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아이로 돌아가 걸은 그 길, 앞으로 삶도 이와 같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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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추를 앞두고 제법 선선해진 저녁 어느 날이었다. ‘이번 여름도 이렇게 지나가는 것인가’ 싶어 슬쩍 서운해질 무렵, 하늘이 마지막 기회라도 주는 듯 이튿날 한낮의 기온이 38도 가까이 치솟았다. 쉽게 지치고 무력해지는 이유를 그저 나이 탓이라고만 여겼다. 그런데 문득 어른이 되고부터 잃어버린 한가지가 떠올랐다. 바로 ‘여름방학’이다. 어릴 때는 학기 중간에 방학이 있어 강제로라도 쉬어야 했다. 그리고 그 시기면 어김없이 가족이나 친구들과 계곡이나 바다를 찾곤 했다.
새삼 시원한 물가에 몸을 담근 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던 어린 시절이 그리워졌다. 태어나고 자란 강원도 인제를 마지막으로 찾은 것은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원대리 인근 추모공원을 찾았던 지난해 가을이었다. 여름방학이 되면 드나들던 시골집에는 이제 아무도 살지 않는다. 문득 이 여름의 끝에서, 여름방학을 맞은 아이가 된 기분으로 어린 시절의 나를 만나러 가고 싶었다. 추억과 향수가 깃든 아침가리계곡의 청명한 물길을 보고 싶어 인제군 현리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강원도 홍천을 지나 아홉사리고개를 넘는 일정은 과거 족히 반나절이 걸리던 길이었다. 하지만 서울양양고속도로가 개통된 뒤로는 1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다. 현리터미널에 내리자마자 발길 닿는 대로 걸었다. 터미널은 이 동네의 중심가이자 번화가였다. 피시방과 노래방, 중국집과 치킨집은 예전 모습 그대로였고, 그 사이로 예전엔 없던 프랜차이즈 카페 몇곳이 눈에 띄었다. 휴가를 나온 군인들의 모습도 여전했다. 변한 듯하면서도 변하지 않은 거리의 풍경 위로 오래전 기억들이 겹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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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린천 수변으로 나아갔다. 인제의 젖줄인 내린천 상류를 바라보니 절로 중학교 시절이 떠올랐다. 1997년 그해 여름은 무척 뜨거웠다. 내린천에 댐을 건설하겠다는 정부의 발표 이후 기린면민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거리로 나와 내린천댐 반대 시위에 나섰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들의 친구들, 친구들의 부모님이 하나가 되어 고향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고 끝내 1998년 1월, 정부는 내린천댐 건설 백지화를 발표했다. 어쩌면 잃어버릴 뻔한 나의 고향. 당시 댐이 건설돼 먼 도시로 떠나고 싶었던 어린 소녀의 순진한 바람을 생각하니 웃음이 났다.

아침가리계곡 트레킹의 출발점인 방동약수로 향했다. 인제를 대표하는 탄산 약수인 방동약수 한바가지 벌컥벌컥 들이켰다. 영혼의 목마름이었을까. 이 물은 특유의 ‘쇠맛’이 난다. 탄산 성분과 함께 철, 망간, 불소 등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예부터 위장병 치유와 소화에 좋다고 알려져서 지금도 전국 각지에서 찾아오는 이가 많은 약수다. 내가 처음 방동약수를 마셨던 30여년 전에도 물이 넉넉했는데 아직도 마르지 않고 솟아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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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동약수를 지나 아스팔트 임도를 걸어 올라가자 초소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백두대간트레일 방동안내소다. 아침가리계곡은 산림 보호를 위해 하루 탐방객을 제한한다. 예약해야만 들어갈 수 있다. 안내소를 지나자 아침가리 숲이 펼쳐졌다. 아침가리란 이름의 어원은 조선 후기 민간 예언서 ‘정감록’에 등장하는 ‘삼둔사가리’(三屯四街里)에 닿는다. 전쟁, 전염병, 흉년 같은 재난을 피해 몸을 숨길 수 있는 10곳의 길지 가운데 하나가 바로 삼둔사가리다.
방태산을 기준으로 삼둔은 남쪽의 살둔·달둔·월둔을, 사가리는 북쪽의 아침가리·적가리·연가리·명지가리를 가리킨다. 아침가리란 이름에는 이 골짜기의 지형이 담겨 있다. 햇볕이 잠시 드는 아침나절에만 밭을 갈 수 있고, 이후에는 산그림자에 가려 금세 어두워지는 첩첩산중이다. 그래서 한자로는 ‘아침 조’(朝) 자와 ‘밭갈 경’(耕) 자를 써 조경동(朝耕洞)이라 부른다. 조경동교까지 내려서면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아침가리계곡을 따라 걷는 계곡 트레킹 길이고, 다른 하나는 백두대간트레일 6구간인 아침가리-광원리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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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동교 입구에는 이곳의 유일한 주민인 약초꾼 사재봉씨가 40년 가까이 운영해온 작은 간이매점이 있다. 그는 이곳에서 홀로 세간살이 하며 길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보급품을 판매한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곳이기에 냉장고도, 에어컨도, 선풍기도 없다. 유일한 냉방 시설은 계곡을 따라 불어오는 바람뿐이다. 30대 때 약초를 캐러 깊은 산중인 아침가리까지 들어갔다가 정착해 지금까지도 살고 있다. 잠시 그의 시간을 생각했다. 수많은 사람이 이곳을 들고 나는 동안에도 같은 자리를 지키면서 그가 만났을 고독과 환희의 시간을 말이다.
두 갈래 길 중 곧게 뻗은 숲길을 뒤로하고 아침가리계곡에 들어섰다. 이곳부터 진동마을회관까지는 약 6㎞. 계곡 입구에서 신발 끈을 바짝 조였다. 낯선 모험을 앞두고 오랜만에 느끼는 설렘이었다. 나의 첫 계곡 트레킹 경험은 산 사진을 찍는 선배들과 함께 떠난 1박2일 양양 법수치계곡 걷기였다. 텐트까지 짊어진 채 숙영지를 찾아 나섰던 그날의 모험이 떠올랐다. 어느덧 10년이 흘러 다시 물길을 따라 걷는 여정에 나섰다.

