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경영지원본부 칼럼] 처벌의 강도보다 신뢰의 깊이

2026년 2월 10일, 법원은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첫날 발생한 ‘1호 사고’의 그룹 회장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2022년 1월 양주 채석장에서 토사가 무너져 노동자 3명이 숨진 사고다. 재판부는 회장이 법상 ‘경영책임자’로서 의무를 이행할 지위에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고, 당시 대표이사도 무죄를 받았다. 반면 사업소장과 현장 관계자들은 징역·금고형의 집행유예를, 법인은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으로 벌금 1억 원을 선고받았다. 검찰이 항소해 다툼은 이어지지만, 경영 책임을 묻겠다던 법의 첫 판결에서도 처벌의 무게는 결국 현장 가까이로 내려왔다.
같은 해 10월 1일, 국회는 처벌을 한층 강화한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1년간 3명 이상이 숨진 사업장에 영업이익의 5% 이내 과징금을 물리고, 영업정지가 반복되면 등록 말소까지 요청할 수 있게 했다. 처벌의 그물은 더 촘촘해지고 있다. 그러나 처벌이 강해질수록 사고가 줄어드는가라는 질문에는 여전히 답이 필요하다.
처벌이 만드는 침묵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누구보다 먼저 위험을 감지한다. 설비의 미세한 이상, 인력 부족으로 인한 무리한 작업, 매뉴얼과 현실의 괴리는 대부분 사고 이전에 이미 존재한다. 문제는 그것이 공식적으로 보고되느냐, 개인의 부담으로 묻히느냐다. 다칠 뻔했지만 다치지 않은 아차사고는 다가올 사고를 미리 알려주는 가장 값싼 정보다. 이런 정보가 위로 올라오지 않는 조직에서 경영진이 보는 안전 지표는 언제나 평온하다.
징계 중심 문화에서는 보고 자체가 위험이 된다. 보고하면 조사가 시작되고, 그 과정에서 개인의 과실이 확대 해석될 가능성이 커진다. 현장은 위험을 드러내기보다 조용히 넘기는 편이 합리적이라고 학습한다. 산업재해조사표 미제출로 적발되는 건수는 한 해 700~800건에 이르고, 산재를 건강보험으로 처리했다가 건강보험공단에 적발된 건수는 2020년부터 2025년 6월까지 23만 6천여 건이다. 드러나지 않은 위험은 통계에도, 개선 계획에도 잡히지 않는다.
규정 준수와 실제 안전의 간극
사고 조사 보고서에는 늘 “작업 절차 미준수”, “안전수칙 위반”이라는 문장이 등장한다. 그러나 왜 절차가 지켜지지 않았는지는 좀처럼 묻지 않는다. 현장의 절차 미준수는 개인의 태만보다 제한된 인력, 촉박한 일정, 실적 중심 평가 같은 구조적 압박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조직은 규정과 체크리스트를 더하지만, 서류상 안전이 강화될 뿐 현장의 위험은 그대로 남는다.
책임과 비난도 구분해야 한다. 책임은 역할과 구조에 대한 것이고, 비난은 개인에 대한 판단이다. 사고 후 당사자를 조직에서 분리해 사안을 마무리해도, 후임자가 같은 조건에서 일한다면 사고의 조건은 그대로다. 책임 있는 조직은 이렇게 묻는다. “이 사람이 아니었다면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까?” 누가 일해도 사고가 날 조건이었다면, 바꿔야 할 것은 사람이 아니라 조건이다.
처벌은 학습을 막는다
안전의 핵심은 학습이다. 작은 실패에서 무엇이 잘못됐는지 공유하고 시스템을 고치는 과정이 반복돼야 사고가 줄어든다. 그러나 사고 원인을 개인의 과실로 환원할수록 조직은 더 많은 정보를 잃는다. 관리 체계, 의사결정 구조, 인력 배치, 성과 평가 방식 같은 진짜 원인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다. 그래서 사고 이후 조직이 던져야 할 첫 질문은 “누구를 처벌할 것인가”가 아니라 “왜 이 위험이 여기까지 방치됐는가”여야 한다. 불편한 질문이지만, 이를 피한 채 처벌만 강화하는 것은 문제를 다음 사고로 미루는 일에 불과하다.
개정법에 담긴 또 하나의 축
주목할 점은 이번 개정안에 처벌만 담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노동자의 작업중지 요건이 ‘급박한 위험’에서 ‘위험이 우려되는 경우’로 넓어졌고, 하청 노동자도 원청에 직접 작업중지를 요구할 수 있게 됐다. 법 위반 신고포상금과 노사가 함께하는 안전한일터위원회도 신설된다. 위험을 말할 수 있는 통로를 제도로 만든 것이다. 다만 제도가 곧 문화가 되는 것은 아니다. 지금도 급박한 위험이 있으면 작업을 멈출 권리가 법에 있지만, 현장에서 실제로 행사되는 경우는 드물다는 지적이 많았다. 작업을 멈춘 대가를 누가 치르는지 노동자들이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요건이 넓어진 만큼, 멈춤을 요청한 사람을 보호하는 장치가 함께 작동해야 한다.
올해 상반기 재해조사 대상 사고사망자는 253명으로 2022년 통계 작성 이후 가장 적었다. 반가운 숫자지만, 같은 기간 50인 이상 제조업 사망자는 대형 화재·폭발 사고로 28명에서 57명으로 늘었다. 줄어든 숫자가 실질적 안전의 결과인지 가려내려면, 현장의 목소리가 통계보다 먼저 올라와야 한다.
강한 신뢰가 강한 처벌보다 중요하다
과징금이 시행되면 기업은 사망사고를 막기 위해 더 많은 자원을 쓸 것이다. 그러나 그 자원이 보고 체계를 단단히 하는 데 쓰일지, 사고를 축소하는 데 쓰일지는 조직 문화가 결정한다. 작업중지를 요청한 노동자가 불이익 대신 감사를 받고, 아차사고를 보고한 팀이 질책 대신 개선 예산을 받는 경험이 쌓일 때 새 제도는 비로소 작동한다. 경영책임자가 점검해야 할 것도 처벌 대비 서류가 아니라, 지난 1년간 현장에서 올라온 위험 보고가 몇 건이었고 그중 몇 건이 실제 개선으로 이어졌는가다. 보고가 없다는 것은 위험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말하지 않는 편이 낫다는 신호일 수 있다.
처벌은 사고 이후를 다루지만, 신뢰는 사고 이전을 바꾼다. 처벌의 강도를 높이는 만큼 신뢰의 깊이를 더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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