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망월동…“5·18의 정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월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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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길은 1980년 5월 광주항쟁의 흔적을 따라 걷는 66.2㎞의 길이다. 횃불, 희생, 광장, 열정, 영혼, 그리고 최근 추가된 ‘한강 작가 소년의 길’까지 6개 코스다. 길을 따라 주요 현장에 사적비를 세워 친절히 안내하고 있다. 광주광역시가 만든 스마트투어 앱 ‘5·18 민주화운동’을 따라 걸으면 편리하다. 5·18기념재단 홈페이지에도 오월길 안내 코너가 따로 있다. 광주에서 태어나 고교 시절 광주를 겪은 백기철 전 한겨레 기자가 오월길 이야기를 10여 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망월동 5·18묘지 가는 518번 버스는 거의 만석이었다. 옛 광주교도소 앞에서 타면 20분 남짓이면 도착한다. 망월동 묘지는 오월길 마지막 코스인 영혼 코스의 종착점이다. 오월길 전 구간의 마지막 사적지인 셈이다. 버스는 시내 나들이 다녀온 듯한 노인들로 붐볐다. 여느 시골 버스와 다르지 않다. 10곳이 넘는 정류장을 거치며 천천히 망월동으로 향한다. 마을 앞 정류장에서 삼삼오오 내리는 노인들 표정이 밝다. 국립5·18민주묘지 다음 정류장인 ‘공원묘지’ 정류장에서 내렸다. 5·18구묘역, 즉 망월동 민족민주열사 묘역을 먼저 찾기로 했다. 5·18구묘역은 1980년 5월 광주항쟁 직후 오월 영령들이 묻힌 곳이다. 1997년 길 건너로 신묘역이 조성돼 이장했고, 2002년 국립5·18민주묘지로 승격됐다. 행정구역상으로도 구묘역은 북구 망월동, 신묘역은 북구 운정동에 속한다.
5·18묘지를 갈 때면 신묘역보다는 구묘역을 먼저 찾게 된다. 규모가 아담해 둘러보기 편하기도 하지만 무언가 애틋함이 서려 있다. 1980년대와 1990년대 중반까지 그 한 많고 서러운 시절의 흔적이 배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1980년 5월 당시 이곳은 광주시립공원묘지 제3묘역이었다. 5월29일 상무관 등에 안치된 126명의 시신이 제3묘역에 안장됐다. 합동장례식을 치르고 난 다음 삼우제 때인 5월31일 1백여명의 유족이 ‘5·18 광주의거 유족회’를 결성했다. 이듬해인 1981년 5월부터 3년 동안 신군부의 방해로 추모제를 제대로 치르지 못했다. 금단의 구역이었던 망월동에서 추모제를 지내는 일 자체가 전두환 정권에 대한 도전이었다. 이 과정에서 연행과 구속, 옥살이가 잇달았다. 1980년 이후 망월동 묘지는 5월이면 되살아나는 ‘핏빛 슬픔’의 한가운데 있었다.
묵직한 오후 햇살이 구묘역을 비추고 있다. 경사가 제법 있다. 동네 작은 뒷산의 비탈 같다. 평탄하고 안온한 묘지는 아니다. 1980년 당시 신군부의 삼엄한 통제 속에 시 외곽 공동묘지의 비탈진 언덕배기에 급히 조성한 서북향 묘역이다. 항쟁 직후에는 처연하고 삭막하기 짝이 없었지만 이제는 그래도 차분한 느낌이다. 오후 햇살을 받아 따뜻하고 아늑한 느낌마저 든다. 46년 세월의 무게가 쌓였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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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묘역에 묻혀 있던 5·18 희생자 123명의 유해는 1997년 신묘역이 조성되면서 모두 이장됐다. 애초 봉분은 흙더미를 다시 돋우어 가묘를 조성했다. 망월동 묘지의 원형을 보존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비록 가묘지만 생몰 연도가 적힌 영정과 비석도 그대로 남아 있다. 신묘역이 조성되기 전인 1987년 7월 최루탄에 쓰러진 이한열이 이곳에 묻히면서 망월동 구묘역은 광주를 넘어 전국의 민주화운동 희생자들을 품는 ‘민족민주열사 묘역’이 됐다. 지금은 민족민주열사 56명이 묻혀 있다. 구묘역에는 일반인 묘지도 222기가 있다. 1980년 5월 이전 이곳에 묻힌 이들도 있고, 그 이후에도 상당 기간 일반인들이 묻혔다. 1980년대 중반까지 신군부는 망월동 묘지를 해체하려고 갖은 애를 썼다. 희생자 유족들을 접촉해 유해를 다른 곳으로 이장하도록 회유했고, 일반인 유해도 계속 매장토록 했다. 신군부의 이런 음모는 결국 실패했다.

