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엘리트 엔지니어는 왜 스스로를 ‘인육전지’라 부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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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이공계 인재를 우대한다고들 한다. 맞는 말이다. 다만 그 우대의 이면을 더 들여다보고 싶다. 중국의 대형 테크 기업에서 일하는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들은 35살이 되기 전에 일정 직급까지 승진하지 못하면 ‘최적화’된다. 인력 비용의 최적화, 곧 해고를 뜻하는 업계의 완곡어법이다. 플랫폼의 효율을 최적화하는 일로 청춘을 보낸 사람들이 어느 날 자신이 최적화의 대상이 되었음을 통보받는다. 어느 대기업의 인사평가는 매년 직원을 30·60·10%씩 ‘우수·보통·미달’로 분류한다. 하위 10%는 상여금을 통째로 잃고 해고 후보가 된다. 이 제도는 성공 비결로 여겨져 업계 전체로 확산되었다. 한 최상위 기업의 엔지니어는 2년 동안 새벽 2시부터 아침 8시까지만 쉬며 하루 15~16시간을 일했다. 그는 말한다. “나는 스스로가 인육전지(人肉電池)처럼 느껴진다. 나는 인간이 아니다. 전지다.”
이 증언은 하버드대학의 사회학자 야원 레이가 중국 각지의 엔지니어 64명을 심층 인터뷰해 내놓은 연구에 담겨 있다. 응답자의 열에 아홉이 주 50시간 이상, 절반 이상이 주 60시간 넘게 일하고 있었다. 이들은 시스템의 낙오자가 아니라 총아다. 명문대를 나와 최고 수준의 연봉을 받고, 지방정부가 후커우(戶口·주민등록)와 ‘인재 아파트’까지 내걸며 모셔 가는, 국가가 공인한 인재들. 그런데 바로 그 보상이 사슬이 된다. 대도시 거주권, 학군, 주택 대출은 그들을 우대하는 장치이자 이탈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장치다. 레이는 이를 ‘도금된 새장’이라 이른다. 금박을 입혀 겉은 눈부시지만 속은 쇠창살에 불과한 새장. 화려한 보상이 자유의 대가가 아니라 자유를 가두는 창살이라는 뜻이다. 이렇듯 중국에서 이공계 엘리트에 대한 우대와 착취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한 인사 담당자는 농촌 출신 명문대 졸업자를 일부러 선호한다고 털어놓는다. “그들은 후커우가 필요하고 부모들은 돈이 없다. 그래서 불평하지 않고 모든 시간을 일에 바치는 최고의 직원이다.” 취약함 자체가 채용의 스펙이 되는 셈이다. 선전의 세계 최대 유전체 기업에서는 명문대 출신 젊은 생명과학도들이 회사 담장 안에서 먹고 자고 일하며 ‘수공예’ 복제 기술로 한해 500마리의 복제 돼지를 양산해왔다. 회사는 “값비싼 기계에 대한 의존을 줄이고 훈련된 사람으로 대체했다”고 자랑한다. 우수한 인재란 더 비싼 기계의 대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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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취와 소진은 강제가 아니라 내면화를 통해 유지되고 일반화된다. 농촌에서 고생 끝에 현재의 자리까지 올라온 엔지니어들은 오히려 항변한다. “학생 때는 아침 6시부터 밤 10시까지 공부하지 않았나. 왜 업무에 대해서는 불평하는가.” 입시의 논리가 노동의 논리로 그대로 연장된다. “고용은 쌍방 선택이다. 네가 선택했으니 네 책임이다”라는 자유 선택의 언어가 구조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번역하고, “중국인이 9시부터 5시까지만 일했다면 오늘의 성취는 없었다”는 발전 민족주의가 개인의 희생을 애국으로 격상시킨다. 중국의 젊은이들이 말하는 ‘네이쥐안’(內卷, 소모적인 과잉 경쟁), 곧 실패도 이탈도 허용되지 않는 경주는 이렇게 완성된다. 노동법은? 엔지니어들의 답변은 한결같았다. “법은 쓸모없다.”
