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원1호’가 고급정보 흘리니 조작간첩 사건이 줄줄줄 [금자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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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 국가권력에 의해 ‘프락치’로 몰려 구원받지 못한 채 북으로 간 국회의원들. ‘금자’는 소녀 금자의 시선을 따라 70년이 훌쩍 넘은 그 시간 속으로 여행을 떠난다. 대한민국 친위쿠데타와 내란의 기원을 마주한다. 월화수목금 연재.
“그분은 생김새가 어땠나요?”
“키는 작아요. 160cm 정도 될까. 살은 안 쪘고, 눈에 총기가 있고 날카로웠어요.”
“그렇게 기억력이 비상했다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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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하지 않고, 외우는 습관을 갖고 있었어요. 메모가 없을 때도 컴퓨터 돌아가듯이 줄줄 이야기를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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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초순의 어느 날 오후, 전철 4·7호선 이수역 인근 맥도날드에서 만난 이태호(81) 선생이 말했다. 북한의 고위 공작원이었던 신경완에 관한 이야기였다. 임시정부 인사, 제헌국회의원 등에 대한 한국전쟁기 납북 과정과 그들의 생애를 다룬 ‘압록강변의 겨울’은 1990년 신경완이 이태호를 찾아오면서 태어난 작품이다. 이태호 선생은 신경완과 수십번 만나 증언을 들은 뒤 이 책을 썼다. 그러나 신경완은 수많은 가명 중 하나일 뿐이었다.
신경완은 서용규였고, 신평길이었으며 황일호였다. 최종민이었고 박정수였다. 그리고 S였다. 도원1호였다. 1998년 9월 세상을 떠난 뒤에야 본명이 박병엽이었다는 사실과 남북한에서의 행적이 알려졌다. 한국전쟁기에 맡았던 ‘남쪽 인사 납치실무 책임자’는 그가 지나온 수많은 점 중 하나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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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자료와 문헌을 종합하면, 박병엽은 1922년 전남 무안에서 태어나 1930년대 아버지를 따라 함경남도로 이주했다. 1940년대엔 북로당에 입당해 대남공작부서에서 일하며 한국전쟁기를 보냈다. 대남공작부서에서 부부장까지 올랐던 그는 1981년 대만 주재 대사이던 어릴 적 친구 옥만호(1925~2011, 전 공군참모총장)를 포섭하기 위해 접근했다가 대만의 정보당국에 체포돼 남한에 넘겨졌다고 한다. 이태호 선생에겐 “3국에서 망명했다”고 했지만, 사실이 아니었다.
2007년에 나온 국정원 과거사건진실규명을통한발전위원회 보고서는 이에 관해 “역공작이었다”고 했다.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죽자 북한은 남쪽 요인들의 동요가 극심할 것이라 기대하고 이들을 포섭하려는 공작을 준비했는데, 남쪽의 정보기관은 이를 미리 감지하고 이중간첩으로 포섭해 활용하는 이른바 ‘역공작’(역용공작)을 통해 전향시켰다는 것이다.
나는 박병엽을 국회프락치 사건에 관해 증언한 ‘북한 고위간부 S’로 처음 접했다. S는 ‘월간중앙’ 1992년 6·7월호에 유영구 기자가 연재한 ‘거물간첩 성시백 비화’에서 1940~60년대 북한의 대남공작에 따른 남한의 조직사건과 이에 연루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쏟아낸다. 그가 누구인지 따라가다 보니 ‘압록강변의 겨울’이 나왔다. 그렇다면, 1990년 기자 출신 이태호에게 접근해 ‘북한 고급정보 증언자’의 이력을 쌓은 박병엽은, 1992년에는 현직 기자인 유영구를 찾아가 못다 한 증언을 이어간 셈이다.
