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Jerusalem Post'They sent missiles, we sent a bill': Bat Yam mayor serves Iranian diplomat with NIS 250m. lawsuitPunchBEDC raises staff salariesInquirerErwin Tulfo seeks safeguards for workers displaced by AISky TG24Ecuador, migliaia in piazza contro il governo di NoboaBollywood HungamaHrithik Roshan attends LACMA Art + Film Gala 2026, becomes first mainstream Indian actor to grace eventZDF heuteEntdecken Sie das ZDF-NachrichtenstudioWirtualna PolskaPo zamachu w Krakowie. Kto biegł na pomoc, a kto po zasięgi [OPINIA]BBC NewsWalsh-inspired Australia crush irate Samoa to reach World Cup finalStraits Times SportSingapore runner Shaun Goh lowers 10,000m mark for his seventh national record of 20267sur7“C’est un co*****”: un enfant de 8 ans insulte Macron en direct, franceinfo réagitالشرقسامر المصري لـ"الشرق": "أبو جانتي" نضج.. والجزء الثالث مغامرة محسوبةEl Comercio“Stephen Miller encabeza la estrategia de Trump para gobernar sin el Congreso”
The Daily Newsstand · Free, Always
Sunday, November 8, 2026

[아침을 열며]조슈아 웡의 일곱 번째 겨울

Translate

한국의 민주화 시위는 다른 나라의 광장에서 교본이다. 2019년 송환법 반대 시위가 한창이던 홍콩에서 영화 <택시운전사>와 <1987>은 교과서였다. 집회 참가자들은 ‘임을 위한 행진곡’을 번역해 불렀다. 2년 뒤 군부 쿠데타에 맞서 거리로 나온 미얀마 시민들도 <택시운전사>를 돌려봤다. 한국이 수십년에 걸쳐 겪은 일들은 국경 너머에서 희망의 근거가 됐다.

그해 홍콩에서 취재하면서 한국에서 왔다는 이유만으로 과분한 환대를 받았다. 최루탄이 터지면 안약을, 경찰이 음향대포를 틀면 귀마개를 건넸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야기가 한국으로 전해지기를 바랐다.

홍콩이공대가 봉쇄됐던 11월 캠퍼스에서 만난 한 청년은 한국은 시민의 힘으로 민주주의를 이뤄내지 않았느냐며 부럽다고 말했다. 눈빛에는 부러움을 넘어선 간절함이 있었다. 그는 주권이 없는 홍콩에서는 불가능할 것 같다면서도 현장을 떠나지는 않았다.

그 무렵 조슈아 웡을 여러 차례 인터뷰했다. 웡은 2011년 열네 살 나이에 학생운동 조직 학민사조를 만들었다. 이듬해 학민사조는 중국식 국민교육 도입에 반대하며 10만명 넘는 시민을 거리로 불러냈고 홍콩 당국은 계획을 접어야만 했다. 2014년 행정장관 직선제를 요구한 ‘우산혁명’을 거치며 그는 홍콩 민주화운동의 얼굴이 됐다. 2016년에는 네이선 로, 아그네스 초우 등과 정당 데모시스토를 세웠다.

2019년 6월 인터뷰에서 웡은 한국의 촛불집회에 큰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한국인들이 평화로운 촛불집회로 정권을 바꾸는 것을 보았다면서 “한국이 매주 토요일 광화문에서 촛불을 들고 모였던 것처럼, 홍콩인들도 매주 일요일 행동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이듬해 6월 홍콩보안법 시행을 앞두고 다시 인터뷰를 청했다. e메일로 질문을 보내자 광둥어로 녹음한 음성파일이 돌아왔다. 이전 인터뷰에선 중국 보통화를 썼던 그였지만, 이번엔 언어로도 메시지를 전하려는 듯했다. 그는 한국의 민주화 달력을 잘 알고 있었다. 웡은 “10일은 한국의 1987년 6월 민주항쟁 기념일이다. 한국이 1987년에 겪은 정권의 압제와 한국인들의 투쟁을 보면서 홍콩인들은 많은 것을 배웠고 큰 울림을 받았다”고 말했다. 당시 그는 홍콩보안법이 시행되면 자신이 가장 먼저 탄압 대상이 되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마지막 인터뷰에서 그는 한국에 부탁했다. 인권변호사 출신인 문재인 당시 대통령이라면 누구보다 인권과 민주주의를 잘 이해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국 대통령과 정부, 국회가 홍콩보안법에 반대한다는 뜻을 분명히 밝힌다면 홍콩의 고도 자치를 보장하는 일국양제가 무너지는 일은 없으리라 믿는다고 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

그 뒤의 일은 알려진 대로다. 네이선 로는 런던으로 떠났다. 아그네스 초우는 캐나다로 건너간 뒤 돌아가지 않았다. 웡은 홍콩에 남았고 2020년 11월 불법집회 혐의로 수감된 뒤 감옥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민주파 예비선거를 조직한 혐의로 징역 4년8개월이 더해졌지만 그래도 내년 초면 출소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난 5일 홍콩 고등법원은 외국 세력과 결탁해 국가안보를 위협한 혐의로 징역 10년을 추가로 선고했다. 감형되지 않는다면 마흔 살이 되는 2036년에야 감옥 문을 나선다. 스물네 살에 들어간 감옥이다.

선고에 맞춰 영국 가디언은 그가 지인들에게 보낸 옥중 편지를 전했다. 억울하다는 말은 없었다. 가장 걱정한 것은 신념의 대가를 치른 수많은 이들이 세상에서 잊히는 일, 사람들이 홍콩을 잊는 일이었다.

홍콩 청년이 부러워한 한국의 민주주의도 우리 힘만으로 이룬 것은 아니었다. 1980년 5월 고립된 광주의 참상은 바깥세상에 알려지면서 비로소 역사가 됐다. 1987년 6월 거리에 선 시민들 뒤에도 지켜보는 세계의 눈이 있었다. 이것이 웡이 감옥에서 형량보다 망각을 두려워한 까닭일 것이다.

이제 웡이 감옥에서 맞는 일곱 번째 겨울이 다가온다. 민주주의가 희미해진 홍콩의 거리에도 일곱 번째 겨울이 오고 있다.

View the original on 경향신문 →

KioskNews shows a cleaned-up reading view extracted from the publisher’s page — the original always lives on their site, not ou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