물론 내면화가 고통을 지우지는 못한다. 칭화대학을 나와 베이징의 대기업에서 일하는 한 엔지니어 부부는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일하느라 세살배기 아들을 고향의 조부모에게 맡겼다. 자신이 ‘유수(留守) 아동’, 곧 부모가 도시로 떠나 시골에 남겨진 아이였던 그들은 아들이 ‘2세대 유수 아동’이 되었다며 인터뷰 도중 울음을 터뜨렸다. 아이와 함께 사는 이들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아 평일에 자녀와 보내는 시간은 대개 하루 30분 남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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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역시 권위주의 국가라서 이렇다고 쉽게 정리하고 싶은 독자도 계실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상대평가로 하위 10%를 걸러내는 인사제도, 청년의 시간을 갈아넣는 것이 곧 경쟁력이라는 믿음, “학생 때는 더했잖아”라는 논리. 이 문법들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과학기술인의 ‘갈려나감’을 가르는 축은 권위주의 대 민주주의가 아니다. 문제는 ‘인재관’이다. 과학기술인을 긴 생애주기와 온전한 삶을 가진 한 사람으로 대우하는가, 아니면 국가발전의 투입 요소인 전문 역량으로 환원하여 그때그때 근시안적으로 동원할 따름인가. 아니, 어쩌면 ‘인재’라는 말 자체가 문제의 일부일지 모른다. 한 인간을 인재라 부르는 순간 우리는 이미 그를 쓸모로 계량하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은 이런 인재관이 가장 극단화된 형태일 따름이다. 한국은 중국의 이공계 우대가 부럽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귀한 국가대표 과학기술 인재들을 ‘도금된 새장’에 넣어 ‘인육전지’로 만들지 않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래도 나라의 발전을 위해 젊은 인재들의 헌신은 불가피하다고 말하고 싶은 선배 세대도 계실 것이다. 그러나 그 논리의 종착지를 중국이 먼저 보여주고 있다. 레이가 만난 젊은 인재들은 결혼과 출산을 접고, 유학과 이민(潤學·룬쉐, 외국으로 도망갈 궁리)을 알아보고, 드러눕기(躺平·탕핑)와 막나가기(擺爛·바이란)를 택하는 중이었다. 그럼에도 그나마 중국이 굴러가는 것은 한해 수백만명씩 쏟아지는 이공계 졸업생, 그 압도적 숫자 덕분일 것이다. 학령인구가 해마다 줄어드는 한국에는 그렇게 갈아넣을 다음 세대 이공학도가 없다. 의대 쏠림만 해결하면 될 일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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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의 인터뷰에서 시스템 전체를 향해 질문을 던진 이들은 공교롭게도 외국계 기업의 엔지니어들뿐이었다. 한 사람은 말했다. “발전에 얼마나 걸릴지 모른다. 5년일 수도, 100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삶은 유한하다. 많은 사람이 이토록 아프고 불행한데, 그렇다면 이 나라는 건강한 나라인가?” 중국은 이공계 인재를 우대한다. 바로 그 우대의 이름으로 그들을 갈아넣는다. 새장에 금박을 더 입힌다고 그 안의 새가 자연스레 자유롭고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인재를 더 잘 대우하자는 말을 무비판적으로 되뇌기보다 인재라는 렌즈를 잠시 내려놓아 보면 어떨까. 그 렌즈 너머에는 충전이 아니라 휴식이 필요한 사람, 서른다섯 이후의 삶을 상상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이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이 이공계 우대의 첫걸음이어야 한다.

이종식 |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 고려대학교 사학과에서 학사·석사 학위를, 하버드대학교 과학사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과학사학, 과학기술학(STS), 과학기술정책학을 교차시키며 현대 중국 과학과 기술을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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