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곤의 아름다운 우리말] '생각이 짧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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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팀장 시절 이야기다. TV에 견주면 라디오는 늘 약체다. 웬만큼 주목받는 프로그램이 아니면 아나운서들도 선뜻 나서지 않는다. 그런데 채널은 많다. 1·2·3라디오, 1·2FM에 한민족방송, 국제방송까지 있다. 이 많은 자리를 아나운서들에게 고루 나눠 맡기는 일이 라디오팀장의 몫이었다.
TV로 얼굴이 알려진 아나운서에게는 섭외가 몰린다. 팀장은 그 쏠림을 막고 기회를 고르게 나누는 조정자다. 가장 고역은 패널 요청이었다. 연예인이 진행하는 프로그램의 한 코너에 아나운서 몇을 앉혀 이야기를 나누게 하는 형식이다.
◇ 부탁은 당사자의 입에서
패널 자리에는 신인이나 방송 기회가 적었던 유망주를 보내는 게 상식이었다. 그 자리에 이름난 아나운서를 콕 집어 달라는 PD들이 있었다. 한 후배 PD는 늘 작가를 통해 요청을 넣었다. 조율이 끝난 뒤 점잖게 한마디 건넸다. 그런 건 예의가 아니라고.
돌아온 답은 뜻밖이었다. 바쁘면 그럴 수도 있지 않으냐, 협조는 제대로 안 해주면서 지엽적인 걸로 시비를 건다는 것이었다.
내가 짚고 싶었던 건 말이 오가는 길이었다. 부탁은 부탁하는 사람의 입에서 나와야 한다. 남의 입을 빌린 부탁은 받는 쪽 귀에 통보로 들린다. 전화 한 통, 메시지 한 줄이라도 당사자가 직접 건네면 충분했다.
"선배님, 번거로우시겠지만 이번 주 패널로 한 분 부탁드려도 될까요."
이 한 문장에 우리말 부탁 화법의 얼개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먼저 '번거로우시겠지만'이다. 상대가 치를 수고를 앞서 헤아리는 말로,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문을 가볍게 두드리는 노크와 같다. 그 안에 든 높임의 '-시-'는 상대를 내 일의 도구가 아닌 존중받을 사람으로 세운다.
끝맺음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부탁드립니다'로 맺으면 요청이 되고, '부탁드려도 될까요'로 물으면 상대에게 고를 자리를 내준다. 거절할 여지를 남겨 둔 물음이 오히려 승낙을 끌어낸다. 우리말은 이렇게 문장 끝 몇 글자로 말의 온도를 조절한다. 이 한 문장이면 조율은 훨씬 부드러워진다.
조금 가벼운 이야기로 넘어가 보겠다. 기수로 20년쯤 아래인 후배 J가 있었다. 아주 영민한 친구다. 입사 5~6년 차 무렵 예능으로 뜨고 싶어 조바심을 냈다.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 보조 MC나 패널로 나가 끼를 펼쳤다.
아나운서가 예능에서 자리를 잡으려면 자신이 '엄근진'(엄격·근엄·진지)한 부류가 아님을 증명해야 한다. 세 낱말의 첫 글자를 모아 만든 줄임말로, 요즘 말글살이의 단면을 보여준다. 예능은 인맥이 중요한 동네이기도 하다. 그래서 예능국에 살다시피 하는 이들이 생긴다. J가 그랬다.
그러다 보니 근태가 엉망이 됐다. 어느 날 간부회의에서 실장이 J를 특별 관리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고는 나를 전담 마크맨으로 지정했다. 나이도 많고 한 성질 하는 내가 적격이라는 이유였다. 강하게 반발했지만 엎질러진 물이었다.
10시 출근인데 오후 2시쯤 나타나기 일쑤였다. 전화를 걸면 안 받고 문자를 보내면 답이 없었다. 다그치면 변명이 쏟아졌다.
"녹화가 너무 늦게 끝나서요", "새벽에 들어와 잠깐 눈을 붙인다는 게 그만", "몸이 안 좋아 약을 먹었는데 너무 독했나 봐요".
어떤 날은 진정성 가득한 눈빛까지 보탰다.
경위서는 자꾸만 쌓였다. 사내에서는 흔히 '시말서'라고 불렀는데, 일의 처음과 끝을 적는다는 뜻의 일본식 한자어다. 서울시는 2015년 공공언어에 남은 일본식 표현을 정리하면서 '시말서'를 '경위서'로 바꿔 쓰도록 권했다.
