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격재결정명령과 그 이후의 시장 [BKL 공정거래리포트]

담합 제재를 둘러싼 논의가 사업매각, 등록취소 같은 구조적 조치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에 앞서 공정거래위원회는 가격재결정명령을 다시 활용하기 시작했다. 올해 인쇄용지, 밀가루, 전분당 담합 사건에서 잇따라 부과된 이 명령은 담합에 참여한 사업자들이 담합 전 경쟁을 회복하는 수준으로 가격을 다시 정하고, 그 가격과 근거를 공정위와 협의를 거쳐 보고하도록 한다.
2006년 밀가루 담합 사건에서 비슷한 명령이 내려진 적은 있지만, 한 해에 여러 산업에서 잇따라 부과된 것은 이례적이다. 최근에는 이 명령의 근거를 공정거래법에 명시하려는 입법도 추진되고 있다.
담합이 끝난 뒤에도 그 영향이 가격에 남을 수 있다는 점에서 적극적인 시정조치의 필요성은 이해할 수 있다. 공정위도 이 명령이 반드시 가격 인하를 목표로 하는 것은 아니라고 밝히고 있다. 원재료 가격과 환율 등을 반영해 움직이는 경쟁가격을 되찾는 데 취지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격을 얼마나 내렸느냐가 아니라, 명령 이후 가격이 경쟁적으로 움직이느냐를 살펴야 할 것이다. 가격을 다시 정하는 것과 시장에서 가격경쟁이 다시 작동하는 것은 다를 수 있다.
재결정 이후의 가격 조정
인쇄용지 사건을 보면 이 점이 분명해진다. 국내 인쇄용지 가격은 기준가격에 거래처별 할인율을 적용하는 이원화된 체계로 정해진다. 기준가격은 2년 정도마다 제한적으로 바뀌지만 할인율은 수시로 조정된다. 의결서에 따르면 제지사들은 2021년부터 2024년까지 일곱 차례에 걸쳐 할인율을 줄이거나 기준가격을 올리는 방식으로 가격을 인상했다. 공정위는 심의일 현재 기준가격은 그대로 둔 채 할인율만 조정해 왔으므로 담합의 영향이 남아 있을 여지가 있다고 봤다.
이런 구조에서는 어느 숫자를 보느냐에 따라 결론이 달라진다. 공정위가 살펴본 한 단가계약에서는 재계약 때 적용된 할인율 차이가 0.5%p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사이 기준가격이 올라 실제 판매가격은 약 24% 높아졌다. 할인율만으로는 가격 변동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고, 실제 거래가격을 함께 살펴야 하는 이유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재결정 이후다. 공정위의 명령에 따라 정해진 가격은 시장에서 하나의 기준선처럼 받아들여지기 쉽다. 이후 가격을 올리면 담합 가격으로 되돌아가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받을 수 있다. 정당한 인상 사유가 있어도 결정을 미룰 수 있다. 인쇄용지 사건에서는 가격재결정명령 외에도 3년간 반기마다 가격 변경의 시기와 폭, 사유를 보고하도록 하고 있다. 공정위는 이를 사업자들이 독자적으로 가격을 바꾸는지 파악하기 위한 보조 수단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운용 방식에 따라서는 가격을 움직이지 않는 편이 안전하다는 신호로 읽힐 수도 있다.
원료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는 산업에서는 이 부담이 더 크다. 원자재 가격이나 환율이 올랐는데 판매가격을 제때 조정하기 어렵다면, 사업자는 공급 물량이나 거래조건을 바꾸는 방식으로 대응할 수 있다. 가격은 안정된 것처럼 보여도 실제 거래조건은 나빠질 수 있는 것이다. 인상에 대한 부담은 인하에도 영향을 준다. 한번 내린 가격을 다시 올리기 어렵다면 원가가 떨어져도 인하를 미룰 수 있다. 원가 상승은 빨리, 하락은 늦게 반영하는 행태를 바로잡으려던 명령이 또 다른 경직성을 낳을 수 있다.
여러 사업자가 같은 시점에 같은 명령에 따라 가격을 다시 정한다는 점도 생각해 볼 문제다. 각 사업자는 자신의 원가와 수요뿐 아니라 공정위가 어느 정도의 조정을 받아들일지도 의식하게 된다. 원가 구조가 비슷한 사업자들이 비슷한 가격에 이르는 것 자체는 자연스러운 경쟁의 결과일 수 있다. 문제는 이행기준이 분명하지 않을수록 각자의 원가보다 경쟁사의 가격이나 당국이 수용할 것으로 예상되는 수준을 먼저 살피게 된다는 점이다.
이행기준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면 해결될 문제처럼 보이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원재료 지수나 환율을 반영한 산식이 제시되면 모든 사업자가 같은 숫자에서 출발할 수 있다. 기준이 모호하면 서로의 가격을, 구체적이면 같은 산식을 바라보게 되는 셈이다. 어느 경우든 독립적 가격결정이라는 명령의 취지와는 거리가 생길 수 있다.
인하 폭보다 움직이는 방식을 봐야
경쟁이 회복됐는지는 가격의 수준보다 가격이 움직이는 방식에서 드러난다. 원가가 오를 때와 내릴 때 가격이 얼마나 크게, 또 얼마나 빨리 따라가는지를 봐야 한다. 원재료 가격과 환율, 운임은 해마다 크게 오르내리고, 그 변화가 판매가격에 반영되기까지는 시차가 있다. 따라서 특정 시점의 가격 움직임만으로 결론을 내리기보다는, 이러한 시차를 감안해 판단할 필요가 있다.
시장 구조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상위 사업자들의 점유율이 매우 높은 과점 시장에서는 거래처가 공급자를 바꿀 여지가 크지 않다. 점유율 변화만으로 경쟁 회복을 판단하기 어려운 것은 이 때문이다. 결국 판단의 중심은 각 사업자의 실제 거래가격이 자신의 원가와 거래조건에 따라 따로 움직이는지가 돼야 한다.
반기별 보고도 이런 관점에서 활용할 수 있다. 보고된 가격 변경 내역을 원가 지표와 나란히 놓으면 가격이 원가를 따라 오르내리는지 확인할 수 있다. 보고는 가격을 묶어 두는 수단이 아니라 가격이 움직이고 있음을 보여주는 수단으로 쓰여야 한다. 그러려면 재결정 이후 원재료 가격이나 환율 변동을 합리적으로 반영한 가격 변경이 명령 위반이나 담합 재개로 의심받지 않아야 한다. 가격을 올렸다는 사실이 곧 설명이 필요한 일로 여겨진다면, 보고는 가격 변경을 억제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입법으로 근거가 분명해지면 이 명령은 더 자주 쓰일 수 있다. 그럴수록 명령이 만든 가격보다 명령 이후의 시장을 봐야 한다. 경쟁은 사업자들이 각자의 판단으로 가격을 바꿀 수 있을 때 비로소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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