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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November 6, 2026

대추 한 알 먹으며 우주와 통하다 [.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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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추 한 알 l 장석주 시, 유리 그림, 이야기꽃(2015)
대추 한 알 l 장석주 시, 유리 그림, 이야기꽃(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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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의 대상을 언어로만 한정 짓지 않는다면, 시를 그림으로 번역한 책이라는 소개가 적절하겠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널리 알려진 장석주 시인의 ‘대추 한 알’에 유리 작가가 그림을 붙였다. 텍스트가 이미지화되면 상상의 너른 영토는 단숨에 분명한 경계를 얻어 좁아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선명한 이미지가 텍스트를 받쳐 들 때, 감동이 배가 되거나 새로운 것이 보이는 경우도 있다. 유리 작가는 이 시를 그림책으로 만들기 위해 대추나무 곁에서 1년 넘게 사진만 3000여장을 찍으며 눈에 담고 또 담았다고 한다. 정말 성실한 번역가다. 덕분에 오랜만에 어린 시절 집 마당에 있던 대추나무를 떠올렸다. 붉은 대추를 옷자락에 쓱쓱 닦아 베어 물 때 느껴지던 아삭함과 달콤함도. 대추처럼 기분 좋은 단맛은 세상에 꽤 드물다.

책의 앞면지에는 봄이, 뒷면지에는 겨울이 들었다. 그러니 그사이 본문에 시간의 흐름과 계절의 순환이 오롯이 담겼다. 시만 읽었을 때는 대추가 견디며 품은 것을 헤아리는 일에 온 마음이 갔다. 저 작은 것도 온갖 시련을 거쳐 저리 붉어졌겠구나, 대추 한 알에 우주가 담겨 있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그림책을 보니까 크고 작음이란 인간의 편견이겠구나 하는 깨달음이 생겼고, 대추가 품은 것뿐 아니라 대추를 품어 준 것에도 눈길이 갔다. 대추 혼자 견딘 줄 알았는데, 대추가 견디게끔 해 준 것들이 비로소 보였다. 생각의 각도가 좁으면 상상력의 영토도 그리 무한하지 않음을 새삼 깨달았다.

대추들이 태풍과 벼락, 무서리와 땡볕을 견디는 동안 그 온갖 시련 속에 대추를 꽉 붙들고 있던 대추나무가 있었다. 그 곁에서 물길을 내고 쓰러진 벼를 일으키는 농부의 손길도 있었다. 그렇게 어둠 속에서도 놓지 않는 손이 있었고, 비바람이 할퀴고 간 처참한 들판에서 상처를 어루만지는 마음이 있었다. 특히 마지막에 만질만질한 붉은 대추 한 알을 쥔 농부의 손이 클로즈업되는 부분은 마음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킨다. 멍든 손톱 아래 낀 흙, 마디가 굵은 거친 손. 윤이 나는 모든 것 뒤에는 그 반짝임을 만들어 내는 주름진 손이 있는 것이다. 여기저기 꺾이고 패인 엄마 대추나무와 농부의 상처투성이 손이 참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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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 시인은 대추 한 알 속 우주를 보여주며 대추가 그렇게 ‘세상과 통하였다’고 했다. 함민복 시인은 사과를 먹으면 사과꽃에 눈부시던 햇살, 사과나무집 딸이 바라보던 하늘, 사과나무를 붙잡은 지구의 중력, 사과나무가 존재할 수 있게 한 우주를 먹는 것이라고 했다. 사과와 우리는 서로를 먹는다고도 했다. 대추 한 알, 사과 한 알을 먹는 계절에 우리도 이렇게 우주와 통한다.

저무는 계절에 자꾸 스러져 가는 것들을 지켜보다가, 책 속 대추 한 알이 빨갛게 잘 여문 것을 보고 있으니 그냥 좋았다. 세상의 모든 생명이 기특해졌다. 다들 잘 견디고 여기까지 왔구나. 뾰족한 마음으로 내가 견딘 것만 보지 말고, 나를 견디게 해 준 것을 보아야겠다고도 생각했다. 조금은 둥글게. 우리도 저절로 익어가고 저절로 둥글어질 리 없는 대추 한 알이니까. 나도 쓴 세상에 기분 좋은 단맛을 낼 수 있는 기특한 대추가 되고 싶다. 거, 상상력은 빈곤한데 꿈은 참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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