 결정자는 통상 4~5년의 임기 안에 눈에 보이는 성과를 요구받는 반면 대형 과학 프로젝트는 아이디어에서 실제 발견까지 수십 년이 걸릴 수 있다는 것이다.
믈리네크 전 회장이 이 같은 기초과학의 가치를 어떻게 정책 결정자와 대중에게 설득할 수 있느냐고 묻자 김 교수는 ‘소통’을 해법으로 제시했다. 그는 “장기적인 기초과학이라고 해서 ‘돈을 주고 20년 뒤에 돌아와 결과를 보여주겠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며 “모두 납세자의 돈이고 납세자는 연구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알 권리가 있다”고 말했다. 최종적인 발견까지 시간이 걸리더라도 설계와 건설, 데이터 수집과 분석 등 연구 과정의 진척을 지속적으로 알려 사회적 신뢰를 확보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한국의 과학 생태계를 세계와 연결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어느 한 국가도 모든 것을 지원할 만큼 충분한 돈을 갖고 있지는 않다”며 “돈뿐 아니라 기술과 역량, 인재까지 여러 국가가 자원을 공유할 수 있다”고 말했다.
국가 간 기술·안보 경쟁이 거세지더라도 기초과학의 교류까지 단절해서는 안 된다고도 했다. 김 교수는 “기술과 국가안보에서는 치열하게 경쟁하는 국가들이라도 과학에서는 공동의 목표를 가질 수 있다”며 “과학은 지금 서로 대화하지 않는 국가들을 잇는 다리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믈리네크 전 회장은 대담을 마무리하며 “예산 주기만 볼 것이 아니라 수십 년 단위로 생각해야 한다”며 “고립된 역량을 만들지 말고 연결을 구축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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