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락치 사건 공판기록 작성한 이도 프락치로 몰렸다 [금자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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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 국가권력에 의해 ‘프락치’로 몰려 구원받지 못한 채 북으로 간 국회의원들. ‘금자’는 소녀 금자의 시선을 따라 70년이 훌쩍 넘은 그 시간 속으로 여행을 떠난다. 대한민국 친위쿠데타와 내란의 기원을 마주한다. 월화수목금 연재.
싯누렇게 변색된 종이는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 같았다.
이미 여러 장이 반토막 나거나 찢겨 있었다. 조심스럽게 한 장씩 넘겨보았다. 손으로 마구 흘려쓴 영어 글씨는 하나도 알아볼 수 없었다. 계속 뚫어지게 쳐다보니 공판 날짜와 ‘검사’(Prosecutor), 오제도(O Che To, 검사 이름) 등의 단어가 조금씩 눈에 들어왔다. 먼저 쓴 글씨에 누군가 줄을 긋고 나서 덧붙여 쓴 부분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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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에 김정기 교수(86, 한국외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 학부 명예교수)의 오피스텔을 방문한 자리에서 77년 전 작성된 보물 같은 자료를 직접 볼 수 있었다. 1949년과 1950년 주한미국대사관의 한국인 직원 두 명이 삼등서기관 그레고리 헨더슨(1922~1988, 터푸트대 플레처 법외교대학원 교수 역임)의 지시에 따라 17차례(결심 공판 3일 포함)에 걸쳐 국회프락치 사건 공판을 모두 방청하고 판사와 검사, 피고 제헌국회의원, 변호사들 간에 오간 내용을 손으로 기록한 원본과 미국 국무부에 보내기 위해 이를 타이핑한 보고서다. 한 번도 세상에 공개된 적이 없는 문서였다. 김 교수와 생전에 교분을 맺어온 헨더슨이 1988년 갑자기 세상을 떠난 뒤, 그의 부인 마이어 여사로부터 1992년 기증받은 것이다. 이 기록을 중심에 놓고 김정기 교수는 2008년 ‘국회프락치사건의 재발견 Ⅰ·Ⅱ’와 ‘국회프락치사건 재판기록’이라는 전환기적 대작을 출간할 수 있었다.

“와, 문서를 보니 기록의 위대함이 실감 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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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대단하죠. (또 다른 문서를 보여주며) 법률자문을 해준 에른스트 프랭켈에게 의뢰했던 법률분석보고서 원본도 여기 있습니다.”
“헨더슨은 국회프락치 사건 공판을 왜 이렇게까지 성실하게 기록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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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입장에서 한국 민주주의가 망하는 것은 미국의 손실이라 생각했을 거예요. 미국이 한국 내부의 이런 정치공작에 눈감아서는 안 된다고 판단하고 절실한 마음으로 본국에 알렸던 겁니다. 한국은 필리핀과 더불어 민주주의 국가가 되도록 미국이 지원한 첫 세대 신생국이니까요. 게다가 헨더슨이 한국이라는 나라에 심취하기도 했어요. 한국사를 공부하며 정약용을 추앙하게 되고, 한국 도자기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렇게 수집한 도자기들은 현재 하버드대 부속 새클러 미술관에 기증돼 있어요.”
“헨더슨을 도합 세 번 만났다고 하셨어요.”
“네. 1986년 12월 뉴욕 컬럼비아대학 세미나장에서 만난 게 최초이고, 1987년 초에 월간지 ‘신동아’ 의뢰로 그가 사는 보스턴에 가서 인터뷰한 게 두 번째였어요. ‘미국이 본 5·16’이 주제였죠 헨더슨이 1961년 5·16 당시엔 주한미국대사관 문정관으로 있었거든요.* 그리고 1987년 말 아내와 함께 그의 집에서 일주일간 묵으며 보스턴을 관광한 적 있어요.”
“생전에는 헨더슨과 국회프락치 사건에 관해 한 번도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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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요. 1987년 말 일주일간 함께 지낼 때도 딴 이야기만 했어요. 그때는 헨더슨이 보스턴의 박물관과 미술관, 독립운동 유적지 등 관광지를 안내해주었어요. 당시 90살이던 그의 어머니 집에 가서 우리 부부를 소개해주기도 했고.”
“그럼 교수님도 책 쓰기 전엔 국회프락치 사건을 전혀 모르셨던 거네요.”
“어렴풋하게만 알았죠. 관심도 없었고.”

