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승에서도 나무하는가”…어깨 너머 글 배운 노비 시인 정초부
<초부유고> 1면. 여씨가 정초부의 노비 문서를 불태웠다고 적혔다.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 필사본·아카넷 제공
“호젓한 집을 개울가 응달에 장만하여/메추라기와 작은 숲을 나눠 가졌는데/썰렁한 부엌에는 아침밥 지을 불이 꺼졌고/스산한 방아에는 새벽 서리만 들이치네.”
호젓하지만 빈한하게 사는 조선 후기 사대부의 시처럼 보인다. 실제 시인은 양반이 아니라 노비 출신 나무꾼이었다. 본명은 정봉(1714~1789)이며, 노비 출신이라 본관은 없었다. 경기도 양근군의 강변 마을에 거주했으며, 농사를 짓거나 나무를 해 한양에서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흔히 정씨 나무꾼이라는 뜻의 정초부(鄭樵夫)라 불렸다.
정초부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는 세습 노비였다. 양반인 주인집에서 노비에게 글을 가르칠 리 없었다. 정초부는 주인집 자제 곁에서 귀동냥하며 한문을 익혀 시를 짓기에 이르렀다. 주인으로 추정되는 여춘영이 1755년쯤 정초부를 면천시켰을 것으로 보인다. 글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을 노비로 부릴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정초부는 인생의 절반은 노비, 절반은 양민으로 살 수 있었다.
아무리 뛰어난 재능의 시인이라도 신분이 미천한 자의 글은 체계적으로 묶이지 않았다. 그의 시는 여러 문집에 흩어져 전해졌다. 그에 대한 정보도 오래도록 구전돼 정확하지 않다. 한문학자인 안대회 성균관대 석좌교수는 15년 전 정초부 시집 2종을 발굴해 논문을 발표했다. 이후 제대로 된 시집을 남기지 못한 시인의 작품을 온전히 모아 세상에 내겠다고 생각했다. 안대회는 틈날 때마다 검색하고 수소문하고 문헌을 찾았다. ‘규장각 대우 새로 읽는 우리 고전’의 일환으로 발간된 <정초부시집>(아카넷)은 그 결실이다. 정초부의 시 106수를 수집하고 번역한 뒤 해설했다.
조선의 지도책 <지승>에 실린 경기도 양근군 지도. 시인 정초부가 살던 곳이다. 지금의 광주시에 해당한다. 서울대 규장각학국학연구원 소장·아카넷 제공
정초부는 시에서 자신의 처지를 읊거나 자연을 노래했다. 특히 가난에 찌든 삶을 토로한 시들이 잘 알려져 있다. “시의 명성 높아가도 나무꾼으로 늙어 가니/어깨 위로 쏟아지는 가을빛은 쓸쓸하여라/산바람이 불어와서 장안 길로 떠다 밀고/동대문 제이교를 새벽녘에 이르렀네”로 이어지는 시는 지게에 나무 지고 새벽같이 동대문에 나와 파는 나무꾼의 삶을 보여준다. “인간 세상 험한 행로 나는 아예 안 믿으니/흰 구름 자욱한 곳 골짜기가 널찍하네/티끌 먼지 자욱해도 산과 산은 고요하고/비바람이 몰아쳐도 내 방만은 편안하네”로 이어지는 시는 상처뿐인 인생사와 그에 대비되는 산골의 안식을 노래한다.
안대회는 정초부의 시를 “지성적이기보다는 감성적이고, 귀족적이기보다는 서민적”이라고 평가한다. 그의 시는 대체로 짧다. 이는 정초부가 사대부 문인처럼 체계적인 교육을 받아 폭넓은 학문적 수련을 하지는 못했음을 보여준다. 유득공, 남종현 등 당대 문장가가 정초부의 시를 야박하게 평가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다만 안대회는 “사대부 시인의 시에 적용되는 기준으로만 정초부의 시를 볼 필요가 없다”며 정초부는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심을 표현”했다고 적었다.
정초부는 76세가 되던 1789년 9월 부인과 아들 둘을 남기고 세상을 떴다. 한때 그의 주인이던 여춘영은 애도시를 지었다. 그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저승에서도 나무하는가?/낙엽은 빈 물가에 쏟아진다./삼한 땅에 명문가 많으니/내세에는 그런 집에 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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