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을 먹다 발각된 큰오빠, 북한 공작원이 접근한 동생 [금자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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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 국가권력에 의해 ‘프락치’로 몰려 구원받지 못한 채 북으로 간 국회의원들. ‘금자’는 소녀 금자의 시선을 따라 70년이 훌쩍 넘은 그 시간 속으로 여행을 떠난다. 대한민국 친위쿠데타와 내란의 기원을 마주한다. 월화수목금 연재.
1940년대는 ‘영자의 시대’였다. 대법원 통계에 따르면, 1940년대 한국인이 가장 선호한 여아 이름은 영자였다. 1950년대엔 영숙, 1960년대엔 미숙, 1970년대엔 은주, 1980년대엔 지혜, 1990년대와 2000년대엔 유진, 2010년대엔 서연이 대표 이름이었다. 영자·숙자·금자와 같은 ‘자’자 돌림은 점순이, 말순이, 옥례 같은 구한말식 이름이 다수를 차지하던 1930년대부터 도시를 중심으로 무섭게 치고 올라왔다. 김영자는 1945년생이다. 그가 1938년생 강금자를 만난 것은 15년 전이었다.
“그때 먼저 연락을 하셨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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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제가 만나자고 했죠.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기념사업회 계신 분 통해 소개를 받았거든요. 구파발의 카페에서 봤는데,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갔어요. 그분도 제가 무슨 생각으로 만나자고 하나 의심 아닌 의심을 했을 거예요. 따님이 아기를 데리고 왔더라고요.”
“말씀은 잘 나눴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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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과 6·25 이후에 불이익당하며 고생한 일들에 관해 이야기했어요. 대화를 들은 딸이 안심했는지 곧 자리에서 일어나서 갔어요.”
“그 이후에도 만남을 이어갔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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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그러고 나서 지난해 6월 반민특위 기념사업회 행사에서야 뵀어요.”
대형 창업지원센터가 입주한 고양시 원당역 인근 빌딩의 한 카페에서 김영자 여사를 인터뷰했다. 5월 초순의 어느날 아침 9시에 약속을 잡았다. 내가 자주 가는 카페였고, 여사님 집과도 가까웠다. 그는 이야기가 끝난 뒤 고양시에서 여는 꽃박람회장에 갈 거라고 했다. 여름 같은 봄날이었다.
강금자 여사님 다음으로 만난 국회프락치 사건 유족이었다. 1948년 5·10 총선거에서 전남 진도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한 제헌국회의원 김병회(1916~1987)가 그의 아버지다. 조선일보 목포지국장을 지낸 김병회는 재판에서 6년형을 받고 한국전쟁 직후 서대문형무소에서 풀려난 뒤 북한으로 갔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서대문형무소에서 어머니와 함께 면회 간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것이 아버지의 모습이 마지막이었다. 아버지는 그날 딸에게 “예쁘다”는 말을 남겼다.
그가 황폐했던 지난 세월에 관해 말했다. 아버지가 떠난 뒤 남은 가족은 목포 대의동 할아버지네로 갔다. 일본인이 살던 적산가옥이었다. 이층으로 된 나무집은 태풍이 올 때마다 곧 쓰러질 듯 흔들거렸다. 쥐들은 밤마다 나무기둥을 갉아먹었다. 가족의 운명도 그렇게 위태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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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없어 대학에 가지 못하고 고시공부를 하던 큰오빠 명엽은 목포경찰서에 끌려가 “북에 계신 아버지가 생활비를 보내서 먹고 살지 않느냐. 사실대로 말하라”는 문초와 고문을 당했다. 사법시험 1차에 합격했지만, 아버지의 친한 친구마저 2차 시험을 위한 보증 부탁을 거절하자 약을 먹고 자살을 시도했다. 다행히 어머니 김귀례에게 발각돼 살았다. 이후 고향 진도로 내려가 나락장사를 하던 큰오빠는 표구 기술을 배워 평생 표구사를 했다. 어머니와 함께 고향 진도를 오고가며 석유가 담긴 소줏병과 빨래비누를 지게에 지고 쌀·보리와 바꿔오던 작은 오빠 무엽도 나중엔 형을 따라 표구 일을 했다.

남동생 충엽은 집안에 희망을 줬다. 법대 대신 공대를 택해 전액 장학금으로 서울대 화공과를 다니고 삼성석유화학에 들어갔다. 해외파견을 나가야 했을 때 신원조회가 다시 발목을 잡았지만, 고위 임원이 보증을 서준 덕분에 말레이시아로 나갈 수 있었다. 그때 충격적이게도 북한 공작원이 접근한 일은 가족만이 아는 비밀이다. 북한 공작원은 “아버지가 북한에 계시는데 안 보고 싶냐”고 했다. 동생은 “북에는 아버지 한 분이지만, 여기는 가족이 너무 많다”며 거절하고 회사에 보고했다. 섬뜩했다.
