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그때 낙선했어야”…“어머니가 안 돌아왔다고요?” [금자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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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 국가권력에 의해 ‘프락치’로 몰려 구원받지 못한 채 북으로 간 국회의원들. ‘금자’는 소녀 금자의 시선을 따라 70년이 훌쩍 넘은 그 시간 속으로 여행을 떠난다. 대한민국 친위쿠데타와 내란의 기원을 마주한다. 월화수목금 연재.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제헌국회의원 선거를 했어요.”
그것은 아스라이 먼 과거다. 역사를 전공한 노학자가 10살 때 동네 벽에 붙은 선거 포스터를 본 일에 관해 말했다. 후보 중에서 ‘강욱중’이라는 이름을 기억한다고 했다. 그로부터 정확히 70년의 세월이 흐른 2018년, 그때를 떠올리며 신문 칼럼을 쓸 기회가 있었다. 그 짧은 회고의 글이 또 다른 인연을 부를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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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5월, 소년 이만열은 경남 함안군 군북면 덕대리 텃골이라는 마을에 살았다. 소녀 강금자는 서울 중구 명동 1가 10번지 4호에 살았다. 5·10총선거를 앞두고 남산초등학교 4학년 금자의 아버지는 자신의 고향인 함안으로 내려갔다. 아버지의 고향은 함안군 함안면 봉성리 중촌부락이었다. 당시 출산이 한 달도 남지 않았던 만삭의 어머니도 함께 내려가 지프를 타고 다니며 선거운동을 했다. 군북초등학교 4학년생 만열은 함안 전역을 휘감던 선거판의 들뜨고 고조된 분위기를 온몸으로 느꼈다. 78년이 흘렀다. 10살이던 소년과 소녀는 구순을 코앞에 둔 88살의 나이가 되었다.
국사편찬위원장(2003~2006년)을 지낸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가 제헌국회의원 강욱중에 대한 칼럼을 썼음을 우연히 알게 된 뒤 바로 연락을 취했다. 강욱중이라는 인물에 관해 좀 더 깊이 들어가 보고 싶었다. “칼럼에 쓴 거 이외에는 더 말할 게 없다”던 그는 강욱중 의원의 따님이 살아있고 본인과 동갑이라는 말에 흥미를 느낀 듯 함께 만날 수 있겠냐고 물었다. 나는 단골로 다니는 충무로역 인근의 카페로 두 사람을 초대했다. 바람이 선선해진 9월 초순의 어느날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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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살던 지역에서 열린 5·10총선거에서 당선되신 분이 어떻게 됐을까 관심을 가지면서 그 글을 쓴 거였죠. 강욱중 의원은 광복군 지대장 출신 이범석의 족청(조선민족청년단) 계열로 활동하다 (국회프락치 사건으로) 잡혀들어가고, 6·25사변 뒤 인민군 치하에서 납치돼 북으로 갔다고 알고 있어요. 제헌국회에서 개혁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다 그렇게 잡혀갔더만요.”(만열)
“저는 선거하는 줄도 몰랐어요. 당선 뒤 무슨 좋은 일이 있나 보다 했죠. 선거 치르고 서울로 올라올 때 함안 기차역 근처 노점상 물건들을 모두 팔아주셨다고 들은 기억이 나요. 원대한 꿈에 부풀어 계셨겠지요. 그때 낙선했어야 해요. 강씨 문중에서는 아직 나라가 안정 안 되고 어지러우니 2대 선거쯤 출마하라고 극구 말리셨다지요. 어머니는 강씨 고집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어요.”(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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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80대 후반이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각자 전철을 타고 약속장소를 찾아왔으니 놀랄 만한 일이다. 다만 이만열 교수는 지난 4월부터 한 주에 3일씩 신장 투석을 받는다고 했다. 최근에는 한쪽 귀가 안 들려 보청기를 끼어도 남의 말을 듣기 쉽지 않다고 했다. 이만열 교수가 강금자 여사의 말을 선뜻 이해하지 못할 땐 내가 중간에서 필담으로 의사소통을 도왔다.
