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아의 조각보 세상]성별 임금 격차 해소에 보수, 진보는 없다
2015년 7월14일 영국 BBC가 보도한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의 말이다. 그는 기업들이 여성 임금을 인상하도록 압력을 가할 것이며, 의회에서 통과된 250명 이상 규모 기업에서 일하는 남녀 직원의 임금을 공개하도록 한 평등법 시행령을 12개월 이내에 도입하겠다고 말했다. 야당인 노동당은 이 조치를 환영하면서도, 너무 늦었다고 꼬집었다. 자유민주당 출신으로 평등부 장관을 지낸 조 스윈슨은 “다음 세대가 올 때까지 기다릴 여유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솔직히 말해서, 야심이 부족한 발언이다”라고 논평했다.
당시 영국의 성별 임금 격차는 19.1%였다. 같은 날 페이스북에서 캐머런은 “두 딸의 아버지로서 딸들이 사회에 첫발을 내디딜 때 직장에서 완전한 성평등을 경험하기 바란다”고 썼다. 그리고 100대 상장 기업 이사회 내 여성 비율이 25%를 달성했다는 사실을 축하하면서도 “갈 길이 멀다”고 덧붙였다. 캐머런은 중도 우파인 보수당의 정치인이었다. 그런 그가 “새로운 영국형 사회계약”이란 수식어까지 동원하며 성별 임금 공시제 도입을 환영한 것이다.
그의 말은 얼마나 실현됐을까? 최근 발표된 멜라니 존스와 에지 카야의 논문 ‘영국의 조직 내 성별 임금 격차: 임금투명성 법 이후 무슨 일이 일어났나?’는 이 제도가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어 왔음을 밝히고 있다. 2017년부터 2021년까지 성별 임금 격차 보고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법 시행 초기 성별 임금 격차가 컸던 조직일수록 임금 격차가 더 크게 줄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성별 임금 격차는 조직 내에서도(절대적 격차), 동일 산업의 다른 기업과 비교해서도(상대적 격차)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초기 임금 격차가 1%포인트 높을수록 연간 임금 격차는 약 0.12%포인트 더 축소됐다. 초기 임금 격차가 컸던 기업일수록 상위 임금 계층에서 여성들이 늘어나고 하위 계층에서 여성 비중이 줄어드는 현상도 나타났다. 채용, 유지, 승진에서도 기업 정책이 성평등한 방향으로 바뀌었음을 시사한다.
이 법의 어떤 요소가 이런 결과를 가져왔을까? 영국의 성별 임금 공시제는 전면적인 공개에 특징이 있다. 기업의 성별 임금 격차 보고서는 일반 대중에게 공개되며 언론에 보도된다. 이른바 사회적 평판을 활용하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대표적인 사례가 BBC에서 발생했다. 2017년 공영방송으로서 BBC는 연봉 15만파운드 이상 고액 억대 연봉자의 급여를 이름과 함께 공개했다. 이 과정에서 여성의 고위직 과소대표와 동일 직무 내 성별 불평등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데이터가 공개된 후 영국 사회는 발칵 뒤집혔고 노동자들의 분노가 터져 나왔다.
트렐리븐과 풀러의 연구에 따르면, 이후 영국 언론에서 성별 임금 격차를 다루는 시각과 프레임이 바뀌었다. 이전에는 임금 격차의 원인을 여성의 ‘개인적 선택(출산, 육아휴직, 파트타임, 소극적인 협상 태도 등)’에서 찾는 경향이 있었지만, BBC 데이터 공개 사건 후 ‘편견과 차별’ 문제로 초점이 이동했다. 그리고 성별 임금 격차가 축소되고 있음을 입증한 연구들이 발표됐다. 캐머런의 바람처럼 한 세대 내 해소될지는 알 수 없지만, 영국 사회가 그 길을 걸어온 것은 분명하다. 유럽의 많은 국가도 다양한 방식으로 뒤따르고 있다.
한국은 어떤가? 2019년 12월 서울시는 성평등 임금 공시제를 도입하고 결과를 발표했다. 투자·출연기관을 대상으로 직무와 직급, 근속연수, 임금 등을 성별에 따라 분석하고 임금 격차를 산출했다. 분석 대상 기관은 결과를 토대로 성별 임금 격차를 줄여가기 위한 계획을 수립하고 실천해 갈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7년이 지났지만, 중앙이나 지방정부 중 어디에서도 성별 임금 격차를 해소하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이나 성과가 보이지 않는다.
22대 국회에는 ‘고용평등공시제’라는 이름으로 이미 10개의 법안이 발의돼 있다. 성평등가족위원회가 심사하고 법사위를 거쳐 본회의까지 통과하려면 시간이 없다. 11년 전 영국의 총리가 늦었다는 지적을 감수해야 했던 제도가 왜 오늘 한국에서는 국회조차 통과하지 못하는 것인가? 2026년 한국의 성별 임금 격차는 29%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10.3%의 2.8배이며 부동의 1위다. 여야를 가리기에는 한국의 성별 임금 격차가 너무 크고 견고하다. 국회는 이 역사적 사명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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