햇살 비치는 언덕배기 구묘역 중앙에는 5·18 영령들의 가묘가 오순도순 자리하고 있고 그 주변으로 민족민주열사들의 묘가 들어서 있다. 중앙 참배단 뒤편으로 연세대생 이한열의 묘가 있다. 바로 옆으로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의 가묘가 있다. 1987년 7월 이한열이 서울 시청 앞 광장 노제를 마치고 광주로 내려와 망월동에 묻힐 당시에는 박관현의 유해도 이곳에 있었다. 신묘역으로 이장하기 전의 일이다. 1980년 5월 광주의 총학생회장 박관현과 1987년 6월 항쟁의 불꽃 이한열이 손을 마주 잡듯 나란히 망월동에 묻힌 것이다. 박관현의 가묘에는 학사모를 쓴 모습의 영정과 함께 비석에 ‘오월광주의 아들 고박관현 열사의 묘’라고 적혀 있다. 이한열의 묘에는 영정과 비석, 그리고 행적을 담은 별도의 패널이 세워져 있다. 패널에는 “소생을 비는 모든 사람들의 염원을 뒤로 한 채 최루탄 없는 세상으로 떠나갔다”고 적혀 있다. 1986년 4월 신림동 사거리에서 김세진과 함께 분신한 이재호, 1989년 공안정국 와중에 의문을 죽음을 당한 조선대생 이철규, 1991년 백골단 쇠파이프에 맞아 숨진 명지대생 강경대, 그리고 강경대의 죽음에 항거하며 분신한 전남대생 박승희 등 민주화 여정에서 안타깝게 스러져간 젊음들이 묻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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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묘역 왼편 아래쪽에는 저항시인 김남주의 묘가 있다. 1979년 남민전 사건으로 투옥돼 1988년 석방될 때까지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은 시를 쓰는 것이었다. 1980년대를 관통한 그의 시는 독재와 불의에 저항하는 낫이요 칼이었다. 1994년 암 투병 끝에 사망할 당시 그의 나이 49살이었다. 묘비에는 ‘민족시인 고김남주의 묘’라고 돼 있다. 엷은 미소를 띤 채 입을 굳게 다문 영정 모습이 애잔하다. 김남주 시인 옆으로 정광훈 전국농민회총연맹 의장, 오종렬 민주주의민족통일 전국연합 상임의장이 나란히 묻혀 있다. 두 사람은 각각 농민운동과 전교조운동에서 시작해 전국적인 재야 운동을 이끌었다. 오종렬 의장은 나의 고교 은사이기도 하다. 구묘역을 찾으면 오종렬 선생님께는 항상 절을 올리곤 한다. 오 선생님은 5·18 직후인 1980년 7월 고교 2학년이던 내가 경찰 소환을 받고 광주 서부경찰서로 출두할 때 동행하셨던 분이다. 당시 학생주임을 맡고 계셨다. 5·18 직전 교내 시위를 주동한 것과 관련해 잠깐 조사하면 된다는 것이었지만 나는 그날 오후 505보안대를 거쳐 상무대 영창으로 보내져 두 달을 갇혀 있었다. 5·18 이후 광주에서는 고등학생들의 반정부 유인물 살포, 학내외 시위가 끊이질 않았다. 내 모교인 전남고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어느 날 오 선생님은 교무실 자신의 책상을 창 쪽으로 향하도록 거꾸로 돌려놓고 운동권 서적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고 한다. 도대체 제자들이 왜 그러는지 알고 싶으셨다고 한다. 이후 오 선생님은 광주전남 지역 전교조운동의 핵심 역할을 맡았고, 전국연합 등 재야단체를 이끄는 지도자로 우뚝 섰다.
