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코 이 집안을 이겨나갔어] 꿈 많던 소녀가 종갓집 며느리가 되기까지
경향신문 여성 서사 아카이브 플랫이 여섯 번째 입주자 프로젝트 ‘그러코 이 집안을 이겨나갔어’를 시작합니다.
2022년, “잘 봐, 언니들 인생이다”라는 캐치프레이즈와 함께 시작한 경향신문의 젠더기획 <우리가 명함이 없지, 일을 안 했냐>를 기억하시나요? 평생 일을 쉰 적은 없지만 번듯한 일이나 노동으로는 인정받지 못했던 6070 여성들의 노동사를 조명한 ‘명함 기획’은 독자와 함께 한 기획이기도 했습니다.
4년이 지난 올해 여름, 플랫팀은 “어떤 분이 명함 기획을 보고 할머니의 구술생애사를 썼는데, 내용이 참 좋았다”는 제보를 받았어요. 2002년생 손녀 이수영씨가 1945년생 친할머니 김정임씨의 생애를 묻고 기록한 구술생애사 ‘그러코 이 집안을 이겨나갔어’ 였습니다.
수영씨의 할머니인 정임씨는 그 시대 많은 여성들처럼 쉽지 않은 세월을 나름의 방식대로 굽이굽이 헤쳐나갔습니다. 60˙70년대의 농촌, 지금보다 더 견고했던 가부장제 속에서 정임씨는 때로는 순응했지만 때로는 결코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는 농촌을 떠나 도시로 상경하고, 가게를 열고, 가족을 돌보며 기어코 집안을 이겨나갑니다.
처음에 수영씨는 할머니의 구술생애사를 가족 안에서만 공유할 생각이었다고 합니다. 마음을 바꾼 건 ‘평범하지만 결코 평범해서는 안 되는’ 그 시절 여성들의 삶을 사회와 공유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수영씨는 “동시에 이 기록이 동시대를 살아온 여성들의 삶과 욕망을 이해하는 하나의 작은 참고자료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다”고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수영씨는 할머니의 뒤를 따라 걸으며 한 가지를 배웠다고 말합니다. 세상에 기록되지 못할 만큼 사소한 삶이란 결코 없다는 것을.
▶[우리가 명함이 없지 일을 안 했냐] “나쁜 일이 파도처럼 밀려왔지만 도망가지 않았다”
- 글 싣는 순서
●① 꿈 많던 소녀가 종갓집 며느리가 되기까지
○② 먹고 살기 위해 광주로, 그래도 끝나지 않은 며느리의 일
○③ “그 돈으로 우리가 산 거지”…가족의 생계를 짊어지다
○④ “내 인생도 인자 살아야제”…여든에도 꿈꾸는 ‘내 인생’
프롤로그 : 엎치락뒤치락… 45년생 할머니의 작은 분투
할머니의 삶이 궁금해진 건, 5년 전 경향신문의 젠더 기획 기사 <우리가 명함이 없지 일을 안 했냐>를 읽고 난 뒤였다. 농촌 여성들이 하소연할 곳 없어 들판에서 위로를 받고, 고된 시댁살이를 못 이겨 집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는 대목은 나에게 적잖은 혼란을 주었다. 그토록 외로운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때까지는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돈 한 푼 없어 결국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는 그들의 사정은 몇 번을 읽어도 눈시울을 붉히게 했다.
여성들의 희생이 그저 뒷바라지가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노동’임을 깨달은 순간, 우리 할머니의 삶이 처음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2022년 8월부터 2023년 7월까지, 약 두 시간씩 여덟 차례에 걸쳐 친할머니의 생애 이야기를 들었다. 학교생활로 인해 한동안 덮어 두었다가 그 뒤 2025년 몇 차례 다시 보충했다.
이 글은 손녀가 45년생 할머니의 생애를 묻고 기록한 구술생애사이다. 국민학교까지만 나오고 스무 살 초반에 시집을 가, 고된 시집살이를 하며 시부모를 모시고 자식을 키워낸 이야기. 흔하디흔한 삶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그동안 우리가 몰랐던, 한 번도 제대로 궁금해하지 않았던 이야기가 있다. 가부장제 아래에서 일과 가족관계를 오가며 한 여성의 마음과 욕망이 어떻게 달라져 왔는지를 들여다보고자 한다.
“내 원래 이름은 김정란, 학교 포기하고서는 꿈이 천지 차이로 바뀌었지”
(나는 전남광주특별시) 나주군 봉황면 덕림리에서 1947년에 태어났어. 내가 둘째여. 내 우게(위에) 오빠 한 명 있고, 밑에 여동생 3명에, 남동생 한 명 있어. 원래 내 바로 위에 언니가 있었는디 홍역 때매 갓난이 때 죽어부렀어. 두 살 차이였어. 그래갖고 내 호적이 그리 옮겨져부렀어(원래는 1947년 출생이지만, 이보다 2년 일찍 태어난 언니의 출생 날짜로 주민 등록되었다). 내 원래 이름도 김정란인디, 학교 가고서부터는 김정임(언니 이름)으로 불렸지.
