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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October 4, 2026

계약서에 적히지 않는 기다림의 시간 [6411의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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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랜서 북디자이너의 일은 책의 디자인을 고민하고 구현하는 게 반이라면 나머지 반은 늦춰지는 일정들을 감내하고 기다리는 일이다. 김마리 제공
프리랜서 북디자이너의 일은 책의 디자인을 고민하고 구현하는 게 반이라면 나머지 반은 늦춰지는 일정들을 감내하고 기다리는 일이다. 김마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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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마리 | 프리랜서 북디자이너

오후 세시. 컴퓨터 앞에 앉아 있지만 불안한 마음이 가시지를 않는다. 디자인 시안을 보낸 지 나흘째 되는 날. 메일함을 열어보고 닫기를 몇번이나 반복했다. 휴대전화의 문자 알림이 울릴 때마다 출판사일까 싶어 화면을 재빠르게 확인했다. 하지만 대부분 광고 문자였다. 그날도 아무 연락이 없었다. 나는 새로운 일을 시작하지도, 그렇다고 마음 편히 쉬지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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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꼴을 만드는 사람, 북디자이너. 책상 위에서 컴퓨터를 마주하고 보내는 시간이 가장 길 것 같지만 가장 오래 하는 일은 디자인이 아니다. 기다리는 일이다. 회사에서 10여년의 시간을 보낸 뒤 독립을 하고 처음 계약서를 쓰던 날을 기억한다. 계약이 성사됐다는 안도감보다는 다음 일은 언제 들어올까 하는 불안이 먼저 찾아왔다. 그때는 몰랐다. 독립은 내 일을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인 동시에, 내 뜻대로 할 수 없는 시간을 받아들이는 것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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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디자이너의 일은 책이 나오기 훨씬 전부터 시작된다. 원고를 읽고, 표지를 구상하고, 시안을 만들고, 편집자와 의견을 주고받는다. 디자인 시안을 보내고 나면 또 기다린다. 피드백을 기다리고, 수정 요청을 기다리고, 최종 결정을 기다린다. 출판이라는 일에는 늘 변수가 있다. 원고가 들어오는 날짜가 늦어지거나 수정이 길어질 수도 있고, 마케팅 일정이 바뀔 수도 있다. 한 권의 책은 수많은 사람의 시간과 판단을 거친 뒤 비로소 세상에 나온다. 그래서 일정이 바뀌는 일은 어쩌면 자연스럽다. 하지만 독립하고 나서 깨달은 것은, 일정이 바뀌는 순간부터 내 시간은 온전히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디자인 시안을 보낸 뒤 일주일이 지나도 연락이 없는 날이 있다. 수정이 필요한지, 출간이 미뤄진 것인지, 프로젝트가 잠시 멈춘 것인지 알지 못한다. 먼저 연락을 해야 할지, 조금 더 기다려야 할지 망설인다. 괜한 재촉이 될까 싶어서다. 그 기다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아니다. 새로운 일을 선뜻 시작하지 못하고, 다른 일정을 쉽게 잡지 못한다. 오늘 연락이 올 수도 있고, 내일 수정이 시작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컴퓨터 앞에 앉아 있지 않아도 마음 한편은 늘 작업을 향해 열려 있다. 쉬는 것도, 일하는 것도 아닌 상태. 언제든 다시 일을 시작할 수 있도록 삶을 잠시 대기 상태로 두는 시간이다.

회사 안에 있을 때도 기다림은 있었지만 어떤 사정으로 일정이 바뀌었는지 함께 공유했다. 기다림에도 맥락이 있었다. 독립한 뒤 이유도 모르고 기다리며 깨달았다. 프리랜서는 시간을 자유롭게 쓰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시간을 언제든 내어줄 준비를 하고 사는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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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프리랜서를 자유롭게 노동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출퇴근하지 않고, 스스로 시간을 선택하며 일하는 삶이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 그렇게 상상했다. 하지만 독립하고 나서 가장 자유롭지 못했던 것은 오히려 내 시간이었다. 언제 일이 시작되어 끝이 나고, 언제 다시 연락이 올지는 대부분 내가 결정할 수 없었다. 디자인보다 기다림에 더 많은 시간을 쓰는 날도 적지 않았다. 그 시간을 누구의 노동이라고 불러야 할까.

우리는 노동을 일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키보드를 두드리거나 회의를 하는, 결과물을 만드는 시간은 노동으로 인정한다. 하지만 독립 창작노동자의 하루에는 기록되지 않는 시간이 있다. 누군가의 결정을 기다리기 위해 자신의 일정을 비워두는 시간, 언제든 다시 일을 시작할 수 있도록 삶을 보류하는 시간이다. 그 시간은 계약서에도 적히지 않는다. 견적서에 포함되지 않고, 그러니 비용으로 계산되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그 시간은 분명 노동에 속해 있다. 한 권의 책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어느 한 사람의 의지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래서 더 자주 생각하게 된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면, 이 기다림은 누구의 몫일까.

책은 많은 사람의 손을 거쳐 완성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보이지 않는 시간도 함께 쌓인다. 나는 책을 디자인하지만, 동시에 누군가의 판단을 기다리는 시간을 살아간다. 그 시간은 완성된 책 어디에도 남지 않는다. 좋은 책은 좋은 디자인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서로의 시간을 노동으로 인정하는 감각 위에서 만들어진다. 창작노동자는 결과물을 만드는 사람인 동시에, 자신의 시간을 조금씩 내어주며 일하는 사람이다. 그 시간을 우리는 아직 노동으로 세지 않는다.

※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삶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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