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로 썼는데 무슨 뜻인지···‘외계어 약관’ 해독하는 소비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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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털사이트에 가입할 때, 보험에 들 때, 신용카드를 만들 때, 우리는 ‘약관에 동의합니다’라는 버튼을 무심코 누릅니다. 약관에는 서비스 이용 조건부터 보험금을 받을 수 있는 상황, 계약을 해지하는 방법까지 중요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막상 읽어보면 뜻을 단번에 알기 어려운 문장이 적지 않습니다.
9일은 한글날입니다. 한글의 소중함과 쉬운 우리말의 가치를 되새기는 날이지만, 일상에서 접하는 약관에는 여전히 낯선 전문용어와 복잡한 문장이 남아 있습니다. 포털사이트와 보험사의 실제 약관을 살펴볼까요?
‘손해가 이용자의 귀책에 의한 경우라도 000의 귀책이 경합하는 경우에는 책임비율에 따라 이를 분담한다’
‘치석제거 치료보장개시일은 계약일부터 그 날을 포함하여 90일이 지난 날의 다음날로 한다’
첫 번째 문장은 ‘귀책’과 ‘경합’ 같은 낯선 법률용어 때문에 뜻을 바로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쉽게 풀면 ‘이용자의 잘못으로 손해가 생겼더라도 사업자 잘못이 함께 있다면 각자 책임 비율에 따라 손해를 나누어 부담한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 문장을 보고 보험금을 탈 수 있는 날을 계산하려면 계약일부터 90일을 센 뒤, 다시 그 다음 날을 찾아야 합니다. ‘계약일을 첫날로 쳐서 91일째 되는 날부터 치석제거 치료를 보장한다’고 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다른 약관에서도 ‘다음 날’ 대신 한자어인 ‘익일’을 쓰거나, 주어가 빠져있어 누가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 알기 힘든 경우가 많았습니다. 문장 자체가 너무 길어 이해를 방해하는 조항도 부지기수입니다. 다음은 국내 대형 통신사의 회원가입 약관입니다.
‘중요한 사항이 실질적으로 고객에게 불리하게 변경되는 경우 2개월 이내에 이용계약을 해지할 수 있음을 함께 고지하며, 고객에게 2개월 이내에 의사표시를 하지 아니하면 변경된 약관을 승인하는 것으로 본다는 뜻을 명확하게 고지하였음에도 해당 기간 내에 해지하지 않는 경우에는 승인한 것으로 간주한다’
이처럼 약관이 어려운 것은 단순히 읽기 불편한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손해가 났을 때 누가 책임을 지는지, 내 계좌에서 돈은 언제 빠져나가는지, 보험금은 언제부터 탈 수 있는지 등 소비자의 권리와 의무를 제대로 아는 것을 가로막습니다.
물론 전문용어를 써야 법적 의미가 정확해지는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관행대로 옛 문구를 그대로 가져다 쓰거나, 외국어 약관을 어색하게 번역하는 때도 여전히 많습니다.
사실 약관을 쉽게 쓰는 것은 기업의 당연한 법적 의무입니다. ‘약관의 규제에 관한 법률’ 제3조 제1항은 고객이 내용을 쉽게 알 수 있도록 약관을 한글로 작성하라고 규정합니다.
하지만 약관을 어렵게 썼다는 이유만으로 실제로 제재를 받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2021년 한글날부터 최근 5년간 공개된 공정거래위원회의 불공정약관 심의 목록을 살펴봐도, 표현이 어렵다는 이유만으로 제재한 사례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공정위는 표현의 가독성보다는 내용 자체가 소비자에게 부당한 불이익을 주는지에 초점을 맞춰 심사합니다. 기업이 져야 할 책임을 회피하거나 소비자의 계약 해지를 부당하게 막는 조항 등이 주요 심사 대상입니다. 문제가 발견되면 삭제나 수정을 권고하고, 시정명령을 내리기도 합니다.
공정위 관계자는 “약관을 이해하기 쉽게 쓰는 것은 기본적으로 지켜야 하는 의무”라면서도 “불공정약관 심사는 주로 법에서 금지한 약관법 제6조~제14조에 해당하는지를 판단해 이뤄지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결국 법은 약관을 쉽게 쓰라고 요구하지만, 어려운 표현을 바로잡기 위한 실질적인 관리나 제재는 여전히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명예교수는 “정부는 어려운 약관으로 인한 소비자 피해를 분석하고, 소비자가 문제 있는 약관에 문제를 제기할 수 있도록 캠페인을 벌여야 한다”며 “기업들도 약관을 만들기 전에 소비자가 어디서 어려움을 느끼는지 미리 피드백을 받는 등 자발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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