할머니 김정란씨가 소녀였을 때. 이수영씨 제공
내가 열네 살에 국민학교를 졸업했는데, 우리 아버지가 딸들은 갈치면(가르치면) 안 된다 해서 중학교에 안 보냈지. 아버지 몰래 공장이라도 댕기면서 중학교에 댕겨 볼라고 광주 이모 집으로 혼자 올라 갔어. 그때만 해도 고등학교 다니면서 일할 데는 찾을 수 있지만, 중학생은 어디 일할 데도 없어. 근께 이모가 “어른들 허락 없이 된다냐. 다음에라도 학교 다닐 수 있으니까 그냥 집에 가거라” 그랬제. 분하고 억울해서 아주 미칠라 했어, 아주… 아버지가 워낙 엄해서 뭐라고 말해 볼 엄두를 못 내. 중학교까지만 나오더라도 여튼 뭔가 한 가지 꼭 해보려고 마음먹었는데….
학교 포기하고 집에 와서부터는 ‘대종손으로 시집가서 현모양처로 사는 것’, 그것이 꿈이었지. 그 시절은 집안일하고 청소하고 밥 해묵고 그것이 우선이여. 친정 엄마가 손재주도 좋고 뭐든 잘해. 어렸을 때부터 바느질이랑 길쌈(실을 내어 옷감을 짜는 모든 일)하는 법, 밥 해묵고 밑반찬 몇 가지 하고 그런 거 다 알려줬어. 여자로서는 그런 일들을 할 줄 알아야 한다고. 꿈이 천지 차이로 바뀌었지.
그런데 내가 열일곱 먹은 해에 엄마가 애기를 낳다가 돌아가셔 분거야… 애기도 나오다 죽어부렀고. 기가 맥혔제. 그 뒤로 인제 동생들 키우는 것이 내 일이 돼부렀지. 그때 내 밑으로 동생들이 넷이었어. 열다섯 살, 일곱 살, 네 살, 세 살. 아침에 일어나서 밥하고, 애기들 밥 맥이고, 학교 보내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남은 시간엔 수놓고… 동생들 내가 어쩌든이 이쁘게 키워야지 그런 마음뿐이었지. 엄마도 잊고…. 당연히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어.
한 번은 결혼하고 처음 친정에 엄마 제사를 지내러 갔어. 제사 마치고 다음 날 다시 시댁으로 돌아갈라고 한디, 동생들 둘이서 버스 타는 데까지 나를 쫄랑쫄랑 따라온 마다. 동생들이 그때 국민학교 2, 3학년인가 되었던가. 띠어 놓고 갈란께 동생들이 막 울면서 나 따라간다고 차에 오를라고 하는 거야… 하는 수 없이 내가 동생들을 차에서 밀어부렀어……. 동생들이랑 살 것인디 뭣 할라고 내가 시집을 왔을까….
“집에서 여자들이 하는 일은 일로도 안 쳐주고”
할머니 (김정옥씨)와 할아버지(이춘옥씨)의 결혼사진. 이수영씨 제공
스물두 살 때 친고모가 중매를 섰어. 얼굴도 한 번 제대로 안 보고 시집갔제. 남편 집안에서 ‘아들, 며느리 시골에다 농사짓게 안 한다, 어쩌든이 도시로 내보내겠다’ 항상 그런 말을 했나봐. 대장손인디다 도시로 나가 살 수 있다는 고놈에 나도 홀딱 반해부렀제.
시댁은 영암 금정인데 4대가 한 동네서 사는 거야. 전체 하면 한 4~50명 정도 돼. 명절 세제(쇠지), 가족들 생일 세제, 몇 년 걸러 차례로 시누들 여우제, 초상 치르지, 그러고 나면 또 삼년상 제사 지내지…. 무슨 대소사만 있었다하믄 몇 집 식구들이 싹 몰려왔어. 시골집도 큰 편인데, 방으로도 부족해서 마당에서 덕석(멍석) 몇 개를 펴야 밥을 먹을 정도야.
그란디 시어머니가 부엌에 나 혼자 딱 밀어 넣어놓고 맡겨 불드랑께. 그 무거운 밥상 한나(하나) 대신 갖다준 사람 없어. 정신없이 상 차려내다 보믄 난 밥 먹을 시간도 없어. 애기 보듬고 젖 맥여감서 밥 한 숟가락 막 뜰라고 하믄, 어른들 밥 다 드셨다고 물 갖다 드리고….
