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선면]“다시 돌아가도 그들을 숨겨주겠어요”…야만에 맞서 서로를 구하다
어느 겨울밤, 친하게 지내던 마을 이웃이 독자님의 집 대문을 두드립니다. 죽을 위기에 처했는데 잠시 숨겨달라면서요. 아무 죄 없는, 하얀 눈처럼 순박한 사람입니다. 벌벌 떠는 그를 일단 집에 들였는데 이내 군인들이 들이닥쳐 “빨갱이 어디 갔느냐”며 총구를 들이밉니다. 사실대로 말하면 무고한 이웃이 끌려가고, 시치미를 뗐다가는 나까지 피를 볼 수 있습니다. 독자님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극단적 가정 같지만 한국 현대사에서 숱하게 벌어졌던 일입니다. 해방 이후 이념 대립과 학살, 군사독재 시절 총칼을 동원한 민주화 운동 탄압, 체포와 고문…. 한국의 지난날은 국가폭력의 비극으로 얼룩져 있습니다. 국가는 ‘연좌제’까지 동원했습니다. 도움의 손길을 끊어 쫓기는 사람을 고립시키기 위해서였죠.
하지만 사람이 사람을 돕는 연대의 힘은 쇠심줄보다 질겼습니다. 수많은 평범한 이들이 위협받는 타인을 조건 없이 도와줬습니다. 저는 지난 몇 달 동안 다른 이들에게 피난처가 되어 준 이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렇게 만든 경향신문 창간 기획 ‘셸터: 서로를 구하다’를 오늘 레터에 소개해드리려 합니다.
(‘셸터: 서로를 구하다’ 기획기사는 인터랙티브 페이지 https://www.khan.co.kr/kh_storytelling/2026/shelter/ 에서 한 눈에 볼 수 있습니다. 아래 링크를 클릭하거나, 괄호 안 주소를 복사해 주소창에 붙여넣어주세요.)
야만을 넘어선 ‘연대’
제주 서귀포시 남원읍 신흥리에는 ‘몰라 구장’의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옵니다. 1948년, 극단적 이념 대립으로 수많은 민간인이 목숨을 잃은 4·3 사건 때 마을을 지킨 김성홍 구장의 이야기입니다. 말 한마디로 사람이 죽고 마을이 불타던 시절, 김 구장은 마을 사람들을 의심하는 군경의 온갖 추궁에도 “모른다”고 잡아떼기만 했어요. ‘몰라 구장’은 그렇게 생긴 별명입니다. 김 구장은 순찰을 도는 순경들에게 밥을 지어 먹이면서 마을을 보호했죠.
지금도 그렇지만, 제주는 좁은 지역사회 특성상 마을 사람들끼리 서로를 잘 알고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그런 이들에게 4·3 사건은 큰 상처였죠. 어릴 때부터 잘 아는 이웃들이 끌려가 학살당하고, 그들을 감싸려다 죽는 이들도 많았습니다. 때로는 나와 내 가족이 살기 위해 이웃을 외면해야 하는 일도 없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 와중에도 많은 이들이 불이익을 각오하고 서로를 지켜 줬죠.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 국면에서도 이런 이들이 등장해요. 경남 김해 한림면의 최대성·최대홍 형제는 창고에 갇혀 죽음을 기다리던 마을 사람들을 구출합니다. 충북 청주의 경찰 안만근 지서장은 창고에 갇힌 보도연맹원들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어기고 사람들을 풀어 줬죠. 갇힌 사람들이 무고한 민간인이라는 걸 너무 잘 아는 이들이었기에 어려운 용기를 냈습니다.
1987년 6월10일 서울 한 거리에서 시위대와 전경이 대치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는 독재에 맞선 반독재 투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정권이 시민들의 시위를 총칼로 진압하던 시절이었습니다. 흉흉한 총칼과 곤봉, 최루탄 앞에서도 서로를 구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1960년 ③4·19 혁명 시위에 나섰다가 총을 맞은 고등학생 정우화씨를 지켜 준 교회 집사처럼요. 그는 교회를 수색하겠다며 찾아온 경찰에게 “학생들이 저쪽으로 도망갔다”고 거짓말을 해 정씨를 구했습니다.
1979년 10월 ④부마민주항쟁 때, 국제시장 등 상인들은 진압 경찰에게 쫓기는 대학생들을 앞장서 지켜 줬습니다. 최루가루에 범벅이 된 학생들이 가게로 뛰어들어 오면 셔터를 내리고 물이나 음식을 줬죠. 곤봉을 들고 뛰어오던 경찰들은 닫힌 문 앞에서 발걸음을 돌려야 했습니다.