국회프락치 사건에 관한 그레고리 헨더슨의 집요한 관심과 열정은 탐사저널리스트를 닮았다. 매회 작성한 공판기록과 법률분석보고서를 미 국무부에 보고한 게 전부가 아니었다. 1964년 이후 한국 전문 정치학자로 변신한 헨더슨은 1972년 7월 말 미국 사회과학연구협의회(SSRC) 지원을 받아 국회프락치 사건의 주요 당사자들을 인터뷰하려는 목적으로 한국을 찾는다. 사건 당시 재판장이었던 사광욱, 검사였던 오제도·선우종원, 한민당 국회의원 김준연, 서울시경국장 김태선, 그리고 사건에 연루된 제헌국회의원 중 유일하게 북한에 가지 않은 서용길 등 20명을 만났다. 국회프락치 사건을 독립적인 주제로 삼아 본격 연구를 진행한 것이다.
그러나 자칫하면 그 모든 노력이 묻힐 뻔했다. 헨더슨이 김정기라는 한국 친구를 만나지 못했다면 국회프락치 사건과 관련한 공판 기록과 인터뷰 자료 등은 상자 안에 처박혀 세상 빛을 보지 못했을지 모른다. 김정기 교수가 헨더슨 사후 4년 만인 1992년 마이어 여사로부터 이 자료들을 넘겨받고도, 강의와 대외활동에 치이느라 정년퇴임 뒤인 2006년에야 비로소 상자 속 자료를 뜯어보게 된 것도 극적이었다. 그는 곧바로 기록의 진가를 알아차렸다. 그리고 자료를 받은 이상 연구를 이어가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결심했다.

“헨더슨 본인은 국회프락치 공판이 열리는 법정에 왜 안 갔을까요?”
“직접 갈 경우 의심받는다고 생각했겠죠. 대신 녹음을 한 거 같아요.”
“그레고리 헨더슨이 1972년 여름에 한국에 와서 오제도를 만나잖아요. 그때 오제도가 정재한의 몸에서 나왔다는 문제의 암호문건에 대해 ‘CIA에 넘겨졌다’ 또는 ‘미국의 한 학자가 빌려 갔는데 되돌려주지 않았다’고 말하거든요. 어떤 문서가 정말 미국으로 넘어갔다면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 소장돼 있지는 않을까요?”
“아뇨. 문서야 조작해서 어떻게든 만들었겠지만, 그거야 순 거짓말이죠. 조작된 문서 합리화하려고 아무 말이나 한 거죠. 애초에 용변을 보게 했다는 둥 이상한 말을 지어놓고 누가 빌려 갔다고 하다니. 하하하.”
“헨더슨이 1972년 7월 말부터 한 달간 한국에 머물렀는데, ‘다리’라는 월간잡지가 1972년 4월호부터 8월호까지 국회프락치 사건 판결문을 실어요. 한국전쟁 때 멸실됐다는 판결문이 이때 공개되거든요. 뭔가 시기적으로 겹치는 느낌이 드는데, 헨더슨과 ‘다리’지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있을까요?”
“그건 전혀 모르겠어요. ‘다리’도 나름 역사의식이 있는 잡지였으니까요. 헨더슨도 ‘다리’에 나온 판결문을 갖고 있었더라고요.”
“(영어 필기체로 된 공판 기록 원문을 가리키며) 이 글씨를 쓴 사람은 누구일까요?”
“대사관 직원 김우식씨가 공판심리를 녹음한 것을 풀어 자기식의 필기체로 쓴 거 같아요. 덧붙인 글씨는 헨더슨일 겁니다.”.
“그때 공판을 기록한 직원이 신정균과 김우식 두 사람이었는데, 신정균이 썼을 수도 있지 않나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다만 헨더슨이 김우식과 우의를 더 다진 건 분명해 보입니다. 김우식은 일본으로 이주했는데, 헨더슨이 도쿄를 방문할 때마다 김우식 집에서 묵었다고 해요. 제가 2006년 11월 도쿄에서 김우식씨를 만날 수 있었던 것도 마이어 여사에게 모리토루(森徹)라고 이름을 바꾼 그의 전화 연락처를 건네받았던 덕분이었어요.”

여기서 김우식(1922~?)이라는 인물이 나온다. 김정기 교수는 그레고리 헨더슨이 넘겨준 자료 분석에만 머물지 않았다. 자료에 기초하여 적극적으로 추가 증언자들을 찾아나섰다. 김우식은 프락치사건의 기록자이면서 당사자였다. 그는 2006년 11월14일 도쿄의 뉴오타니호텔 식당에서 김 교수와 만나 자신이 국회프락치 사건 공판을 어떤 눈으로 보았는지, 또 어쩌다가 또 다른 프락치 사건에 휘말려 간신히 풀려났는지를 설명했다.
김우식은 먼저 직접 목격한 국회프락치 사건 공판에 대해 “일제강점기에 법조관리를 지낸 판사(사광욱)와 서기직에 빌붙은 검사(오제도)가 김약수(국회부의장 출신) 같은 독립투사를 재판하면서 합리적 증거를 놓고 다투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었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 역시 공판이 끝나고 두 달 만인 1950년 5월23일 경찰에 연행돼 전기고문 등을 당하며 “프락치 자백을 하라”는 강요를 받았다.
