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트드라마 흥행이 의미하는 것 [세계의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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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보이 지제크 | 슬로베니아 류블랴나대·경희대 ES 교수
피곤함을 달래려 인터넷을 돌아다니다가 10분 정도 길이의 이른바 ‘선행 영상’(Kindness Videos) 장르의 영상들을 보았다. ‘빵을 가져간 가정부를 해고하고 그녀의 집까지 따라갔다가 눈물을 터뜨리는 백만장자’와 같은 뻔한 제목을 달고 있는 이 영상들에서 가난한 사람은 뜻밖의 보상을 받고, 부유한 사람은 사회적 약자의 고통을 발견하며, 희생적 행동은 감동적인 화해로 이어진다. 고백하자면 닳고 닳은 냉소주의자인 나조차 이 영상들을 보며 깊은 정서적 만족감을 느꼈다. 하지만 이런 것이야말로 가장 순수한 형태의 이데올로기일 것이다. 영상 속에서 그 효력이 잠시 중단되었을 뿐 착취, 이윤 추구, 일상의 폭력은 그대로 남아 있고, 개인들이 마음과 마음으로 소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의 특권적 지위와 비특권적 지위는 각각 고스란히 유지된다. 이런 영상들은 감상적 효과를 통해 이 사회의 위계적 구조를 무시하거나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강제함으로써 우리를 바보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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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쇼트폼이라는 형태다. 짧은 형식은 천천히 주의 깊게 세부를 살필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책의 핵심 내용을 전달하는 도서 요약 서비스도 마찬가지다. ‘블링키스트’를 비롯한 책 요약 서비스들은 하루 15분만 시간을 내면 1년에 책 100권을 읽게 해준다고 약속한다. 문제는 이러한 요약이 책을 책답게 만드는 섬세한 결을 지워버린다는 점이다. 저자가 미처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자신도 모르게 더 많은 것을 드러내고 마는 대목, 또는 누구나 아는 평범한 생각을 그 책만의 독특한 시각으로 바꿔 놓는 작은 세부 같은 것 말이다. 텍스트에는 직접 쓰여 있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의미가 있다. 저자가 끝내 말하지 않고 비워 둔 자리나 저자가 애써 부인하고 밀어낸 생각처럼 빈자리의 모양으로만 남아 있는 의미다. 요약은 쓰여 있는 내용을 줄이는 작업이기 때문에 쓰이지 않은 방식으로 존재하는 의미는 애초에 담아내지 못한다. 헤겔의 ‘법철학’을 예로 들어보자. 헤겔은 생명이 위협받는 개인은 타인의 소유에 맞서 자비가 아닌 권리로서 ‘긴급권’을 주장할 수 있다고 썼다. 이 권리를 한 계급 전체가 다른 계급의 소유에 맞서는 행위로까지 보편화할 수 있을까? 헤겔은 이에 대해 명시적으로 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빈곤을 설명하며 한 계급이 다른 계급에 가하는 부당한 행위라고 쓴 부분을 긴급권에 대한 설명과 겹쳐 읽을 때, 우리는 긴급권을 통해 계급투쟁을 정당화하는 헤겔과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닐까? 15분짜리 요약본은 이런 결정적인 함의를 필연적으로 놓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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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긴 작품을 요약하는 것을 넘어, 이제는 처음부터 작품 자체를 짧게 만들기도 한다. 쇼트드라마가 그것이다. ‘마이크로 드라마’, 또는 스마트폰 화면에 최적화되어 ‘세로형 드라마’라고도 불리는 이 시리즈는 한 회당 1~2분씩 20~100편으로 구성되며, 쇼트드라마 플랫폼에서 회차별로 결제하며 조금씩 소비하는 방식에 맞춰져 있다. 쇼트드라마가 겨냥하는 소비자는 차분히 앉아 영화 한 편을 볼 시간을 낼 수 없는 사람들, 즉 휴식과 소비를 위한 제대로 된 시간을 갖지 못하고, 삶 자체가 영구적인 동원 상태에 놓인 사람들이다. 쇼트드라마는 배달, 차량호출플랫폼 운전, 돌봄 노동, 줄 서기, 식사, 화장실 이용 사이의 틈새 시간을 파고든다. 쇼트드라마 시장이 점점 커지는 현상은 정규직의 부재가 불안정 노동자들의 영구적인 노동으로 보충되고, 원할 때 일할 수 있다는 이른바 자유가 살아남기 위해 점점 더 많이 일해야 한다는 압박으로 바뀌는 이 사회의 역설을 반영한다. 이제 우리는 짧고 멍청한 멜로드라마 영상들을 보면서, 자기 삶의 무의미함을 마주하며 보낼 수 있었던 짧은 고독의 순간들마저 박탈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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