'경위'(經緯)라는 말도 뜯어볼 만하다. 본디 베를 짤 때 세로로 거는 날실과 가로로 넣는 씨실을 가리킨다. 날실과 씨실이 엇갈려 천이 되듯, 일이 얽히고 풀린 과정을 짚어 적는 글이 경위서다. 이 말에는 사리의 옳고 그름을 가리는 분별이라는 뜻도 있어 '경위가 바르다', '경위가 없다'고 쓴다. 경위서를 많이 쓴다고 경위 바른 사람이 되는 건 아니다.
궁리 끝에 아이디어를 냈다. 라디오 고정 프로그램을 하나 맡기면 어떻겠느냐고. 라디오국은 반겼고, 오래 진행을 맡아온 연예인 MC 한 사람이 자리를 내줬다. J를 한낮 시간대에 붙잡아 두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자유분방한 영혼을 붙들기엔 역부족이었다. 지각과 펑크가 되풀이됐다. 저녁 시간대로 옮겨봤지만 헛수고였다.
그래도 J는 야단을 치면 공손한 편이었다. 나이 차가 꽤 나서 그랬을 수도 있다. 타박을 가만히 듣다가 반성의 뜻으로 자주 꺼내던 말이 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받았다.
"그 생각은 도대체 언제쯤 길어지는 거냐?"
'생각이 짧다'는 사려가 깊지 못했다는 뜻의 관용 표현이다. 우리말은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을 손에 잡히는 자로 잰다. 생각은 길이와 깊이로 재서 짧다, 얕다, 깊다고 한다. 마음 씀씀이는 넓이로 재서 속이 좁다, 넓다고 한다. 그러니 '생각이 짧았다'고 말하는 순간, 다음엔 더 멀리 내다보겠다는 다짐을 함께 내놓은 셈이다. 내가 '언제 길어지느냐'고 되물은 것도 그 다짐을 보여 달라는 뜻이었다.
잘못을 인정하는 말로는 무난하다. 다만 같은 말이 세 번, 네 번 되풀이되면 사정이 달라진다. 무엇을 잘못했는지, 앞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가 빠진 사과는 듣는 이의 귀에 오래 머물지 못한다.
◇ 사과와 변명 사이
사과를 담는 낱말에도 결이 있다. '미안하다'는 남에게 마음이 편치 못하고 부끄럽다는 뜻이다. '죄송하다'는 죄스러울 정도로 황송하다는 뜻이어서 윗사람이나 공적인 자리에 어울린다. '송구하다'는 두렵고 거북한 마음까지 얹어 한층 무겁다. 어느 낱말을 고르든 말 뒤에 행동이 따라야 무게가 실린다.
변명과 해명도 가려 쓸 일이다. 해명(解明)은 까닭이나 내용을 풀어서 밝히는 일이다. 변명(辨明)은 잘못이나 실수에 구실을 대며 그 까닭을 말하는 일이다. 둘 다 까닭을 말하지만, 향하는 곳이 다르다. 해명은 상대가 모르는 사실을 채워주고, 변명은 내 허물을 덜어내려 한다.
흥미롭게도 '변명'에는 옳고 그름을 가려 사리를 밝힌다는 뜻도 있다.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명'이 바로 그 뜻이다. 하지만 오늘날 일상에서 '변명'은 대개 구실을 대는 일로 읽힌다. 말뜻도 쓰는 사람들을 따라 기운다.
사과 앞에 변명을 세우면 사과가 묻힌다.
좋은 사과는 세 마디로 짜인다. 잘못을 구체적으로 짚고, 상대가 겪은 불편을 헤아리고, 다음을 약속한다.
"오늘 네 시간 늦어 진행 순서를 다시 짜게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녹화가 있는 날은 전날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정도면 생각은 충분히 길다.
J는 지금 회사를 떠나 프리랜서로 종편 등을 무대로 종횡무진 활약하고 있다. 그 시절의 짧은 생각들이 지금쯤은 꽤 길어졌으리라 믿는다. 그의 건투와 행운을 빈다.
강성곤 현 KBS 한국어진흥원 운영위원
▲ 전 KBS 아나운서 ▲ 정부언론공동외래어심의위원회 위원 역임 ▲ 현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언어특위 위원 ▲ 전 건국대·숙명여대·중앙대·한양대 겸임교수 ▲ 현 가천대 특임교수
제보는 카카오톡 okjebo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2026년11월06일 09시12분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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