1980년 ⑤5·18 민주화운동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 광주에 살던 미국인 선교사 찰스 베츠 헌틀리 목사 가족은 위협받는 광주 청년들을 집 다락방에 숨겨줬습니다. 군인들이 검문을 오는 아찔한 상황도 있었지만, 막내딸 제니퍼가 기지를 발휘해 그들을 돌려보내기도 했어요. 헌틀리 목사의 아내 마사는 경향신문에 “다시 그때로 돌아가도 그들을 보호하겠다”고 했어요.
2018년 5월18일 광주 국립 5·18민주묘지에서 열린 ‘제38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5·18의 진실을 해외에 알리기 위해 노력했던 고(故) 찰스 베츠 헌틀리 목사의 부인 마사 헌틀리 여사가 5·18 유가족을 안아주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이런 이야기, 먼 옛날의 일만이 아닙니다. 1970~1980년대 ⑥민주화 운동 수배자들을 보호한 향린교회는 그 이후에도 거처가 필요한 이들의 ‘셸터(Shelter·피난처)’가 돼줬어요. 단속·추방으로부터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을 보호하고, 용산참사 같은 여러 사회적 비극의 현장에 달려가 천막을 치고 사람들을 보호했습니다.
향린교회는 2024년 12·3 불법계엄 이후 거리로 뛰쳐나와 밤을 새운 시민들에게도 문을 열어 줬어요. 3월부터 4월까지, 밤늦게까지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을 촉구한 시민들에게 숙소와 샤워시설을 무상으로 제공한 것이죠. 매일 시민 10~20명이 광화문 근처에 있는 향린교회를 찾아 씻고 잠을 잤습니다.
‘연대(連帶)’란 서로 이어지는(連) 띠(帶)를 뜻합니다. 그 말처럼, 한 번 도움을 받은 사람은 어려움을 겪는 다른 사람을 도와주곤 했습니다. 한국전쟁기 안만근 지서장 덕에 학살을 피한 청년 윤용원씨가 그랬습니다. 그는 마을을 점령한 인민군으로부터 ‘안 지서장의 가족을 체포하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안 지서장의 동생을 몰래 살려줬습니다.
4·19 시위에서 어른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구한 정우화씨도 연대를 되돌려주는 삶을 살았습니다. 꼭 20년 뒤인 1980년 5월 광주에서 시작된 민주화운동이 전남지역으로 확산됐을 때, 목포에서 일하던 정씨는 역 앞에서 매일 열리던 시위에 나가 청년들을 응원했습니다. 지금까지도 촛불집회나 응원봉 집회에 힘을 보태죠.
밤새 진행된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촉구 집회에서 향린교회 ‘쉼터’의 신세를 진 유모씨(26)가 지난 8월13일 서울 종로구 향린교회 앞에서 교회를 바라보고 있다. 조해람 기자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진단이 넘쳐나는 요즘입니다. 이웃과 연대하는 삶보다 각자도생 경쟁에서 승리하는 삶이 더 각광받는 세상에서, 타인을 돕는 일은 손해처럼 여겨지기도 하죠. ‘다 그런 거야’라는 절망과 ‘어쩔 수 없잖아’라는 냉소만 커지는 것처럼 보일 때도 많습니다.
하지만, 정말 다 그런 걸까요? 정말 어쩔 수 없는 걸까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 마음속에는 위기에 처한 사람을 외면하지 않는 측은지심도, 내가 위험해질 줄 알면서도 다른 사람을 구하는 용기도 있거든요. 우리가 원래 아름다운 존재이고 세상은 살만하다는 이상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우리의 포악하고 서늘한 면을 잘 알고 있는 만큼, 타인에게 따뜻한 인지상정을 베풀 줄 아는 본성도 부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고 감히 생각합니다.
자주 흔들리는 우리의 민주주의가 그래도 끝내 쓰러지지 않는 건 그런 인지상정의 마음 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 마음이, 먼 훗날 닥쳐올 위기로부터 우리를 구해줄 수도 있지 않을까요?
“하나를 보더라도 입체적으로” 경향신문 뉴스레터 <점선면>의 슬로건입니다. 독자들이 생각해볼 만한 이슈를 점(사실), 선(맥락), 면(관점)으로 분석해 입체적으로 보여드립니다. 매주 월·수·금요일 오전 7시, 하루 10분 <점선면>을 읽으면서 ‘생각의 근육’을 키워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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