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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October 16, 2026

‘1호 친일파’ 박흥식 저택을 찾아 몰래 건넨 쪽지 [금자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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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민특위의 박흥식 체포와 이와 관련한 이승만의 입장 표명을 보도한 조선일보 1949년 1월11일자.
반민특위의 박흥식 체포와 이와 관련한 이승만의 입장 표명을 보도한 조선일보 1949년 1월1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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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 국가권력에 의해 ‘프락치’로 몰려 구원받지 못한 채 북으로 간 국회의원들. ‘금자’는 소녀 금자의 시선을 따라 70년이 훌쩍 넘은 그 시간 속으로 여행을 떠난다. 대한민국 친위쿠데타와 내란의 기원을 마주한다. 월화수목금 연재.

“박흥식씨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궁금해하셨어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 집을 찾아갔지요.”

금자가 아버지 강욱중 의원의 심부름으로 ‘화신백화점 사장’ 박흥식에게 서신을 전달하러 간 것은 1950년 8월 말의 일이었다고 한다. 서울은 인민군 치하였다. 국회프락치 사건으로 1심에서 6년형을 받은 강욱중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 인민군에 의해 서대문형무소에서 풀려나온 뒤 명동 집의 지하실에 은거하고 있었다. 어느날 아버지는 금자에게 작게 접힌 종이를 손에 쥐여주며 “박흥식 선생한테 잘 전달하고 오라”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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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첫 만남에서 여사님은 아버지의 젊은 시절에 대해 질문을 하자 “자세히는 모르지만, 일본에서 박흥식과 같은 학교에 다닌 거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국전쟁 기간에 박흥식의 집에 간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비밀스레 그 집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쪽지를 전달했다는 거였다. 처음 본 저택의 풍경과 규모에 놀랐다는 말도 덧붙였다.

“을지로1가 인근에 집이 있었어요. 아버지가 아무도 눈에 안 띄게 가라고 했어요. 똑같은 한옥이 골목 양쪽으로 즐비했어요. 그런데 첫 번째 골목 막다른 집이라고 하셨어요. 그렇게 큰 집은 처음 봤어요. 넓은 마당에 감나무가 많이 심겨 있어 놀랐어요. 하얀 모시 적삼을 입으신 분이 마당을 쓸고 있다가 누구냐고 물었지요. 아버지 이야기를 하고 쪽지를 전해주었어요. 그리고 한달음에 집으로 달려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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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흥식은 일제 강점기 최고의 부호이자 대표적 친일파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이다. 제헌국회 내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 처벌을 위해 출범한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1호로 체포한 인물이 바로 박흥식이었다. 1949년 1월8일 반민특위 조사관과 특별경찰대가 그를 압송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한 것이다. 박흥식은 반민특위 요원 암살과 미국 도피 계획을 세운 혐의도 받고 있었다. 그러나 박흥식 체포 당일 대통령 이승만은 “건국을 행한 오늘 공분도 다소 풀리고 형편도 변하였으니 반민족행위자 처단에 신중하자”는 성명을 냈다. 박흥식을 감싸는 뜻으로 읽힐 만했다. 그는 체포 3개월 만인 4월14일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당시 박흥식의 집은 서울 종로구 가회동 177-1번지였다. 옛날 신문을 찾아보면 “1950년 인민군 점령 기간 박흥식의 가회동 저택을 노동당 간부 식당으로 썼다”는 기사가 나온다. 한보 정태수 회장과 현대 정주영 회장이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혹시 을지로1가가 아니라 가회동이 아니었느냐”는 물음에 강금자 여사는 단호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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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히 기억하는데, 가회동이 아니라 명동 우리 집에서 가까운 을지로 1가 근처였어요. 아마 박흥식의 또 다른 집이 아니었을까요? 왜냐하면 아버지가 집 위치에 대해 똑같은 말씀을 여러 번 하셨거든요. 제가 엉뚱한 집으로 갈까 봐 그러셨던가 봐요.”

을지로에 박흥식의 또 다른 집이 있었다는 기록은 찾지 못했다. 대동흥업을 설립해 부동산업에도 손을 댔던 박흥식이기에 본인이 기거하거나 은신할 수 있는 집이 서울 각지에 여러 채였을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또한 가회동 집을 노동당 간부들이 식당으로 썼다는 보도는 박흥식이 다른 곳에 있었다는 심증을 굳히게 한다. 다만 77년 전인 열두 살 때의 기억이라 불확실한 대목이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골목 양쪽에 한옥이 늘어서 있었다는 정황을 고려하면 현재의 북촌 한옥마을인 가회동 쪽으로 무게가 기울기도 한다.