구묘역 주차장 한쪽에는 ‘민족민주열사 유영봉안소’가 있다. 2015년 개장해 비교적 깔끔하다. 주차장 밖에서는 잘 보이지 않아 자칫 빠트리기 쉽다. 오월길 걷기로 처음 구묘역을 찾았을 때는 이곳을 그냥 지나쳤다. ‘민주를 위한 외침’이라는 건물 앞 조형물은 제법 세련돼 보였다. 학생, 노동자, 농민 등 각 계층의 이미지와 함께 남성 3인, 여성 2인으로 성비도 맞췄다. 인물들은 전형적인 한국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 봉안소 안은 은은한 불빛 속에 열사들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아담한 규모다. 입구 좌우로는 열사들 얼굴 사진과 함께 살아온 여정을 간략히 정리해 놓았다. 열사들을 소개하는 두툼한 책자도 따로 비치돼 있다. 자료를 보니 호남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가 광주통합시로부터 이곳 유영봉안소를 위탁받아 운영하고 있다. 어딘가 정성이 느껴지는 이유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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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묘역을 나와 왕복 4차선의 민주로를 건너면 신묘역, 즉 국립5·18민주묘지의 후문이다. 후문에서 조금만 들어가면 2묘역이 나온다. 1997년 조성한 국립묘지 1묘역이 비좁아져 인근에 2묘역을 조성했다. 782기 규모의 기존 1묘역은 2010년대에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 2017년 1184기 규모의 2묘역을 새로 마련했다. 2묘역에는 이제껏 5·18 민주유공자 208명이 묻혔다.
2묘역은 상대적으로 작지만 깔끔하다. 봉분 형태가 아니라 평묘로 돼 있다. 곧게 선 비석 대신 비스듬히 세운 검은 표석들이 푸른 잔디 위에 일정한 간격으로 줄지어 있다. 절제되고 평온한 느낌을 준다. 표석에는 고인의 영정사진과 이름을 새겼고, 양옆으로 조화가 담긴 꽃병과 태극기가 놓여 있다. 전체 묘역의 4분의 1 정도만 채워져 있다. 한승헌 송기숙 정동년 이태복 김홍명 등 비교적 최근에 타계한 이들의 묘가 눈에 띈다. 유족으로 보이는 한 여성이 묘지 앞에 정성스레 음식을 차리면서 망자에게 무언가 말을 건네고 있다. 묘지의 맨 끝쪽이니 최근에 묻힌 것 같다. 아침상을 마주하고 대화하듯 다정하게 소곤거리는 유족의 말투에서 망자에 대한 애정이 느껴졌다.