할머니 (김정옥씨)와 할아버지(이춘옥씨)의 결혼사진. 이수영씨 제공
한겨울에는 찬물로 그 많은 그릇을 시치면 손등이 쩍쩍 벌어져 갖고 피가 나. 고무신 신은 발도 꽁꽁 얼었지. 그래도 시누는 양재 학원 댕긴다고 털신을 사주고, 내가 하는 것은 당연한 걸로만 생각하고…. 작은 집 동서도 설에 시아버지한테 세뱃돈을 받았는데, 나는 세뱃돈 한 입 못 받아봤어. 너무 서러운 거야. 천 원짜리 몇 개만 줬더라도 내가 그 고마움을 알 것인디….
또 막상 시집가니까 밖에 나가들 못해. 친정도 많이 가야 일 년에 두 번이나 가는 정도제. 그렇게 한 3년 살다가 느그 할아버지가 광주 방직 공장 입사 시험에 합격했어. 내 속으로는 얼마나 좋았겄어? 그랬는디 시어머니는 아주 초상난 집만이로 울어제껴. “아들 못 보낸다고, 느그 없이는 절대 못 산다고.” 그 말 듣고 느그 할아버지가 딱 주저앉더니 못 가겠다고 하는 거야…. 세상에 그 합격장조차 어디 감추고 나한테 안 보여줬어.
결혼한 해에 시누이들과 친정 고모네 딸들과 찍은 사진(첫 번째 줄 가운데가 할머니). 이수영씨 제공
그때 내가 마음을 먹었지, “내 자식들만큼은 하늘의 별 딴 놈이라도 죽어도 장손 며느리로 안 줘야지.” 그때부터 가심애피(가슴앓이, 화병)가 와부렀어. 한마디로 신경성 위장병이제. 시어머니도 가슴애피가 있었는디, 내가 시집 와서 그 병을 낫게 해줬다고 소문이 났대.
시할아버지, 시할머니 돌아가신 뒤부터는 농사일을 했어. 밭이 1,200평이나 됐는데, 시어머니하고 둘이서 그 밭 매고 가꾸느라고 밥만 먹으면 거그서 살았제. 그래도 농사일이 더 나았어. 집에서 반찬 만들어갖고 상 몇 끼씩 차려 낼라면 그것이 더 힘들어. 그렇게 해도 집에서 여자들이 하는 일은 일로도 안 쳐주잖아. 차라리 들에 가서 일하는 게 더 편하더라고.
“내 속으로는 인제 더는 안 낳기로 해놨는디…”
시골집에서 설거지하는 할머니, 4대가 한 집에서 살았다 . 이수영씨 제공
느그 작은아버지는 사실 더 이상 애기 안 낳을라고 했다가 낳게 된 거여. 셋째까지 낳고는 어른들 모르게 병원 가서 루프를 끼웠거든. 그런디 어른들 입장에서는 아들 한나 죽어불면 손이 끊어진다고, 아들 하나 더 낳으면 쓰겄다고 계속 그래.
그래갖고는 시어머니가 당골(무당)을 데려다가 저녁 내내 징 뚜들고, 한복도 내놓으라 해서 불 꼬실라 불고…. 내막은 모른 채 저렇게까지 해싸니 더 이상 안되겠더라고. 결국 루프를 빼부렀어. 그래갖고 느그 막둥이 작은아버지를 임신했어. 어른들한테는 그냥 굿 했은께 임신한 것 같다고 그렇게 말해부렀제.
(할머니가 기억하는 ‘피임 홍보’는 당시 실제 국가적인 열기였다. 1962년부터 경제개발을 위해 시작된 가족계획사업은 70년대에 이르러 민간단체까지 “나라사랑 피임으로”라는 슬로건을 내걸 정도로 범국민적인 운동이 되었다.)
옷 보퉁이를 싸던 날
1975년 즈음 시가 식구들과 명절날에 (윗줄 왼쪽 네 번째가 할아버지, 아랫줄 두 번째가 할머니 본인 ) 이수영씨 제공
그렇게 참고 살다가 한 번은 정말 집을 나갈라고 옷 보퉁이를 싼 적이 있어. 어느 날 시어머니한테 저녁밥 해서 차려드렸는디, 술 취해갖고 악을 씀서 “홀애비 딸”이라개. 아무리 술 취했어도 할 말이 따로 있지….
느그 막내 고모가 두 살 땐디, “나는 네 부모가 아니다” 하고 밀어 불고 나왔어. 그때 새벽에 나갈라고 동네 당고모(아버지의 사촌 누이) 집으로 가만히 들어갔어. 그런데 그 고모가 가족들한테 다 말을 해분 거야. 그래서 할 수 없이 다시 집으로 돌아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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