여사님은 또 “아버지가 박흥식과 일본에서 공부했다”고 했지만, 이를 뒷받침할 만한 근거는 없다. 국회 사무처가 역대 국회의원의 학력과 경력 등을 기록한 국회의원 기록카드에 강욱중은 “중학교 중퇴”로만 나온다. 열여섯 살 때부터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미곡상을 한 박흥식도 일본에서 공부했다는 기록이 없다.

강욱중이 변호사였음은 여러 관련 저술로 보건대 사실에 부합해 보인다.* 그는 1945년 8월15일 조선변호사시험을 보다가 일본 히로히토 천황의 항복 선언으로 시험이 중단되는 일을 겪었다. 감독을 하는 일본인들이 중도에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후 국회의원 신분이던 1948년 10월 시행된 2회 변호사시험에 다시 응시해 합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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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 당선은, 어쩌면 뜻밖의 일이었다. 1948년 5·10총선거에서 그가 출마한 함안 지역의 개표 결과를 보면 행운이 크게 따랐음을 알 수 있다. 강욱중은 1만807표(24.19%)를 득표해 2등인 대한독립촉성국민회(독촉) 이중섭 후보(1만302표, 23.06%)를 불과 505표 차이로 따돌렸다. 각각 3등과 4등인 한국독립당의 조억제 후보(1만7표, 22.40%), 독촉 소속 조용옥 후보(9731표, 21.78%)와도 박빙이었다. 5등인 독촉 소속 박노일 후보(3827표에 8.56%)만 10% 이하 득표를 했다.**

당시는 정당 차원의 엄격한 중앙 공천 시스템이 작동되지 않던 때였다. 함안에선 이승만의 정치 기반이라 할 독촉 후보들이 세 명이나 나와 총 득표율 53.4%를 나눠 가졌다. 함안의 대표 문중인 조씨 집안에서 나온 두 명의 후보도 각각 20% 이상씩을 가져갔다. 유력 후보가 없던 와중에 강욱중이 어부지리를 얻은 셈이었다. 그는 우익 민족주의 단체인 조선민족청년단(족청) 소속이었다. 나중에 국무총리가 된 이범석 계열로, 대통령 이승만과는 우호적 관계였다. 범이승만 세력이었다.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국회의원을 뽑은 5·10 총선거는 당시 주류였던 이승만의 독촉세력과 한민당에게 수모를 안겨주었다.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던 좌익계는 물론 김구·김규식을 중심으로 한 남북협상파가 대부분 불참하면서 압승이 예상됐지만, 전체 198석 중 독촉 세력은 27.5%(55석), 한민당은 14.5%(28석)를 얻었을 뿐이다. 대신 무소속이 전체의 42.5%를 차지했다. 범이승만 계열 정치세력에 몸을 담그고 당선된 뒤 이승만에 등을 돌린 이들도 적지 않았다. 조선민족청년단 강욱중이 그중 하나였다.

그런데 왜 강욱중은 박흥식의 생사를 굳이 확인하려 했을까. 해방 뒤 민족반역자 11명에게 사형을 언도했던 북한이 박흥식을 곱게 놔둘 리 없다고 보고 확인을 시도해본 거였을까. 사실 그가 박흥식을 걱정할 처지는 아니었다. 해방 뒤 이승만의 비호를 받던 박흥식은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뒤 피신하지 않았으면서도 큰 타격을 받지 않았다. 처형되지도, 납북되지도, 큰돈을 잃지도 않았다.

정작 문제는 강욱중이었다. 박흥식과의 개인적 교분이 어떠했는지 모르지만, 그는 박흥식으로 대표되는 친일파와 확실히 선을 그은 바 있다. 제헌국회에서 반민특위의 법적 근거가 된 반민법 제정에 적극적으로 앞장섰다. 반민법이 무력화 위기에 놓였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는 강욱중과 가족에게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 거대한 비극의 씨앗이었다. 반민특위 사무실이 중부경찰서 형사들의 습격을 받던 1949년 6월6일, 그가 국회 본회의에서 토해낸 사자후를 보자.

<다음 회에 계속>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법률가들’(김두식 지음, 창비, 2018)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누리집 선거통계시스템

​글쓴이 소개

사회부 기자. 베트남전 시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을 추적한 ‘베트남전쟁 1968년 2월12일’과 유해발굴을 통해 한국전쟁의 상흔을 드러낸 ‘본헌터’를 썼다. 그밖의 지은책으로 ‘유혹하는 에디터’, ‘굿바이 편집장’, ‘대한국민 현대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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