“제가 강욱중 의원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사진으로는 굉장히 해맑은 얼굴이었어요. 따님이 연세가 드셨는데도 굉장히 얼굴이 흰데, 아버님과 닮으셨나 봐요.”(만열)
“(핸드폰을 꺼내며) 제가 아버지 사진을 보여드릴게요.”(금자)
“(핸드폰 속 사진을 보며)이보다는 좀 더 해맑고, 얼굴이 넓었던 거로 기억해요. 그런데 아버님은 (6·25 사변 뒤) 옥에서 나와서 집에 계셨나요?”(만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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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일러가 있는 지하실에 숨어계셨어요. 그러다가 9·28 수복되기 직전 북한 요원에 납치되셨어요.”(금자)
“어머니는 어떻게….”(만열)
“어머니는 남쪽 공안원한테 끌려가서 못 돌아오셨어요.”(금자)
“그러면 어머님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모르나요?”(만열)
“제가 초등학교 6학년 때 끌려가고 난 뒤 전혀 소식이 없어요.”(금자)
“아, 어머니까지…. 여기까지는 전혀 상상을 못 했어요. 역사 공부하는 나도 이런 사실은 까맣게 몰랐어요.”(만열)
이만열 교수는 내가 이전에 했던 질문을 이어나갔다. 끝내 돌아오지 않은 어머니는 국회프락치 사건에서 기록되지 않은 서사다. 2018년 칼럼에서 “내 고장 첫 국회의원에 대한 관심을 외면할 수 없었다. 북에서 생을 마감했다는 것도 정처를 잃고 떠돌아다니는 고혼(孤魂)에 대한 연민을 일으켰다”며 강욱중이라는 인물을 소환해 그의 공판 최후진술 등을 소개했던 이만열 교수는 어머니마저 사라졌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나 역시 이를 알지 못했다면, 강금자 여사 인터뷰를 시작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아드님과 따님들이 어떻게 살았어요?”(만열)
“거지같이 살았죠.”(금자)
“당시에는 북한에 그렇게 끌려가도 마치 월북한 것처럼 꾸미고 그랬을 텐데요. 이승만 치하에서 엄청 못살게 굴었을 겁니다.”(만열)
“오빠들이 취직을 못 했어요.”(금자)
“당연히 그랬겠죠. 사찰도 심하게 당하셨을 테고요. 저는 1980년 전두환이 정권을 잡은 뒤 4년 동안 대학에서 해직됐어요. 해직도 해직이지만 수시로 감시를 해요. 내가 없는데도, 우리 애들한테 전화해서 ‘아버지 뭐하느냐’ 이런 거 묻고. 그래서 그 형사한테 ‘왜 아무것도 모르는 애들한테 그런 걸 묻느냐’고 화를 낸 적 있어요. 그것보다 더하면 더했겠지요.”(만열)
“뭘 하려고 해도 신원조회가 안 되는 거예요. 김옥주 의원님 아들 김진원씨, 김병회 의원님 딸 김영자씨도 똑같았대요.”(금자)
“서울서 생활하셨는데, 6·25 때는 함안으로 내려갔습니까? 아버지 어머니가 없으니 오빠들과 함께 다 내려가지 않았나요?”(만열)
“오빠들과는 다 뿔뿔이 흩어졌어요. 남동생 세 명 데리고 부산 가려고 피난 가다가 중간에서 샜어요.”(금자)
“함안에 가지 않고요?”(만열)
“함안에 갔어도 안 될 뻔했어요. 먹고살 게 없는데요. 함안이 폭격으로 다 불타버렸잖아요.”(금자)

12살 금자는 1950년 1·4후퇴 때 남동생 세 명을 데리고 서울에서 꽁꽁 언 한강을 건너 부산 고모 집을 향하다가 우여곡절 끝에 아산의 보육원에서 7년을 지냈다. 부산에서 형제들이 만나 함안 할아버지 집으로 가자고 한 약속은 지키지 못했다. 12살 만열은 1950년 6월 전쟁 발발 뒤 동생 두 명을 데리고 결혼한 누나와 사촌 누나가 사는 의령과 진영으로 피난지를 옮겨 다녔다. 금자는 7남매 중 셋째이자 유일한 딸이었고, 만열은 10남매 중 일곱째이자 장남이었다. 금자의 할아버지는 함안면에서 ‘강약국’을 운영하는 유명한 한의사였다. 만열의 아버지는, 그의 표현대로 “열댓 마지기 농사를 짓는” 중농이었다.
