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 60년…지구적 위기의 시대, 한국서 발신된 사상의 등불 [.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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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가 올해 창사 60주년을 맞아 기획한 ‘창비 한국사상선’이 전30권으로 완간됐다. 2024년 7월 첫 10종을 펴낸 이래, 올해 2월 2차분 10종에 이어 16일 출간된 3차분 10종까지 모두 30권의 대장정이 2년 만에 마무리됐다. 2020년 처음 기획을 구상한 때로부터는 6년 만이다.
지금 세계는 근대 이후 인류의 보편적 가치로 확립되고 확장돼 온 자유·평등·민주주의에 대한 회의와 냉소, 심각한 정치·경제적 양극화, 인공지능(AI) 시대를 맞은 인간 존재의 의미와 윤리적 기준의 부재, 기후·생태 위기 등 전 지구적 도전에 직면해 있다. 문명사적 전환이 시급하다는 경고음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창비 한국사상선은 이런 행성적 위기에 맞서 우리가 어떻게 사유하고 살아갈 것인지 묻고, 한국의 사상적 거장들의 사유와 철학에서 답을 찾아보려는 특별기획이다. 잘 알려진 사상가뿐 아니라, 기존 연구에서 잘 다루지 않던 인물들도 과감히 끌어들여 한국사상의 외연을 확장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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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사상가’의 범주에서 제외됐거나 소홀히 여겨진 군주, 여성, 문인, 정치인, 종교인까지, 시대의 나침반이 된 인물 59명을 선정해 ‘한국 사상’의 새로운 계보를 구축했다. 다만, 그 시기는 조선 시대부터 20세기 말까지 한국사 600년으로 한정했다.
유교 문명국가의 설계자 정도전(1권)을 시작으로, 숭유억불 시대에 한국 불교의 정통을 계승한 승려들(4권), 정치·사회적 실천을 강조한 조광조와 조식(6권), 실학의 원조 유형원과 이익(11권),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주체적 사유를 펼친 여성 유학자들(13권), 동양 유학과 서양 과학을 접목한 기학(氣學)의 창시자 최한기(15권), 해방의 사유를 전개한 한용운과 신채호(22권), ‘씨알 사상’의 주창자 함석헌(28권), 시대정신의 정치인 김대중(30권)까지, 한반도에 뿌리를 두었으나 더 넓고 높은 가치를 지향한 사상의 거장들을 오롯하게 집대성했다. 그렇게 호명된 이름들이 곧 각 권의 제목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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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2020년 창비는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를 비롯해 학자와 창비 편집국 간부 등 모두 10명의 간행위원회를 구성해 한국사상선의 방향과 짜임새를 구체화하고 각 권의 편저자를 위촉했다. 집필진에는 편저자를 포함해 각 분야의 학자와 전문가 31명이 참여했다.
창비 한국사상선은 사상의 거목들이 남긴 핵심저작, 연설, 대담, 기고문 등 사유의 전개와 정수를 보여주는 기록물들을 시간순 또는 주제별로 정리해, 독자가 당사자의 육성으로 그 사상을 생생하게 접할 수 있도록 짜였다. 각 권의 편저자가 쓴 서문은 그 인물의 삶과 시대적 배경, 사상의 개요와 의미를 설명한 해제 구실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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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는 지난 16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 창비 사옥에서 기자간담회를 열어, 한국사상선 완간의 배경과 과정, 의미와 과제 등을 설명했다.
백낙청 간행위원장은 “오늘날 ‘케이(K) 컬처가 융성하는 데에는 사상의 바탕이 있고, 그 힘이 우리 삶과 문화의 활력소가 되고 있다”며 “한국의 독자가 케이(K) 사상을 읽고 삶의 자양분으로 삼을 수 있는 형식으로 총서를 만들었다”고 밝혔다. 그는 “K-사상의 뿌리는 적어도 신라 시대 원효대사나 최치원까지 올라가겠지만 너무 방대하고 집중력이 떨어질 것 같아, 사상사적으로 더 중요하다고 본 조선 시대부터 시작했다”고 말했다.
