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무즈는 막혔는데 석유는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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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만에는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UAE), 쿠웨이트, 이란, 이라크, 카타르, 바레인 등 중동 산유국이 모여 있다. 이곳에서 생산된 원유는 호르무즈해협을 통해 세계로 운송된다. 2026년 3월 미국·이스라엘-이란 전쟁이 발발하자 이란은 호르무즈해협을 봉쇄했다. 하루 2천만 배럴의 원유가 통과하는 해협이 막히면서 세계 에너지 시장은 공포에 빠졌다. 비축유로 버티는 사이 전쟁이 끝날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다. 실제 봉쇄 직후 호르무즈해협을 통한 원유 운송량은 80% 이상 줄었고 국제유가는 폭등했다.
예상과 달리 전쟁은 7개월째 이어지고 있다. 호르무즈해협은 여전히 봉쇄 상태다. 그런데 해협을 통과하는 원유 운송량은 상당 부분 회복됐다. 에너지 데이터업체 케이플러(Kpler)에 따르면 호르무즈해협을 통과한 원유는 하루 평균 1350만 배럴에 달했다. 홍해를 통한 수송량까지 합치면 중동 지역 원유 수송량은 하루 1950만 배럴로, 전쟁 이전 기준선인 1700만 배럴을 웃돈다. 해협이 막혔는데 원유 운송량은 어떻게 회복됐을까. 공급이 회복됐는데 국제유가는 왜 떨어지지 않을까. 이 질문의 답을 찾는 과정에서 국제 에너지 시장에 깊숙이 자리 잡은 ‘그림자 선단’을 만나게 된다.
이란 감시 피하는 ‘호르무즈 셔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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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직후 중동산 원유 수송을 떠받친 것은 사우디아라비아와 UAE의 송유관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호르무즈해협 봉쇄에 대비해 페르시아만과 홍해를 연결하는 동서 송유관을 구축했다. UAE도 해협을 우회해 푸자이라항으로 연결되는 송유관을 만들었다. 이 송유관을 통해 하루 약 760만 배럴의 원유가 홍해와 오만만으로 운송됐다.
약 400만 배럴은 이른바 ‘호르무즈 셔틀’을 통해 해협을 빠져나오고 있다. 호르무즈 셔틀은 페르시아만에서 원유를 싣고 위험한 해협을 통과해 오만만까지 운송하는 유조선을 뜻한다. 오만만에 도착하면 장거리 운항 유조선에 선박 간 환적(Ship to Ship) 방식으로 원유를 넘긴 뒤 다시 페르시아만으로 돌아간다. 위험한 해협 통과 구간과 상대적으로 안전한 장거리 운송 구간을 분리하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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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무즈 셔틀’은 국제적으로 정립된 공식 선박 명칭은 아니다. 셔틀 선박은 이란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선박자동식별장치(AIS)를 끄고 해협을 통과한다. 선령 20년 이상의 노후 유조선도 활용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운항 정보가 불투명해 정확한 수송량을 파악하기 어렵다. 이런 식의 운항은 불법으로 볼 여지가 있다. 케이플러는 최소 63척의 유조선이 셔틀 운송에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했다.
호르무즈 셔틀은 비용도 많이 든다. 셔틀선과 장거리 운항선을 따로 투입해야 하고, 환적에 필요한 전문 인력과 예인선 비용도 발생한다. 위험한 해협을 통과하는 선박의 용선료와 전쟁 위험 보험료도 높다. 선원에게 지급하는 위험수당도 부담이다. 보도에 따르면 왕복 운항 비용이 약 4천만달러(약 537억 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흥미로운 것은 호르무즈 셔틀의 운송 방식이 ‘그림자 선단’에서 활용해온 운송 방식과 거의 같다는 점이다. AIS 송신 중단과 해상 환적은 제재 회피 선박에서 나타나는 특징이다. 일부 셔틀 유조선은 과거 그림자 선단에 속했던 선박으로 알려졌고, 선원과 운항 서비스를 공급하는 데도 그림자 선단의 네트워크를 활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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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재 대상국의 비공식 해상 운송망
그림자 선단은 미국과 유럽 등의 제재를 받는 국가들이 원유를 수출하기 위해 활용하는 비공식 해상 운송망이다. 대표적 국가가 이란과 러시아다. 2018년 미국이 이란 핵협정에서 탈퇴하고 최대 압박 정책을 시행하자 이란은 국영 유조선회사 등을 중심으로 우회 운송망을 확대했다. 유조선의 위치 정보를 조작해 이란산 원유를 다른 나라에서 선적한 것처럼 꾸미거나, 믈라카해협 인근에서 환적하는 방식이 활용됐다. 다른 원유와 혼합해 원산지를 숨기는 사례도 있었다.
그림자 선단이 본격적으로 커진 계기는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다. 주요 7개국(G7)과 유럽연합(EU) 등은 러시아의 원유 수출 수익을 제한하기 위해 가격상한제를 도입했다. 러시아산 원유에 배럴당 60달러 이상을 지급할 경우 서방의 해상 운송·보험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도록 한 것이다.