1묘역은 국립묘지답게 장중하면서도 세련되게 꾸며져 있다. 묘역 앞으로 5·18민중항쟁 추모탑이 높다랗게 솟아 있다. 탑 상단에 마치 두 손을 모아 무언가를 받치는 듯한 형상에는 오월 영령들에 대한 깊은 추모의 염이 담긴 듯하다. 구묘역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넓고 다양한 조형물이 있다. 46년 세월을 지나며 5·18에 대한 역사적 정명이 어느 정도 이뤄진 때문일 것이다. 다만 묘지가 넓고 추모물이 많다고 해서 진정한 정명이라고 할 수는 없다. 말 그대로 5·18에 대해 제대로 이름을 붙이는 것은, 민주주의의 도정에서 오월 영령들이 흘린 핏값을 제대로 매기는 일이다. ‘스타벅스 탱크데이’ 파문, 배재고 야구부의 5·18 조롱 응원. “소요” “폭동” “광주사태” 운운한 국민의힘 의원들과 같은 행태가 이어지는 한 정명이라고 할 수 없다. 오월 광주는 여전히 우리에게 ‘정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추모탑 뒤 양지바른 언덕배기에 영령들이 묻혀 있다. 1구역부터 10구역까지 모두 782명이다. 각 구역은 계단식으로 층을 나누어 조성해 놓았다. 봉긋한 봉분 앞에 비석이 세워져 있고 그 옆에 영정과 조화가 놓여 있다. 개별 비석 뒤쪽에는 유족과 친지들이 한 자 한 자 적어 넣은 애절한 비문들이 새겨져 있다. 1구역의 1번부터 100번(29번 제외), 그리고 2구역 52번까지 모두 151명이 5·18항쟁 기간 동안 희생된 이들이다. 3구역부터 9구역까지는 항쟁 과정에서 부상 당하거나 구금됐다가 이후 세상을 뜬 이들이 묻혔다. 맨 오른쪽 10구역은 행방불명자 묘역이다. 항쟁 과정에서 숨진 사실은 확인됐지만 시신을 찾지 못해 봉분 없이 영만 모셔져 있다. 63명의 행불자 묘지가 있다. 시신은 있지만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무명열사’ 묘는 현재 2기가 있다. 4구역 92번과 97번이다. 2002년 국립묘지 승격 당시 11기의 무명열사 묘가 있었고, DNA 검사 등을 통해 신원확인 작업이 계속되면서 이제는 2기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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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아래층 좌, 우로 있는 1, 2구역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생몰 연도를 보니 1980년 5월21일, 22일 숨진 이들이 많다. 21일엔 계엄군의 도청 앞 집단 발포로 도심이 피로 물들었고, 22일부터는 광주 외곽 봉쇄선 일대에서 계엄군의 무차별 사격으로 인한 학살이 이어졌다. 출생 연도를 보니 1960년대생, 1950년대생이 유독 눈에 많이 띈다. 당시 나이 고작 10대나 20대였을 풋풋한 청춘들이다. 계엄군이 다시 도청에 진입한 5월27일 희생된 이들은 대부분 젊은이들이다. 도청을 지키다 산화한 최후의 전사들이다. 다른 묘역들을 살펴보니 1980년 하반기와 81년, 82년에 숨진 이들이 제법 많다. 항쟁 과정에서 얻은 부상으로 인한 고통 속에서 숨져갔을 것이다.

1구역의 맨 앞 1-01번 묘지에는 김경철(24)이 묻혀 있다. 청각장애로 말을 하지 못하던 김경철은 5·18 최초 희생자다. 김경철은 백운동 까치고개 부근에 상점을 두고 광주 시내를 돌며 구두를 닦거나 신발을 만들어 팔았다. 5월18일 아침 김경철의 집에는 백일을 갓 지난 그의 첫딸을 축하해주기 위해 온 가족이 모였다. 그날 오후 김경철은 청각장애인 친구인 황종호, 박인갑과 함께 평소처럼 일감을 찾아 시내를 돌았다. 충장로 제일극장 골목 입구에서 갑자기 나타난 3~4명의 공수부대원이 김경철의 머리를 진압봉으로 후려쳤다. 김경철은 피를 흘리며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황종호와 박인갑도 반대편에서 나타난 계엄군에게 구타를 당했다. 두 손을 비비며 손짓 발짓으로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병신 흉내를 낸다”며 구타는 더 심해졌다. 계엄군은 둘을 장갑차에 가두고서야 청각장애인이라는 걸 알고 풀어줬다. 적십자병원에 실려 간 김경철은 국군통합병원으로 옮겨졌지만 19일 새벽 3시께 사망했다. 검시 판정서에는 뒤통수가 깨지고 왼쪽 눈알이 튀어나오고 오른쪽 팔과 왼쪽 어깨가 부서졌으며 엉덩이와 허벅지가 깨졌다고 적혔다. 온몸이 두부처럼 으깨진 것이다.