“어머니가 자신의 한을 책으로 쓰고 싶다고 했는데, 그걸 못하고 가셨어요.”
“억울함을 풀려는 노력은 없었나요?”
“누구한테도 이야기하고 싶지도 않았고, 그럴 능력도 없었어요.”
“어머니는 아버지에 대해 무슨 이야기를 했나요?”
“아버지가 농지개혁법을 만드셨다고 했어요. 서로 평등하게 살자고 하는 건데, 그걸 오랑캐로 몰았다고 하셨어요.”
김영자의 아버지 김병회는 제헌국회에서 농지개혁법을 가장 앞장서 제안했던 인물이다. 농사짓는 사람이 땅을 소유하는 ‘경자유전’은 농민들의 오랜 소망이었다. 농지개혁법은 제헌국회에서 논쟁을 거친 끝에 김병회가 국회프락치 사건으로 체포되던 1949년 6월에 공포됐으며, 한국전쟁 직전인 1950년 3월 시행됐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농민들이 북한의 선동에 쉽게 호응하지 않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 법이었다. 당시 “소장파 의원들이 김일성을 따르고 있다”고 주장하며 동료들을 프락치로 몰았던 제헌국회의원 김준연은 농지개혁법에 반대했다.
1919년생인 어머니는 아버지만 그리워하다 10년 전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오빠들도, 동생도 다 떠나고 김영자만 남았다. 큰오빠는 서울 강변북로에서 교통사고로 어머니보다 먼저 생을 마감했다. 작은오빠는 폐암에 걸렸고, 동생은 정년퇴임 뒤 실미도에서 동호회 회원들과 야생화 사진을 찍다가 실족했다. 얼마 전에는 사위까지 갑자기 저세상 사람이 됐다.
그 누구보다 가장 먼저 이별을 고한 사람은 남편이었다. 1975년이니, 50년도 더 지났다. 급성 간암이었다. 21 살에 결혼해 10년을 함께 살고 31살에 혼자가 됐다. 서울 도봉구의 창동 성당에서 장례 미사를 지내고 관이 계단으로 운구될 때 그는 “하나님은 안 계시다”고 소리소리 질렀다. 절망이 뱀처럼 몸을 휘감았다.
남은 1, 3, 5, 7살 아이들을 위해 생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보험영업을 시작했다. 남편 친구한테 가서 보험 가입을 제안했더니 그냥 돈을 주기만 했다. 자존심이 상해 일을 접었다. 헌 옷 장사, 수세미 장사 등을 했다. 가장 오래 한 일은 밥상 장사였다. 현대차 포니원(1)은 뒷좌석이 뒤로 접혔다. 거기에 상을 싣고 다니며 팔았다.
“2021년 진실화해위원회에 국회프락치 사건 진실규명을 신청하셨죠? 덕분에 큰오빠 인권침해도 규명했어요. 아버지 한을 풀지 못했지만.”
“김옥주 의원 자제분인 김진원 선생님 덕분이지요. 그분이 같이하자고 해주셔서 저랑 함께 둘이 냈지요.”
“강금자 여사님께도 함께 진실규명 신청을 하자고 연락을 드리지 그러셨어요?”
“한동안 소식을 주고받지 못한 터라 따로 말씀을 안 드린 것 같아요.”
“그렇군요. 강금자 여사님은 아쉬워하던데.”
김영자와 강금자는 15년 전 처음 만나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었다. 단 한 번도 제대로 털어놓지 못했던, 가슴속에 켜켜이 쌓인 고통스러운 기억과 울분을 타인과 공유하기는 둘 다 처음이었다. 하지만 만남은 지속되지 않았다. 상대가 온전히 마음을 열었는지 확신하는 데 주저함이 있었다. 무엇보다 기억의 밀도와 무게가 서로 달랐다. 가족 공동체가 공중폭격을 맞아 파편처럼 떨어져 나가던 1950년에 영자는 다섯 살, 금자는 열두 살이었다. 금자는 어머니 대신 책임져야 할 동생이 있었다. 그래서 강금자에게는 늘 어머니가 삶의 기준이었다. 여든이 넘을 때까지 그 혼잣말은 멈추지 않았다. “그래도 엄마가 있었으니 좋았겠다. 나에게 엄마라도 있었다면….”
<다음 회에 계속>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글쓴이 소개
사회부 기자. 베트남전 시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을 추적한 ‘베트남전쟁 1968년 2월12일’과 유해발굴을 통해 한국전쟁의 상흔을 드러낸 ‘본헌터’를 썼다. 그밖의 지은책으로 ‘유혹하는 에디터’, ‘굿바이 편집장’, ‘대한국민 현대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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