그는 유영구에게 국회프락치 사건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를 전했다. 김일성 직계로 김구·김규식 주변은 물론 남한 주요 기관에 프락치를 대거 침투시켰다는 북로당 거물 간첩 성시백(1905~1950)이 국회프락치 사건에도 깊이 관련돼 있다는 거였다. 당시 제헌국회엔 남로당 계열보다 성시백의 북로당 계열 프락치가 더 많았다는 주장도 했다. 남한 당국이 국회프락치 사건의 증거로 발표했던 정재한의 ‘음부 암호문건’에 대해서는 “너무 서툴고 말이 안 돼 북한당국도 ‘조작’으로 판단했다”고 했는데, 사건에 연루된 의원들이 정식 당세포가 아닌 좌익동조자그룹 정도일 것”이라고 남로당 공작을 깎아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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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명된 북로당의 프락치 중에는 내가 만난 강금자 여사와 김진원 선생의 아버지 강욱중·김옥주도 포함된다고 박병엽은 말했다. 또한 그레고리 헨더슨(1922~1988) 주한미국대사관 삼등 서기관의 지시를 받아 국회프락치 사건의 공판을 기록했던 한국인 직원 김우식도 ‘성시백 프락치’였다고 단정해서 말했다. 실제 김우식은 ‘암호명 K-1’이라는 성시백 프락치로 몰려 수사기관에 끌려가 전기고문을 당하다 대사관 상사들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풀려났다. 2006년 11월 도쿄에서 김우식을 직접 만났던 김정기(86) 한국외대 명예교수는 “내가 성시백의 지시로 활동했다는 S의 말은 난센스”라는 답을 들었다. 김정기 교수는 아무런 증거도 없이 고문으로 때려잡아 프락치를 만들려고 했던 ‘김우식 프락치 사건’은 국회프락치 사건의 실상을 들여다볼 수 있는 ‘창문’이라고 했다.
“유영구 기자라는 분 아세요? 신경완, 아니 박병엽이 이후 그 기자를 주로 만났어요.”
“이름만 들어봤어요. 거기엔 크게 관심이 없었어요.”
“유영구 기자의 글에도, 이태호 선생님 글에도 박병엽이 증언한 성시백이 자주 등장해요.”
“제 책에 성시백 이야기가 나오지만, 크게 비중을 두지는 않았어요. 국회프락치 사건도 마찬가지고.”
“선생님 책에서 제헌국회의원들이 실제 국회 내 프락치였던 것으로 나옵니다.”
“박병엽이 그렇게 이야기했죠. ‘유령 프락치’가 아니었다고. 그 사건에 연루된 국회의원들도 북에서 ‘프락치 활동을 했다’고 말하는 게 유리했겠죠.”
이태호 선생은 ‘압록강변의 겨울’ 출간 이후 더는 남북관계사와 관련한 집필을 하지 않았다. 박병엽과의 교류도 중단됐다. 본래의 다양한 관심분야로 돌아왔다. 1999년 ‘새로 쓰는 풍수지리학’(아침)에 이어 2015년 가수 배호 평전 ‘안녕’(눈빛), 2018년엔 서울 강남의 마지막 판자촌으로 불리는 구룡마을의 이야기·사진을 담은 ‘빈곤의 미’(눈빛)와 ‘세상에 호소하다’(눈빛)를 잇따라 냈다. 동아방송 사회부 기자 시절에도 현장을 중시했던 그는, 칠십·팔십이 넘어서도 카메라를 들고 천상 르포라이터로 살고 있다.
다시 박병엽으로 돌아와, 그의 증언은 얼마나 신뢰성이 있을까. 사실 그가 이태호와 유영구를 만나기 전 더 많은 증언을 해준 대상이 있었다. 그것은 ‘증언’이라기보다 ‘첩보’, ‘제보’, ‘정보’라고 말하는 편이 적절하다. 그때의 이름은 ‘도원 1호’였다. 안기부가 붙여준 거였다.

“1980년대 초반에 월북자 가족 사건이 잇달아 발생한 것은 ‘도원 1호’라는 북한의 고위 공작원의 등장과 관련이 깊다. ‘도원1호’는 북한의 부부장급 고위공작원으로 그를 체포한 것은 남쪽의 대공 활동에서 가장 성공적인 공작으로 평가된다. (중략)
10·26사건 이후에는 군 고위장성 출신으로 우방국의 대사로 나가 있던 사람을 포섭하기 위해 2명의 고위 공작원을 잠입시켰다가 역공작에 걸려 두 명 모두 체포되어 한국으로 송환된 일이 발생했는데, 그 중 전향한 ‘도원 1호’는 놀라운 기억력의 소유자로서, 북의 대남사업과 관련하여 아주 고급의 정보를 엄청난 양으로 제공했다. 그는 특히 남파 공작원의 신상에 관한 정보를 많이 제공하여 이 정보가 단초가 되어 남파 가능성이 높은 월북자들과 그들의 연고자들에 대한 내사가 광범위하게 진행된 것이라고 한다.