1-04번 묘지에 묻힌 김인태(48)는 해남에서 농사를 짓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들 하숙비를 내기 위해 5월19일 광주에 왔다. 농사일이 바빠 고향으로 바로 내려가기 위해 시외버스공용터미널에 왔다가 공수부대에 붙잡혔다. 그는 전남대로 끌려가 구타당해 사망한 뒤 21일 광주교도소 앞 야산에서 시민군들에게 발견됐다. 5월29일 망월동 합동 안장식 때 영정을 든 다섯 살배기 아들 사진이 보도돼 많은 이들의 눈시울을 적셨던 조사천(35)은 1-57번에 묻혀 있다. 건축노동자였던 조사천은 5월21일 도청 앞에서 목에 총을 맞고 숨졌다. 1-80번에 묻힌 손옥례(20)는 5월23일 화순으로 버스를 타고 가다 주남마을 앞에서 일행들과 함께 계엄군의 매복공격에 희생됐다. 아랫배에 여러 발의 총탄을 맞았고, 대검으로 왼쪽 젖가슴이 찔리고 진압봉으로 온몸을 두들겨 맞은 채 발견됐다. 이는 ‘오월의 노래’ 가사의 모티브가 됐다.
2구역 앞줄 중앙의 2-11번 묘지에는 윤상원과 박기순의 합장 묘가 있다. 두 사람은 광천동의 노동야학이었던 들불야학에서 인연을 맺었다. ‘노동자의 영원한 누이’ 박기순은 1978년 야학 학생들과 야학당 땔감으로 쓸 장작을 모으고 밤늦게 귀가해 자다 연탄가스에 중독돼 세상을 떴다. ‘오월 광주의 영원한 대변인’ 윤상원은 항쟁의 전 과정에서 온전한 실천적 지식인으로서의 모습을 보였다. 27일 새벽 도청을 지키다 산화했다. 주변의 주선으로 두 사람은 1982년 영혼결혼식을 올렸고, 이를 모티브로 한 ‘임을 위한 행진곡’은 5·18을 상징하는 노래가 됐다. 각각 망월동의 다른 묘지에 묻혀 있던 두 사람은 1997년 신묘역으로 이장하면서 비로소 한 봉분에 함께 몸을 누였다.

한강 작가의 소설 ‘소년의 온다’의 주인공 동호의 실제 인물인 문재학(16·광주상고 1학년)은 2-34번 묘지에 묻혀 있다. 그의 묘지 옆에는 이를 알리는 별도의 패널이 있다. 문재학 비석의 뒷면에는 유족이 적은 글이 새겨져 있다. ‘우리 마음에 눈물을 주고/너의 가슴엔 한을 남긴/이승의 못다 이룬 서러운 인연/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다시 만나리.’ 5월27일 도청에서 문재학과 함께 숨진 채 발견된 광주상고 동기 안종필(16)은 문재학과 같은 줄인 2-41번 묘지에 묻혀 있다. 27일 도청 앞에서 체육복 차림으로 숨진 채 발견된 대동고 3학년 박성용(18)은 2-37번 묘지에 묻혔다. 박성용의 비석 뒷면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성용아!/행여 올까하는 기다림 속에서/너는 오지 않고 많은 세월이 흘렀다/이제는 내가 너를 찾을 때가 되었구나!/엄마가.’
