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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October 30, 2026

무법지대였지만 공동체였다…구룡성채의 역설 [.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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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룡성채, 검은 성의 비밀 l 곽한영 지음, 흐름출판, 2만2000원
구룡성채, 검은 성의 비밀 l 곽한영 지음, 흐름출판, 2만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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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비정전’의 엔딩은 왕가위(왕자웨이) 감독의 작품 가운데서도 유독 기묘하다. 영화 내리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배우 양조위가 불쑥 나타나, 좁고 눅눅한 방에서 말없이 담배를 피우며 외출 채비를 한다. 속편을 염두에 둔 장면이었지만 후속작이 제작되지 않으면서 수수께끼 같은 엔딩으로 남았다. 이 장면이 지금까지 회자되는 이유 중 하나는 배경이 된 공간의 기이함에 있다. 경찰조차 함부로 드나들기 어려웠다는 홍콩의 악명 높은 마굴, ‘구룡성채’다.

구룡성채는 약 180년 전 청나라가 영국에 대항해 만든 군사 요새로 시작했으나 이후 영국과 중국의 관할권이 교차하는 “역사의 틈바구니” 속에서 무법지대로 변모한 작은 도시의 이름이다. 곽한영 부산대 교수가 쓴 신간 ‘구룡성채, 검은 성의 비밀’은 잠실야구장 정도 너비에 최대 5만명이 모여 살았다는 이 기이한 도시의 이야기를 담았다.

다닥다닥 붙어 마치 한 몸처럼 보이는 낡은 빌딩 군집, 그 위를 스치듯 나는 비행기, 녹슨 철제 발코니와 에어컨 실외기, 어지럽게 널린 빨래. 나흘간의 홍콩 여행기 형식으로 쓰인 이 책은 1994년에 사라져 이제는 가볼 수도 없는 구룡성채를 마치 실제로 다녀온 것처럼 생생하게 소개한다. 책은 도박, 마약, 매춘 등 오만가지 범죄의 온상이었으나 동시에 오갈 데 없는 정치적·경제적 난민들의 마지막 터전이자 공동체였던 구룡성채를 입체적으로 조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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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구룡성채가 화려한 항구도시 홍콩과 “매우 적극적인 공생” 관계를 맺어왔다고 말한다. 홍콩의 공식적인 제도와 시장이 감당하지 못하는 수요를 구룡성채가 흡수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당시 구룡성채에는 비싼 의료 서비스를 감당하기 어려운 서민들이 마지막으로 찾아가는 불법 치과와 각종 위생 규제와 세제를 무시하고 저렴한 어묵과 완탕을 만들어 홍콩에 납품하는 공장이 즐비했다고 한다.

법 연구자인 저자는 국가의 통제가 사라진 공간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나름의 질서를 만들어냈는지에 주목한다. 구룡성채 주민들이 도시 내 빈번하게 나타나는 시체를 처리하기 위해 자치 조직인 주민회(카이퐁)를 꾸렸다는 대목이 그렇다. 법과 제도가 부재한다고 해서 공동체의 질서까지 무너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구룡성채의 역설이자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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