그는 남로당 프락치가 아니라 북로당(김일성 직계 북조선노동당) 프락치로 몰렸다. 김우식은 일제강점기에 사상범으로 체포돼 3년간 감옥살이를 할 때 함께 지낸 송태경이라는 인물을 서울 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뒤 교류를 이어간 게 화근이었다. 송태경은 서울에서 공작을 벌이던 북로당계의 고위공작원 성시백의 하수인이었다. 송태경은 김우식과 나눈 대화를 적어 모두 상부에 보고했고, 김우식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K-1’이라는 암호명의 프락치가 돼 있었다고 한다.
그래도 천우신조로 풀려났다. 국회프락치 사건 법률분석보고서를 썼던 대사관 법률고문 에른스트 프랭켈이 변호인이 돼주고, 헨더슨을 비롯한 대사관의 상관들이 사표를 제출하면서까지 격하게 항의했기 때문이다.
김정기 교수는 자신의 책에서 이를 가리켜 ‘작은 프락치 사건’이라고 명명하며 김우식의 사례가 하나의 ‘창문’이라고 했다. 국회프락치 사건이 어떻게 엮이게 되었는지를 김우식을 통해 들여다볼 수 있다는 뜻에서였다. 그는 “이 창문을 통해 우리는 수수께끼 같은 암호문서, 고문수사로 받아낸 자백, 무엇보다도 남로당 공작문서를 악용해 무고한 사람들을 법망으로 단죄할 수 있다는 추론에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고 적었다.
남로당이든 북로당이든 그들이 작성했다는 공작문서는 존재할 수도 있다. 다만 그것은 공작원들의 ‘업적’을 포장할뿐 사실 여부를 증명하지는 못한다는 게 역사학자들의 일관된 지적이다. 국회프락치 사건에서 그 증거는 제헌국회의원들의 수사 중 자백이었으나, 공판에서 고문에 의해 강제됐다는 진술이 나왔다.
“교수님 책을 보면 김우식만 성시백의 공작을 받은 게 아니잖아요?”
“그렇죠.”
“남로당 프락치 혐의로 재판을 받은 강욱중 의원이 실은 북로당의 성시백 계통 프락치라는 어느 전향간첩의 주장이 있었어요.** 김옥주·황윤호 의원도 마찬가지였다고 하고요. 남로당과 북로당이 제헌국회의원들을 놓고 서로 자신들이 프락치 공작했다고 자랑하고 홍보하는 꼴이네요. 바로 그 강욱중 의원의 딸이 강금자 여사인데, 만나신 적 있나요?”
“책이 나온 뒤 저를 처음 찾아온 유족이 김옥주 의원의 아들 김진원 선생이었죠. 그분 소개로 지난해 7월 만났어요. 필설로 다할 수 없는 험한 고초를 겪으셨던데, 거기에 비해 너무 고운 얼굴을 지니셨던데요.”
이야기는 돌고 돌아 그레고리 헨더슨에서 김우식으로, 김우식에서 성시백으로, 성시백에서 강욱중으로, 강욱중에서 강금자로 넘어왔다. 다시 강금자 여사님의 기억과 삶 속으로 들어가본다.
<다음 회에 계속>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1958년부터 다시 한국에서 근무했던 그레고리 헨더슨은 1963년 새뮤얼 버거 주한미대사의 특별정치보좌관으로 일하던 중 합동통신 기자 리영희(당시엔 이영희)와의 ‘군정연장과 미국 추가원조’ 관련 인터뷰가 문제돼 서울에서 추방되는 수모를 겪는다. 이후엔 한국전문 정치학자로 변신해 1968년 ‘회오리의 한국정치’를 출간(1988년 개정판)하는데, 이는 한국학 분야의 명저로 평가받는다. 한국에서는 ‘소용돌이의 한국정치’(한울, 2013)라는 제목으로 번역돼 나왔다. 그는 한국학 전문가로서 1960년대 개발독재, 1970년대 유신독재, 1980년대 신군부 독재에 대해 일관되게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왔다. 1973년 8월8일 한국의 야당 지도자 김대중이 도쿄 그랜드팰리스 호텔에서 괴한에게 납치됐을 때 일본에 망명 중인 통일운동가 정경모 선생에게 1보를 듣고 키신저 미국 대통령 국가안보보좌관에게 구조 요청을 전하는 통로 역할을 하기도 했다.
**‘거물간첩 성시백 프로젝트’(유영구, 월간중앙 1992년 6월호)
글쓴이 소개
사회부 기자. 베트남전 시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을 추적한 ‘베트남전쟁 1968년 2월12일’과 유해발굴을 통해 한국전쟁의 상흔을 드러낸 ‘본헌터’를 썼다. 그밖의 지은책으로 ‘유혹하는 에디터’, ‘굿바이 편집장’, ‘대한국민 현대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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