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탄소중립 앞장선다더니…재판선 “기후변화로 경작지 늘었다”는 발전공기업
지난해 8월12일 기후환경단체 관계자들과 농업인들이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내 온실가스 누적 배출 1위 기업인 한전과 발전자회사를 상대로 농업 피해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한다고 밝히고 있다. 정효진 기자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온 상승에 따라 과거에는 재배가 불가능했던 아열대성 작물이나 일부 지역에서만 재배 가능했던 농산물의 경작지가 북상하여 오히려 확대됐다.” “기후변화는 전 지구적으로 생명활동이 시작된 이래 누적된 온실가스 배출의 결과물이다.” “온실가스 자체를 유해배출물이라고 보기는 곤란하다.”
한국전력 등 발전공기업이 기후위기로 피해를 입은 농민들이 기업들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펼친 논리다. 온실가스 감축과 에너지 전환에 앞장서겠다고 공언했던 발전공기업들이 정작 법정에서는 기후변화 피해를 축소하고 온실가스 배출 책임을 회피하는 주장을 펼친 것으로 18일 확인됐다.
국회 기후에너지환경노동위원회 소속 김태선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입수한 한전과 발전5사(한국남동발전·중부발전·서부발전·남부발전·동서발전)의 준비서면을 보면, 이들 기업은 지난 1~7월 광주지방법원에 기후변화를 환경오염이나 환경훼손으로 볼 수 없다는 주장을 제출했다.
한전은 지난 1월 제출한 준비서면에서 “온실가스는 전지구적인 공간에서 수백년 내지 수천년동안 인간활동, 자연활동으로 누적돼 왔다”며 “피고들이 누적 배출한 온실가스양은 지구 온난화를 일으키기에 충분한 양이라고 볼 수 없으며, 지구 자정작용을 통해 완화될 수 있는 수치에 속한다”고 주장했다.
한전과 발전5사가 2011년부터 2023년까지 정부에 보고한 온실가스 누적 배출량은 약 25억6000만t으로, 같은 기간 국내 전체 온실가스 누적 배출량(94억t)의 27%에 해당한다.
발전5사가 지난 7월 제출한 준비서면에서는 기후변화의 긍정적 측면을 강조하며 기후변화가 환경오염이나 환경훼손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논리를 폈다. 이들 기업은 “환경오염이나 환경훼손은 자연환경에 중대한 손상을 주거나 사람의 건강이나 환경에 피해만을 주는 상태인 반면, 기후변화는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온 상승에 따라 과거에는 재배가 불가능했던 아열대성 작물이나 기존 일부 지역에서만 재배 가능했던 농산물의 경작지가 북상하여 오히려 확대되는 생태계 변화의 양면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주장은 발전공기업이 그간 공식적으로 밝혀온 기후위기 관련 입장과도 배치된다. 한전은 지난해 지속가능경영보고서에서 “한국 온실가스 배출량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전환(발전)부문의 역할이 점점 커지고 있다”며 “국내 전력산업 가치사슬 전반을 관리·운영하는 한전의 주도적 역할 수행이 필요하다”고 했다.
정부의 재생에너지 확대 기조나 기업들의 경영 방침과 배치되는 주장도 나왔다. 한전은 “재생에너지 발전은 필연적으로 비교적 지가가 저렴한 산지와 농지에서 이뤄지고, 이 과정에서 자연경관과 산림자원 파괴, 생태계 파괴 등 또 다른 환경적 문제를 야기한다”고 주장했다. 발전5사는 “무리한 재생에너지 전환이야말로 대규모 계통통합비용을 발생시켜 전기 요금 폭등을 초래한다”고 했다.
앞서 정부는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 설비용량을 100GW(기가와트) 확대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고, 한전 역시 탄소중립 이행을 위해 재생에너지 확대와 분산형 전원 활성화를 선도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발전공기업들은 석탄화력발전소 가동에 대한 결정권이 정부에 있다며 온실가스 배출 책임을 부인하기도 했다. 발전5사는 준비서면에서 “전력당국의 지시를 이행하는 법적 의무를 부담할 뿐이며 석탄화력발전소의 가동 여부나 가동 수준을 독자적으로 결정할 권한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발전공기업들의 지난 3~4월 이사회 회의록과 제12차 전력수급기본계획 수립 과정에서 제출한 의향서를 보면, 각사는 석탄화력발전소의 폐지 시점을 늦추거나 운영 기간을 연장하는 방안을 검토한 것으로 확인됐다.
지난해 8월 기후변화로 생업을 지키기 어려워진 농민 6명은 한국전력과 산하 5개 발전공기업을 상대로 기후위기 책임을 묻는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폭염과 가뭄, 폭우 등 이상기후로 발생한 농작물 피해에 대해 기후위기를 부른 기업이 물어내라는 취지다.
한전은 “온실가스 배출은 전지구가 공동 대응해야할 문제로 일반 농축산업 종사자를 포함한 모든 주체가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면서도 “이는 소송의 법률적 쟁점에 관한 대응 논리로 한전 정책 추진 방향과는 다른 문제이며, 한전은 정부의 목표 달성을 위해 재생에너지 확대를 차질 없이 지원해 나가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한국남동발전은 “현재 소송이 진행 중인 사안이라 구체적으로 입장을 밝히기 어렵다”며 “발전 5사는 정부의 탄소중립 및 재생에너지 확대 정책을 성실히 수행하고 있다”고 전했다.
김태선 의원은 “기후위기 대응과 에너지전환의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할 핵심 공기업들이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기후위기를 부인하는 듯한 주장을 펴고 정부와 농민들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것은 매우 부적절하다”며 “온실가스 감축에 대한 책임감 있는 계획을 제출하고, 피해 농민들에 대한 실질적 구제방안을 내놓아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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