10구역의 행방불명자 묘역은 봉분 없이 비석만 세운 가묘들이다. 항쟁 과정에서 희생됐지만 유해를 찾지 못해 넋이라도 달래기 위해 묘비만 설치해 놓았다. ‘유재성의 령’이라고 적힌 묘비 오른쪽 하단에는 교복을 입은 앳된 얼굴의 영정사진이 있다. 서석고 2학년이던 유재성(17)은 계엄군이 도청에 재진입하기 직전인 5월26일까지 도청에서 목격됐다는 증언들이 있었지만
어느 곳에서도 그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다. ‘김흥호의 령’이라 적힌 묘비는 영정사진 대신 무궁화 문양이 새겨져 있다. 1966년생이고, 1980년 5월19일 행불된 것으로 묘비 옆면에 적혀 있다. 14살 중학생 또래의 소년이 흔적조차 찾지 못한 채 빈 묘비로만 남은 모습은 쓸쓸하기 짝이 없었다.
추념탑 오른쪽 유영봉안소는 이곳에 묻힌 이들의 영정과 위패를 한데 모셔 놓았다. 둥근 화강암 벽면을 따라 수백개의 영정이 빙 둘러 채워져 있다. 깔끔하면서도 엄숙함을 자아낸다. 군더더기 하나 없이 잘 정리돼 있지만 무언가 허전하다. 국가보훈부의 국립묘지 관리 규정에 따른 것일 테지만 망자들의 면면을 소개하거나 추모의 염을 담은 글귀나 자료는 찾아볼 수 없다. 사치스러운 불만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모든 것이 반듯하게 정제된 국립묘지다운 엄숙함이, 되레 오월 광주가 지닌 날것의 슬픔과 온기를 밀어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신묘역을 나서는 길에 경내에 있는 5·18추모관에 들렀다. 1980년 5월 희생자들을 구묘역에 묻을 당시 쓰였던 비닐, 태극기 등이 전시돼 있다. 부패한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둘렀던 비닐은 서둘러 매장하느라 벗겨내지도 못했다. 피 묻은 태극기 역시 주검을 감쌌던 것이다. 1997년 신묘역으로 이장하면서 주검들과 함께 수습됐다. 빛바랜 태극기에는 아직도 붉은 핏자국이 선연하다. 추모관 한편에 걸린 박용주 시인의 시 ‘목련이 진들’이 눈에 들어왔다. “목련이 지는 것을 슬퍼하지 말자/피었다 지는 것이 목련뿐이랴/기쁨으로 피어나 눈물로 지는 것이/어디 목련뿐이랴/우리네 오월에는 목련보다/더 희고 정갈한 순백의 영혼들이/꽃잎처럼 떨어졌던 것을….” 신묘역 앞 버스정류장에서 518번 버스를 기다렸다. 20분쯤 지나니 버스가 왔다. 518번 버스에 몸을 싣고 다시 오월 광주의 길 위로 나섰다. <끝>

글·사진 백기철 조선대 자유전공학부 객원교수 kckc100@naver.com
(참고문헌)
황석영 이재의 전용호,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창비, 2017)
국립5·18민주묘지관리소, ‘당신 잠든 곳에 우리 마음 함께 있네’(2009)
호남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호남민족민주열사 희생자’(2024)
5·18기념재단, ‘5·18 민중항쟁사적지’(2003)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 종합보고서(2024)
광주통합시 스마트투어 앱 ‘5·18민주화운동’
5·18기념재단 홈페이지 https://518.org/base/main/view
글쓴이 백기철은 광주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1980년 광주항쟁 때 고교 2년생으로 광주를 겪었습니다. 2023년까지 서울에서 ‘한겨레’ 기자로 33년간 일했습니다. 최근 2년여 동안 매주 광주를 찾을 일이 생겨 틈틈이 오월길을 걸었습니다. 그 사이 한강 작가는 ‘소년이 온다’로 노벨문학상을 받았습니다. 한강 작가의 작품을 따라 걷는 오월길은 더욱 애잔하면서도 명징했습니다. 오월길에서 접한 광주의 어제와 오늘 이야기를 담아 독자들과 만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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