“의령에 있는 누나 집으로 피난을 가서 저녁에 쌀 구하러 가다가 저벅저벅 걸어오는 인민군을 만났어요. 인민군 장교가 위험하니까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어요. 의령 내에서 자형의 자형이 살던 합천 경계 지역으로 옮기기도 했는데, 거기서는 소 꼴을 먹이러 나갔다가 소를 인민군에게 빼앗겼어요. 그러다가 다시 사촌 자형이 있는 진양(현재 진주로 통합)으로 옮겼어요. 아버지와 함께 함안에 남았던 어머니는 제가 잘 있는지 걱정돼 의령과 진양에 오시기도 했어요. 저도 양식을 구해야 해서 함안에 다녀가곤 했죠. 그런데 함안 집이 폭격을 맞아 불타고 파괴됐어요. 집을 뒤져 불타지 않은 보리쌀을 찾아내 끼니를 해결하곤 했어요.”(만열)
“함안 상공에서 비행기가 휘발유를 뿌렸다고들 했어요. 보육원에서 함안에 아무리 편지를 보내도 답장이 없었던 이유를 나중에 알았어요.”(금자)
“함안면은 평야 지대였고, 저희 집이 있는 군북면은 산 밑이었어요. 비행기가 완전히 내려오지 못하고 고공에서 소이탄을 쏘았어요. 그러면 집마다 불이 붙어가지고.”(만열)
“저희도 할아버지 집과 약국이 다 불에 탔어요. 제가 아산의 보육원에서 나와 함안으로 갔을 때는 집을 새로 지었지만 돈이 모자라 문을 못 달았어요. 커튼을 이렇게 쳐놓고 있더라고요. 거기서 한 2년 살았지만, 땅은 없고 할아버지 한약방은 불에 탔으니 수입원이 없어 고생했어요.”(금자)
“함안이 6·25 때 굉장히 중요한 지역인데 한국전쟁사에서 잘 안 다루고 있어요. 낙동강 전투하면 칠곡 다부동만 얘기하죠. 함안에 산이 많아요. 저녁에 헬리콥터로 산에 있는 미군들에게 물품을 공수하는 장면을 많이 봤어요. 그게 여항산인데, 워낙 처참한 고지전이어서 미군이 ‘갓뎀’(빌어먹을)을 연발해 ‘갓데미산’이 됐다고 해요.”(만열)
한국전쟁에서 ‘함안 전투’는 대한민국이 사멸하느냐 존속하느냐를 가른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북한군에서 가장 유능한 지휘관으로 꼽히는 팔로군 출신 방호산의 인민군 6사단이 충남과 호남을 우회하여 하동을 차지한 뒤 7월31일 진주를 점령했다. 이어 함안을 뚫고 마산(현 창원)으로 가려 했다. 함안이 뚫리면 마산과 김해를 거쳐 부산으로 진격할 수 있었다. 미군사령부는 영덕-왜관-남지(창녕)-함안-진동(마산)으로 이어지는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했고, 이때부터 함안에서 인민군 6사단과 미군 25사단과의 치열한 전투가 한 달 이상 계속됐다.* 미군은 민간인들에게도 무차별 폭격을 가해 민가가 불타고 희생자가 속출했다.**
함안에서 5·10선거와 불타는 전쟁의 현장을 지켜보았던 이만열 교수는 전쟁 기간과 그 후에 죽은 사촌 형들의 사연에 관해 말했다. 그는 큰 화를 겪지 않고 살아남아 마산서중과 마산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이어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에 입학해 교회사 연구로 석·박사까지 하고 숙명여대 강단에 섰다. 1980년 잠시 해직되기 전까지만 해도 평탄한 삶이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존경받는 역사학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내가 물었다.
“국회프락치 사건은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기자)
“국회프락치 사건은 제헌국회 당시 국회부의장 김약수와 노일환·강욱중 의원 등 소장파 의원들이 외국군의 철수와 남북회담 등 평화통일 원칙을 주장하자 이승만 정부가 이들을 수감해 재판에 넘긴 일이죠. 이들은 6·25로 서대문형무소에서 나와 대부분 납북되었어요. 이들의 주장은 남북협상의 효시였는데, 6·25가 그들의 주장을 묻어버렸죠.”(만열)
“대통령 이승만이 제헌국회를 파괴한 걸까요?”(기자)
“글쎄요. 분명한 건 민주주의자처럼 행세했지만 집권하고 난 뒤 그만한 독재를 한 사람이 없다는 거죠.”(만열)

1시간 남짓 짧은 만남이었다. 강욱중과 국회프락치 사건에 관해 특별히 새로운 팩트를 얻지는 못했지만, 함안에 뿌리를 둔 두 사람이 강욱중이라는 정치인을 기억하고, 전쟁이 파괴한 그 시절을 떠올리고, 공감을 나누는 자리로는 충분했다. 이만열 교수는 돌아오지 못한 강금자 여사의 어머니를 언급하며 “상상할 수 없는 일을 겪었다”고 위로했다. 강금자 여사가 그 위로를 받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였던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렇지 않은 긴 세월이 있었다. 그 세월의 단면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영화 한 편을 만나러 갈 시간이다.
<다음 회에 계속>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 ‘6·25전쟁사 3~10’(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2)
** 경남 미군폭격 사건(1기 진실화해위원회, 2010)
글쓴이 소개
사회부 기자. 베트남전 시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을 추적한 ‘베트남전쟁 1968년 2월12일’과 유해발굴을 통해 한국전쟁의 상흔을 드러낸 ‘본헌터’를 썼다. 그밖의 지은책으로 ‘유혹하는 에디터’, ‘굿바이 편집장’, ‘대한국민 현대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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