‘도원 1호’의 제보가 결정적인 단서가 되어 적발된 월북자 가족 간첩사건으로는 김정인·석달윤 사건(1980), 정춘상 사건(1980), 박동운 사건(1981), 송씨 일가 사건(1982) 등이 있다. 이 중 정춘상 사건은 증거물로 소련제 기관단총과 실탄이 나오는 등 의심의 여지 없는 증거물이 나온 사건이지만, 다른 세 사건은 중앙정보부와 안기부의 대표적인 조작의혹 간첩 사건으로 두고두고 논란이 되고 있다. 2007년 6월29일 진실화해위원회는 김정인·석달윤 간첩조작 의혹 사건에 대해 진실규명 결정을 내리고 사건에 대한 재심을 권고한 바 있다.”*

2007년에 나온 국정원 과거사건진실규명을통한발전위원회 보고서 ‘과거와 대화 미래의 성찰-학원·간첩편Ⅵ’에 나오는 내용이다. 1940년대부터 40년 넘게 대남공작 활동을 했던 도원1호, 즉 박병엽은 아는 게 너무 많았다. 박병엽이 흘려준 정보는 하나둘 안기부의 수사로 이어졌고, ‘간첩 소탕 작품’이 되어 신문에 대서특필됐다.
그 간첩사건들을 다시 곱씹어보자. ‘1차 진도간첩단 사건’으로 불리는 김정인(1939~1985)·석달윤(1932~2022) 사건의 김정인은 사형판결이 확정돼 1985년 10월31일 형이 집행됐다. 그러나 이 사건은 고문조작에 의해 꾸며진 것으로 나중에 판명됐다. 김정인은 사형집행 25년 만인 2010년 7월16일 부인이 신청한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고문에 못이겨 한국전쟁기에 월북한 10촌 박양민과 만났다는 이유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석달윤은 2009년 재심에서 무죄를 받았다. ‘2차 진도간첩단 사건’으로 불린 박동운(1945~) 사건과 ‘송씨(송창섭) 일가 간첩단 사건’ 관련자들도 모두 고문조작 사실이 밝혀진 뒤 재심 무죄를 받았다. ‘도원1호’ 박병엽은 송씨 일가 간첩단 사건과 관련해 법정 진술서까지 냈는데, 이때의 이름은 ‘박정수’였다.
유일하게 소련제 기관단총과 실탄 등 증거를 찾았다는 정춘상 사건, 즉 전남 보성 명문가 봉강 정해룡(1913~1969) 일가의 간첩사건도 “가족 간의 인정 때문에 월북했지만, 북의 지령에 따라 활동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역시 고문 수사로 얼룩진 이 사건을 맡았던 국정원 수사관들은 지난 7월 모두 서훈이 취소됐다. 삼촌 정해진과 북에 다녀온 일 때문에 정춘상은 앞의 김정인과 같은 날 사형당했다.
박병엽은 안기부에 절대적 신뢰를 받는 정보원이었다. 안기부 직원 박OO은 2007년 ‘1차 진도간첩단 사건’을 조사한 1기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과의 면담에서 “도원1호가 제보하는 첩보는 상당히 구체적이고 100%의 신빙성이 있었다”고 말했다 한다. 누가 월북했는지, 누가 남파됐는지 하는 1차 정보는 정확했을지도 모른다. 그걸 단서로 무리하게 파고든 국정원이 문제였을까? 어쨌든 박병엽이 증언한 정보의 신빙성은 결과로 입증되지 못했다. 국회프락치 사건과 다를 바 없었다. 어쩌면 국회프락치 사건은 고문을 동원한 조작간첩 사건의 기원이 될 수도 있다.