원유 수출길이 막히자, 러시아는 약 85억달러를 투입해 노후 유조선을 대량 확보하고 자체 운송망을 구축했다. 그림자 선단은 밀수업자들이 한두 척을 운영하는 수준이 아니다. 러시아 관련 그림자 선단은 1천 척 안팎으로 추산된다. 러시아의 원유·석유제품 해상 운송량은 하루 약 600만 배럴로, 이 가운데 55%인 약 330만 배럴을 그림자 선단이 운송하고 있다. 그림자 선단은 러시아산 원유 수출을 떠받치는 핵심 해운 인프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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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선단은 유조선만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위험한 항해를 감수할 선원을 모집하고, 선박을 관리하며, 급유와 환적을 지원하는 조직이 필요하다. 보험과 금융, 선박 정비 인프라도 갖춰야 한다. 서방에서는 제재 회피 수단으로 보지만, 해당 국가들에는 전략적 해운 자산이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서방의 제재를 피하기 위해 그림자 선단이 형성되고, 그림자 선단의 운영 방식을 서방에 원유를 공급할 산유국들이 활용하고 있다. 전쟁이 끝나더라도 제재가 곧바로 해제되고 기존 해운 질서로 복귀할지는 불확실하다.
한국 바다도 관련된 ‘그림자 선단’
그림자 선단은 한국과도 무관하지 않다. 최근 우크라이나는 한국에서 러시아로 석유제품이 운송된 사실을 문제 삼으며 대러 제재 기조에 어긋난다고 비판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2026년 7·8월 유조선 7척이 울산과 전남광주 여수 등 한국에서 석유제품 17만6천t 이상을 싣고 러시아로 향했다고 보도했다.
한국 정부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국제사회와 긴밀히 공조하며 대러 제재와 수출 통제를 일관되게 이행해왔다”며 “대한민국 관련 정책을 왜곡하거나 국제적 신뢰를 훼손할 수 있는 언급은 자제해주길 바란다”고 반박했다.
한국이 대러 제재를 무시하고 러시아에 경유를 수출했다는 것일까? 한국은 대러 전략물자 1402개 품목을 지정해 수출을 통제하고 있다. 그중에 경유와 항공유는 포함돼 있지 않다. 경유와 항공유를 수출했다고 해도 불법이 아니다. 심지어 한국은 러시아에 경유와 휘발유 등 석유제품을 수출하지도 않았다. 가디언의 보도는 허위일까? 아니다. 한국이 직접 수출하지 않았더라도 한국에서 러시아로 석유제품이 갈 수 있다. 바로 그림자 선단이다.

한국 정유사가 정상적인 무역상에 판매했다면 제재를 위반한 것이 아니다. 이후 해당 무역상이 어디로 기름을 보낼지 한국 정유사는 통제할 수 없다. 한국에서 석유제품을 싣고 러시아로 간 선박들이 그랬다. 한 선박은 울산에서 석유제품을 싣고 일본으로 간다고 하더니 러시아로 갔다. 또 다른 선박은 여수 앞바다에서 제재 대상 선박으로 환적했고 그 선박이 러시아로 갔다. 한국에서 출발한 화물이지만 한국이 공식적으로 수출한 것은 아니다.
한국이 국제사회와의 공조를 어겼다는 우크라이나의 비난은 과도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도의적 책임까지 무시할 수는 없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로부터 정유시설을 공격받아 석유제품 공급 부족에 시달렸다. 급하게 석유제품 수입을 늘렸는데, 러시아가 수입한 경유의 3분의 1이 한국에서 출발한 물량이었다. 규칙을 어긴 것은 아니지만 러시아의 경유 공급 부족을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다.
정상적인 글로벌 해운 생태계가 전부였던 국제질서가 변하고 있다. 제재를 피하기 위해 구성된 그림자 선단은 국가의 지정학적 자산이 되고, 중동 원유의 상당 비중이 그림자 선단의 운영 방식을 활용하고 있다. 한국 바다에서도 그림자 선단의 환적이 이뤄지고 국제사회의 의심을 받고 있다. 이런 변화가 전쟁이 끝난다고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서방의 제재망 밖에서 작동하는 선박과 무역상, 보험과 금융, 환적 인프라는 이미 상당한 규모를 갖췄다. 세계의 바다는 여전히 하나로 연결됐지만, 그 바다를 움직이는 규칙은 점점 달라지고 있다. 호르무즈해협은 막혔지만 석유는 멈추지 않았다. 대신 석유가 흐르는 방식이 바뀌고 있다.
권순우 삼프로TV 본부장 soon@3protv.com
권순우는 경력 15년의 현직 기자다. 금융, 산업 등 다양한 영역을 취재하며 생생한 현장을 전한다. 서강대학교를 졸업하고 ‘머니투데이방송’을 거쳐 현재는 삼프로TV에서 ‘압도적 권순우: 압권’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저서로 ‘격변과 균형’ ‘수소전기차 시대가 온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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