간행위원회의 실무소위원회를 이끈 황정아 한림대 한림과학원 교수(문학평론)는 현재 한국사회와 인류가 맞닥뜨린 여러 도전과 과제를 해결하는 데 참조할 수 있는 ‘사상의 자원’과 ‘현재성’을 사상가 선정의 기준으로 삼았다고 밝혔다.
창비 한국사상선 30권은 ‘개벽사상’을 기점으로 ‘전기편’(조선 건국부터 19~20세기 전환기)과 ‘후기편’(20세기)을 각각 15권씩 나눠 편찬했다는 게 가장 큰 특징이다. 후기편의 첫 권(16권)을 개벽사상으로 민족과 민중을 일깨운 ‘최제우·최시형과 강일순’으로 연 이유다. 개벽사상을 근대 전환기에 등장한 한국 특유의 사상적 자원으로 보고, 전통사상과 20세기 사상을 잇는 징검돌로 삼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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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 한국사상선은 케이사상의 범주를 근대 이전 남성중심 학자와 관료가 지배한 지식 풍토의 관성을 넘어 문인·여성·정치가 등 ‘사상가’라는 통념의 변방에 있던 인물들에까지 넓혔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의 책임연구원(동양철학)이 편저자로 참여해 ‘조선의 여성 유학자들’을 소개한 ‘임윤지당, 이사주당, 강정일당’(13권)도 그중 하나다. 대다수가 들어본 적도 없을 낯선 이름들이다. 이 연구원은 “흔히 ‘여자들은 생각이 없다’고 하던 시절에, 이 분들은 사유의 주체로서 자기 존재뿐 아니라 인간과 사회와 자연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성리학을 통해 탐구의 결과를 기록으로 남긴 독보적 여성들”이라고 평가했다.

황정아 교수는 “한국 사상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가 확고한 ‘경세(經世)적 실천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런 특징이 한국 문학에서도 나타난다”며 그 표현방식을 ‘리얼리즘’으로 정의했다. ‘임화·김수영·신동엽’(29권)의 편저자인 그는 “식민지, 전쟁, 분단, 독재에 이르는 20세기 한국 역사의 고비를 거치면서 위 시인들이 현실과 사유가 치열하게 교섭하는 리얼리즘적 실천을 통해 어떤 ‘보편적 비전’을 지향했는지 보여주려 했다”고 밝혔다.
김대중 전 대통령을 한국의 사상가로 재조명해 마지막 권으로 구성한 것도 눈길을 끈다. 편저자이자 ‘창작과 비평’ 편집주간인 이남주 성공회대 교수(중어중국학)는 “김대중 편을 편찬하는 임무가 상당히 영광스럽고 보람 있고 부담스러운 작업”이었다며, 그가 재발견한 ‘사상가 김대중’의 특징 세가지를 이렇게 설명했다. 첫째, 항상 시대 정신과 시대적 과제들을 정의하고 정치적 실천을 했다. 둘째, 자신의 주장을 설득할 수 있는 논리 개발에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셋째, 우리 역사에 있어온 민주주의의 자원을 높이 평가하고 ‘케이 민주주의’의 더 높은 지평을 추구했다.
백낙청 간행위원장은 “케이팝이 한국산이지만 전 세계가 공유하는 것처럼, 케이 사상도 단순히 한국에서 발신된 사상이라는 의미를 넘어 세계적으로 유통될 가치가 있고 그런 날이 올 것을 확신한다”고 강조했다. 창비는 이번 한국사상선 완간을 기념해 이달 말부터 독자 서평대회와 독서모임 지원 이벤트 , 인물과 주제별 연속특강을 이어가고 , 다음달 16일에는 창비 60 주년 학술행사를 열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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