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발적 범행’ 참작하고 재범 위험 높아도 전자발찌 기각…법원은 관계성 폭력 위험성 제대로 보나
서울 서초구 대법원. 한수빈 기자
서울 송파구 장모 살인·아내 납치와 제주 스토킹 살인 등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강력범죄가 잇따르면서 사법부 판결을 둘러싼 비판이 나온다. 반복적인 폭력에도 범행의 우발성을 유리한 양형 사유로 고려하거나, 재범 위험성을 인정하면서도 전자장치(전자발찌) 부착 명령을 기각하는 사례들이 이어지고 있다. 법원 판결이 관계성 폭력의 특수성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18일 경향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서울고법 형사2-2부(재판장 황승태)는 지난 15일 아내에게 가연성 물질을 뿌리고 불을 붙여 살해한 70대 남성 최모씨에게 징역 16년을 선고한 원심을 유지했다. 최씨는 과거에도 아내를 폭행해 가정법원에 송치된 전력이 있었다. 재판부는 “피고인은 119에 신고하지 않고 2시간가량 피해자를 방치했다”면서도 최씨가 만취 상태에서 다소 우발적으로 범행을 저질렀고, 만 75세의 고령이라는 점을 유리한 양형 사유로 반영했다.
최씨는 앞서 재범 위험성 평가에서 총점 13점으로 재범 위험성이 ‘높음’ 수준이 나왔지만, 1·2심 모두 검사의 전자장치 부착명령 청구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형 집행이 종료되는 시점에 최씨 나이가 만 90세로 고령이고, 그가 아내 외 다른 사람에게 폭력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거나 살인범죄를 저지를 위험성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판단에서다.
지난 7월 서울고법에서 선고된 딸 살인미수 사건에서도 비슷한 판단이 나왔다. 오랜 기간 아내와 딸을 폭행한 A씨는 경찰의 ‘가정폭력 재발 우려 가정’으로 관리되던 중 딸에게 둔기를 휘둘렀다. 이에 법원은 다시 살인을 저지를 상당한 개연성이 있다고 보고 징역 5년을 선고했다. 그러면서도 보호관찰과 접근금지만으로 재범 위험을 상당히 낮출 수 있다며 전자장치 부착명령 청구는 기각했다. 재범 위험성을 인정하면서도 향후 피해자 보호수단은 제한적으로 선택한 것이다.
2019년 아내를 살해하려 했던 한 남성은 징역형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는데, 집행유예 기간인 2022년 아내를 다시 흉기로 찌르는 일도 있었다. 그제야 법원은 징역 6년의 실형을 선고하고, ‘아내를 상대로 한 살인 습벽’을 뒤늦게 인정했다.
범행 이전 피해자를 보호할 법적 장치도 법원에서 번번이 기각되고 있다. 스토킹처벌법은 접근·연락금지뿐 아니라 위치추적 전자장치 부착, 유치장·구치소 유치 등을 잠정조치로 허용하고 있다. 손솔 진보당 의원이 법무부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경찰이 신청한 스토킹 잠정조치 중 법원이 기각한 건수는 2022년 436건에서 지난해 1021건으로 대폭 늘었다. 올해는 9월까지만 1047건이 기각됐다. 검사 청구 대비 기각률도 같은 기간 5.8%에서 7.7%로 상승했다.
앞서 대법원은 2023년 기존 접근금지 조치가 끝났더라도 새로운 범죄가 발생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재범 우려를 근거로 다시 잠정조치를 명령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하급심에서는 이런 판례가 작동하지 않은 사례도 있다. 피해자 보호가 시급한 상황에서 법원의 판단 오류나 절차 지연이 보호 공백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뜻이다.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폭력은 한차례의 범행으로 끝나지 않고 반복되거나 더 심각한 범죄로 이어지는 특성이 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일상생활과 인간관계를 공유하는 만큼 폭행과 협박이 되풀이되기 쉽고, 피해자가 관계를 끊으려 할 때 스토킹이나 보복 범죄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 때문에 개별 범행만 떼어 ‘우발적’이라고 판단하거나 당장의 위험성이 낮다고 보면 누적된 폭력의 양상과 향후 강력범죄로 이어질 가능성을 놓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강소영 건국대 교수가 지난해 교제폭력 판결문 152건을 분석한 연구를 보면 가해자의 60.5%가 전과자였고, 사건의 53.3%가 이별 통보 직후나 관계종료 시점에 발생했다.
해외에서는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한 폭력의 특수성을 양형에 적극 반영하고 있다. 영국 양형위원회의 경우 가정폭력이 친밀한 관계의 신뢰와 안전을 침해한다는 점에서 범죄를 더욱 중대하게 평가해야 한다고 지침에 명시하고 있다. 특히 피해자가 처벌에 협조하지 않는다고 범죄의 심각성을 낮게 판단해서도 안 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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