이는 북한에서 대남공작 활동을 했던 고위관리의 증언을 신중하게 취사·선택해야 한다는 교훈을 남겼다. 신정완과 S가 박병엽이라는 사실을 세상에 처음 공개한 것으로 알려진 서동만 전 상지대 교수(1956~2009, 국정원 기조실장 역임)는 ‘북조선사회주의체제성립사’(도서출판 선인, 2005)에서 이렇게 썼다. “1990년대 이후 최고위급 망명자는 조국전선 부국장을 역임한 박병엽(가명 신경완, 서용규, 황일호, 신평길)이며 그의 증언은 일부 연구자의 정리를 통해 몇 권의 책으로 간행된 바 있다. 상황적 요인이나 개인적 사정에 따라 증언 내용이 좌우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러한 증언에도 비판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이태호 선생은 ‘압록강변의 겨울’을 출간한 뒤에도 30년간 박병엽이 ‘체포된 전향 간첩’인 줄은 몰랐다고 했다. 그 사실은 5년 전에 알았다. 그에게 마지막으로 물었다.
“1991년 책 나오고 나서도 자주 만나시지 그랬어요?”
“좀 거리를 뒀어요. 책 출간한 뒤 따로 만난 기억이 없어요. 껄끄러운 일이 하나 있었어요. 그 책 일본어판이 나왔는데, 썩 내켜 하지 않았어요. 국정원과 협의해야 했다고.”
“그래도 자주 만났는데. 친해지지 않았나요?”
“사생활은 전혀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다만 이런 말은 했어요. 그분 협심증이 좀 있었는데, 언제가 나한테 자신의 묫자리 좀 찾아봐줄 수 없냐고. 제가 풍수지리에 관한 지식이 있는 걸 알았거든요. 자신의 고향 무안인 목포 부근에 명당 없냐고.”
“그래서요?”
“그런 것까지 제가 하기엔….”(웃음)
20대 젊은 시절부터 북한의 대남 공작원으로 일하며 최고의 자리까지 올랐던 박병엽은 60살이 다 돼 남한의 정보원으로 정반대 편에서 일했다. 그의 손가락에 지목되거나 사건에 얽힌 이들은 간첩으로 몰려 가혹한 시간을 보냈고, 그중 김정인과 정춘상은 사형이 확정돼 생을 마감했다. 박병엽도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남한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북에 있는 가족도 고려해야 했다. 분단의 비극에 뿌리를 둔 일이었으나, 일말의 회의는 없었을까.
고위 공작원 출신 박병엽은 국정원의 정보원 역할에만 그치기는 뭔가 성에 안 차고 공허했을지 모른다. 그리하여 이태호·유영구와 그 외 북한에 관심있는 저술가들을 찾아 권위 있는 증언자의 자격을 얻었다. 이것은 그의 인생 품격을 높였다. 2010년에는 퇴직기자 유영구가 두 권의 ‘박병엽 증언록’을 펴내기도 했다. 그런 그가 이태호 선생에게 좋은 묫자리를 찾아달라 했다는 일화는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이태호 선생이 집필한 ‘새로 쓰는 풍수지리학’ 표지에 적힌 부제는 이렇다. ‘큰 명당은 착한 이의 것이다.’ 그는 과연 명당자리에 묻혀 평안히 눈감았을까. 그것이 궁금하다.
<다음 회에 계속>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국정원 과거사건진실규명을통한발전위원회 보고서는 이에 관해 이런 주석을 달고 있다. ”내부자료엔 김정인· 정춘상 등을 검거하였다고 보고되어 있는데, 거론된 ‘김정인 사건’은 민가협 등 관련 단체에서 지속적인 조작의혹이 제기되었던 사건이며, 정춘상 사건 기록에는 첩보유출 경위에 도원1호에 대한 언급이 없어 이 또한 의문점이 없지 않아, 실제 도원1호가 검거될 당시 진술내용과 동인으로부터 유출된 첩보 내용 등에 대한 확인이 필요하나 동인에 관한 자료를 요청하였으나 ‘통제자료’로 분류되어 공개할 수 없다는 회신이 온바, 동인 진술의 신빙성을 입증할만한 근거는 없다.”
글쓴이 소개
사회부 기자. 베트남전 시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을 추적한 ‘베트남전쟁 1968년 2월12일’과 유해발굴을 통해 한국전쟁의 상흔을 드러낸 ‘본헌터’를 썼다. 그밖의 지은책으로 ‘유혹하는 에디터’, ‘굿바이 편집장’, ‘대한국민 현대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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