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비대면 진료의 위험한 질주
코로나19 이후 우리는 지역·필수·공공의료 인프라 붕괴와 전공의 이탈로 촉발된 초유의 의료대란을 겪었다. 후유증 극복과 체질 개선에 적어도 10년 이상의 시간과 막대한 사회적 비용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이 사태에는 구조적으로 여러 원인이 얽혀져 있겠으나, 2000년대 중후반 보건의료 전문가들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회와 정부가 강행했던 ‘실손의료보험 도입’이라는 뼈아픈 정책적 패착이 근저에 자리 잡고 있다.
당시 보건의료 전문가들은 통제장치 없는 민간 보험의 팽창이 필연적으로 의료 상업화, 과잉 진료, 그리고 국민건강보험 재정의 악화로 이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료산업 선진화’와 ‘신성장 동력 창출’이라는 미명하에 경제 부처와 금융자본이 앞장서고 국회가 움직이면서 생명보험사의 실손보험 판매가 전면 허용됐다. 그 결과가 어떠한지는 지금 이미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바와 같다.
비급여 가격에 대한 통제 기전이 전무한 상태에서 팽창한 실손보험은 정부 재정 손실을 넘어 의료 현장을 기형적인 수익 창출의 장으로 변질시켰고, 생명과 직결된 필수의료 현장을 지키던 인력들을 미용과 비급여 시장으로 빨아들이는 거대한 블랙홀이 되고 말았다.
이렇듯 처절한 시장 실패 경험에도 불구하고, 현재 추진되고 있는 ‘비대면 진료 및 약 배송 전면 확대’ 논의 과정을 보면 실손보험 도입 당시의 데자뷔를 보는 듯하다. 현재 민간 중개 플랫폼 업체들과 일부 경제 부처 및 스타트업 육성 관련 국회 연구모임 소속 인사들은 ‘혁신’과 ‘국민 편의성’을 내세워 비대면 진료의 대상 제한을 풀고 약 배송을 전면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플랫폼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민간 자본이 의료전달체계의 중심을 차지하게 되면, 국민의 의료 이용은 자본의 논리에 종속된다.
미국은 플랫폼 기업이 이미 보험사-의료기관-제조유통사-약국을 입맛에 맞게 소유해 함께 운영 중이다. 비대면 진료와 약 배송이 플랫폼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경우 환자와 의사, 약사가 대면하여 쌓는 근거와 신뢰 기반의 진료·복약지도는 플랫폼 화면 속의 ‘클릭’ 한 번으로 대체된다. 이는 필연적으로 의료 쇼핑을 부추기고, 상업적 목적의 과잉 진료와 고가의 검사·의약품 사용을 유발하며, 종국에는 심각한 약물 오남용으로 이어져 국민 건강에 직접적인 위해를 가할 것이다.
정보기술(IT) 이용이 어려운 부모 세대 등 보건의료 취약계층에게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대면 진료 기관과 약국은 하나둘씩 문을 닫을 것이며, 빠른 노령인구 증가 추세에 따른 의료비 급증의 영향을 간신히 버티고 있는 건강보험 재정에 더 큰 치명상을 입히게 될 것이다. 의료비와 약값이 저렴하고, 면적이 좁은 한국에서 비대면 진료와 약 배송 전면 허용에 따른 영향력의 크기는 미국 등에 비할 바가 아니라는 것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지점이다.
플랫폼 기업을 중심에 둔 비대면 진료 및 약 배송 전면 확대 정책은 국민의 생명과 직결된 보건의료체계의 근간을 흔들고 공공성을 훼손하는 위험한 질주이다. 통제되지 않은 자본의 논리가 보건의료체계에 개입할 때 얼마나 끔찍한 시장 실패를 초래하는지, 우리는 이미 실손보험이라는 값비싼 오답 노트를 가지고 있다.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보건의료 정책과 공공의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철저히 경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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