산길 트레킹과 다른 계곡 트레킹의 매력은 길이 하나가 아니라는 데 있다. 정말이지 내가 가는 길이 곧 길이 된다. 산길을 부지런히 걷다가 길이 희미해지면 물길로 들어선다. 물길이 깊어지면 다시 숲길로 올라선다. 그러다가 숲길이 지루해지면 일부러 물길을 골라 걷는다. 수영에 자신 있는 사람은 깊은 소를 헤엄쳐 건너기도 한다. 비유하자면 네발로 걷는 셈이다. 커다란 바위를 만나면 신나게 물속으로 뛰어들기도 한다. 물론 위험한 구간에서는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수영할 때 입는 래시가드에 방수 배낭을 메는 것이 기본이다. 아예 몸에 튜브를 두르고 출발하는 사람들도 있다. 물이 깊어져도 길을 벗어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복장이다. 이날 튜브에 몸을 맡긴 채 두둥실 떠내려가는 사람들, 흠뻑 젖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물길과 숲길을 자유롭게 오가는 사람들을 유쾌하게 따라갔다. 손에 카메라를 들고 있어 그들처럼 온몸을 계곡 깊숙이 담글 수는 없었지만 다리부터 허리, 가슴까지 천천히 몸을 적시며 흐르듯 걷는 것만으로 충분히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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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은 홍천 광원리에서 조경동교까지 역방향으로 걸었다. 아침가리계곡을 걸으며 어쩔 수 없이 돌아서야 했던 백두대간트레일 6구간, 아침가리-광원리 길이 못내 궁금했다. 물길에 버금갈 만큼 신비로운 숲길을 끝까지 걷고 싶었다. 아침가리는 워낙 외진 곳이다. 언제 다시 이 깊은 골짜기까지 들어올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었다. 분명 눈 깜짝할 사이에 10년, 20년이 거짓말처럼 흘러갈 것이다. 사람 그림자 하나 없는 길을 홀로 걸었다.



한국전쟁을 전후해 한때 피난민들이 화전을 일구며 살아갔던 아침가리는 1960~70년대 화전정리사업과 산림녹화정책이 본격화되면서 지금의 숲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숲에 다시 사람들을 부르기 위해 백두대간트레일이라는 길이 이어졌다. 갈수기에만 모습을 드러낸다는 명물인 명지가리약수를 사이다처럼 벌컥벌컥 들이켰다. 건강하게 잘 살고 싶다. 그래야 이렇게 좋은 길도 실컷 걷고 아름다운 것도 원 없이 볼 수 있을 테니까. 한때 아이들이 웃고 떠들며 드나들었을 옛 방동초등학교 조경분교를 지나 조경동교로 돌아왔다.

삶도 이렇게 물 흐르듯 유유히 살아갈 수 있기를. 아침가리계곡을 걸으며 나는 나에게 거듭 말했다. 해맑은 어린아이로 돌아가 용감하고 호방하게 물길을 걸었던 것처럼, 앞으로의 삶도 스스럼없이 가뿐하게 헤쳐나갈 수 있기를. 물길이 깊은 곳에서는 두려워하지 말고 안전한 숲길로 잠시 비켜 걷고, 숲길이 벅차고 힘든 순간이 오면 다시 시원한 물길을 찾아 쉬어 갈 수 있기를. 올해 마지막 여름의 길이 나에게 남긴 교훈은 그렇게 단순하면서도 다정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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