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발 빼고, 걸프는 자력구제···달라진 중동 계산은 ‘각자도생’
12일(현지시간) 예멘 사나에서 친이란 무장세력 후티 반군 병력들이 순찰하고 있다.EPA 연합뉴스
사우디아라비아가 미·이란 전쟁 발발 이후에도 줄곧 운영을 이어온 핵심 송유관을 폐쇄했다. 바브엘만데브 해협을 장악한 예멘의 친이란 무장세력 후티 반군은 진군을 이어가며 홍해에서의 영향력 확대에 나섰다. 미·이란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경제 제재로 방향을 돌린 미국은 중동 지역 내 무력 충돌에는 거리를 뒀고, 걸프국은 자력구제에 나섰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12일(현지시간) 이라크에서 시작된 무인기(드론) 공격으로 사우디 송유관과 기반 시설에 인명·재산 피해가 발생했으며 복구 작업이 진행 중이라고 보도했다. 사우디가 폐쇄한 동서 송유관은 페르시아만과 홍해 연안의 얀부항을 잇는 1200㎞ 길이 송유관으로,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돼 원유 수출이 막힌 후에도 하루 평균 400~500만배럴, 최대 700만배럴을 옮기는 핵심 대체 운송로였다. 지난 2월 미·이란 전쟁이 발발한 후 사우디 동서 송유관이 공격받은 것은 지난 4월 이후 두 번째인 것으로 나타났다.
후티는 바브엘만데브 해협의 주요 요충지에서 빠르게 세를 확장하고 있다. 후티는 예멘 항구 도시 모카를 통제한 지 하루 만에 일대 핵심 전략 지역으로 꼽히는 페림섬(마윤섬)까지 점령하며 사실상 홍해 해상로를 장악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란 혁명수비대(IRGC)는 후티의 진군 소식에 “신의 승리이자 가장 어려운 전장에서 수년간 보여준 불굴의 의지”라고 밝혔다. WSJ은 “후티의 신속한 진격의 정점을 찍는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사우디는 옴짝달싹할 수 없는 처지에 놓였다. 호르무즈 해협에 이어 홍해까지 봉쇄 위기에 내몰린 데다, 우회 경로로 활용해온 동서 송유관까지 위협받게 됐지만 정작 역내 군사 충돌에 불을 붙인 미국은 발을 빼고 있기 때문이다. AP통신은 이날 사우디가 점차 커지는 이란과 친이란 대리 세력의 위협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부닥쳤다며 무함마드 빈살만 왕세자에게 ‘악몽 같은 시나리오’가 펼쳐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2일(현지시간) 아일랜드 트럼프 인터내셔널 골프 링크스 코스에서 열린 아일랜드 오픈 경기를 관람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미·이란 전쟁이 6개월 넘게 이어지며 경제 전쟁으로 방향을 돌린 미국은 현재진행형인 중동 내 무력 분쟁에는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미 온라인 매체 액시오스는 지난 10일 빈살만 왕세자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두 차례 전화해 군 투입을 요청했으나 트럼프 대통령이 이를 거절했다고 전날 보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기자들과 만나 후티 반군이 미국에 개입하지 말 것을 요청했다면서 “그들은 우리와 싸우길 원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들을 공격하러 가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며 “모든 것이 아주 잘 풀릴 것”이라고 말했다. 유엔 산하 국제이주기구(IOM)는 지난 7월 이후 발생한 예멘 피난민이 7만6000명에 이르며, 이 가운데 7만명 이상이 9월 들어 발생했다고 발표했다.
걸프국은 각자도생에 나섰다. 아랍에미리트연합(UAE)은 미·이란 전쟁 발발 이후 처음으로 이란과 정상급 회담을 가졌다. 칼리드 빈 모하메드 빈 자예드 알나하얀 UAE 왕세자는 이날 브릭스(BRICS) 정상회의 참석차 방문한 인도 뉴델리에서 마수드 페제시키안 이란 대통령과 만나 악수를 하고 회담했다. UAE는 최근까지도 미군이 배치된 알민하드 공군기지를 공격받는 등 미·이란 전쟁 동안 이란 공습으로 갈등을 빚어왔다.
사우디·UAE·쿠웨이트·카타르·오만 등 걸프협력회의(GCC)는 오는 14일 오만에서 이란과 호르무즈 해협 문제를 논의하기로 했다. GCC 소속국인 바레인은 이란과 외교 관계를 이유로 불참을 선언했다. 미국이 빠진 GCC 국가와 이란의 직접 대화는 미·이란 전쟁 이후 달라진 역내 관계를 드러낸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이스라엘 국가안보연구소의 대니 시트리노비츠 연구원은 이날 “(회의는) 걸프 지역 전체가 품은 미국에 대한 깊은 실망감을 반영하는 것”이라며 “걸프 관점에서 미국은 위기를 끝낼 신뢰할 만한 길은 제시하지 않으면서 전례 없는 경제적 피해를 초래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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