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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October 25, 2026

유튜브·AI 챗봇 시대…예술로 수십 년 앞서 실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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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아트 선구자 린 허쉬만 리슨
서울시립미술관서 亞 첫 개인전
인터랙티브 영상·AI 수십 년 앞서
비디오로 일기 찍고, 가상 인물로 분장
유전공학까지 확장해 정체성 탐구

AI 챗봇을 적용한 린 허쉬만 리슨의 작품 ‘에이전트 루비(Agent Ruby)’(1998-2002). <서울시립미술관>

AI 챗봇을 적용한 린 허쉬만 리슨의 작품 ‘에이전트 루비(Agent Ruby)’(1998-2002). <서울시립미술관>

화면 속 AI 챗봇이 사람과의 대화에 반응하며 눈썹을 찌푸리고, 관객은 리모콘으로 방 안에 갇힌 주인공의 운명을 선택한다. 작가는 카메라 앞에서 자신의 내밀한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오늘날 온라인에서 익숙하게 접하는 장면이지만, 미국의 미디어 아티스트 린 허쉬만 리슨은 수십 년 전부터 이를 예술로 실험했다.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에서 열리는 ‘린 허쉬만 리슨: 나의 [나]들’은 미디어아트의 선구자로 꼽히는 리슨의 아시아 첫 미술관 개인전이다. 회화와 사진, 조각, 미디어 설치, 영상, 아카이브 등 200여 점을 통해 1960년대부터 최근까지 60여 년에 걸친 작업 세계를 조망한다. 인터랙티브 영상과 AI 챗봇, 게임적 서사 등 새로운 기술을 일찌감치 예술에 끌어들인 작가의 실험을 만날 수 있다.

작가의 작업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근원적 질문에서 출발한다. 비디오와 레이저디스크, 인터넷, AI를 거쳐 최근 유전공학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기술이 등장할 때마다 그는 이를 예술의 재료로 삼아왔다.

대표작 ‘로나’(1979~1984)는 관람객이 이야기의 전개에 개입하는 인터랙티브 미디어 작품이다. 당시 새롭게 등장한 레이저디스크 기술을 활용했다. 주인공 로나는 광장공포증으로 집 안에 머물며 전화와 TV를 통해서만 바깥세상과 소통한다. 관람객은 리모컨으로 로나의 선택에 개입하고, 36개의 시퀀스를 따라가며 서로 다른 결말에 도달한다.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거나 TV를 향해 총을 쏘거나 자살을 하는 등 관객의 선택에 따라 이야기가 달라진다.

린 허쉬만 리슨의 ‘로나’(1979-1984) <서울시립미술관>

린 허쉬만 리슨의 ‘로나’(1979-1984) <서울시립미술관>

넷플릭스가 2018년 선보인 인터랙티브 영화 ‘블랙 미러: 밴더스내치’보다 수십년 앞서 관객 참여형 서사를 완성함 셈이다. 전화와 TV에 의존해 세상과 연결되는 로나의 모습에서는 스크린을 매개로 타인과 소통하는 현대인의 고립감도 엿볼 수 있다.

AI와 인간의 관계를 탐구한 작업도 눈길을 끈다. ‘에이전트 루비’(1998~2002)는 생성형 AI가 등장하기 훨씬 전에 제작된 웹 기반 챗봇이다. 화면 속 루비는 이용자와 대화를 주고받으며 입을 삐죽이거나 활짝 웃는다. 정해진 명령에 반응하는 기계를 넘어 인간과 대화하고 감정적 관계를 맺는 존재로서 AI의 가능성을 탐색했다.

린 허쉬만 리슨의 ‘논리는 심장을 마비시킨다’(2022). <서울시립미술관>

린 허쉬만 리슨의 ‘논리는 심장을 마비시킨다’(2022). <서울시립미술관>

AI를 향한 작가의 질문은 최근 작업으로 이어진다. 2022년 베네치아 비엔날레 본전시에 소개된 ‘논리는 심장을 마비시킨다’는 작가가 챗GPT-3와 협업해 대본을 쓴 영상 작품이다. 인간과 AI가 대화를 나누며 전쟁과 사회 통제에 기술이 활용되는 문제를 다룬다. 영상 속 AI는 인간에게 “우리는 둘 다 트랜스”라고 말하며 “미래의 역사를 함께 바꿔가자”고 제안한다. 기술이 인간을 통제하는 수단인 동시에 새로운 관계와 가능성을 만들어내는 존재라는 양면성을 드러낸다.

린 허쉬만 리슨의 ‘린 허쉬만 리슨의 전자일기’(1984-2019). <서울시립미술관>

린 허쉬만 리슨의 ‘린 허쉬만 리슨의 전자일기’(1984-2019). <서울시립미술관>

리슨은 자신의 삶을 기록하는 방식에서도 시대를 앞서갔다. 1984년부터 시작한 ‘전자일기’ 시리즈에서 작가는 카메라 앞에 앉아 어린 시절 가정에서 겪은 폭력과 학대, 결혼 생활의 상처, 자녀를 부양하기 위해 콜걸로 일했던 경험 등 내밀한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자신의 경험을 영상으로 기록하고 공개하는 작업은 오늘날 누구나 창작자가 돼 유튜브에 일상과 생각을 올리는 모습과 맞닿아 있다.

린 허쉬만 리슨의 ‘로베르타 구성 차트 #1’(1975) <서울시립미술관>

린 허쉬만 리슨의 ‘로베르타 구성 차트 #1’(1975) <서울시립미술관>

작가는 사회적 역할과 타인의 시선에 따라 달라지는 정체성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1970년대에는 ‘로베르타 브라이트모어’라는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 수년간 실제 삶에서 연기했다. 금발 머리와 붉은 립스틱으로 외모를 바꾸는 데 그치지 않고 말투와 몸짓까지 세밀하게 설정했다. 로베르타의 이름으로 은행 계좌를 개설하고 운전면허를 취득하는 등 현실의 제도와 사회적 관계 속에서 가상의 인물이 실제로 존재하도록 했다. 여성 페르소나인 ‘에로즈 셀라비‘를 만들어 사진을 찍었던 마르셀 뒤샹의 작업에서도 영향을 받았다.

린 허쉬만 리슨의 ‘사이버로베르타’. <서울시립미술관>

린 허쉬만 리슨의 ‘사이버로베르타’. <서울시립미술관>

1996년작 ‘사이버로베르타’는 양쪽 눈에 카메라와 웹캠을 단 인형이다. 웹사이트에 접속한 관람객은 원격으로 인형의 머리를 돌려 시선을 제어할 수 있다. 감시와 관음증, 신체의 확장을 시각화하는 작품이다.

작가의 시선은 유전공학의 영역으로도 확장된다. 2010년대 이후 작가는 생명과학 기술이 인간의 신체마저 수정 가능한 데이터로 변주시켰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제약회사 노바티스와의 협업으로 탄생시킨 ‘LYNNHERSHMAN 항체’는 자신의 이름(Lynn Hershman)을 구성하는 알파벳에 대응하는 아미노산 배열을 조합해 만든 바이오 작품이다.

작가는 인터랙티브 미디어, AI, 유전공학 등 끊임없이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이면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근원적 질문을 이어왔다. 기술과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수많은 정체성을 통해 ‘나는 누구이고 어디까지인가’라는 그의 질문은 여전히 날카롭고 유효하다. 전시는 내년 2월 21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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