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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October 24, 2026

낡은 간판 보러 거기를 간다고?…공간에 숨은 디자인의 비밀 [장주영 기자의 여책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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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빨리. 예나 지금이나 한국인하면 떠오르는 첫인상입니다. 여행지에서도 이 이미지는 유효합니다. 유독 한국인들은 유명 여행지에서 누구보다 빠르게 풍경을 훑고 그 누구보다 빠르게 다음 장소로 이동합니다.

보다 많이 여러 곳을 다닐 수 있다는 장점 뒤에는 현지에서만 볼 수 있는, 느낄 수 있는 그들만의 삶을 놓칠 수 있습니다. 무심코 지나친 간판과 골목에서, 뜻 모를 표식 등에서 일반적인 여행과 다른 깊은 여행을 누릴 수 있습니다.

모로코 오아시스 / 사진 = 언스플래쉬

모로코 오아시스 / 사진 = 언스플래쉬

박진배 작가의 ‘고농축 디자인 스토리’는 프랑스 파리의 지하철 입구, 미국 뉴욕의 공사 비계, 포르투갈의 푸른 타일 같은 도시의 색채에서 공간에 깃든 문화의 결을 읽어냅니다.

저자는 디자인의 눈으로 도시와 공간을 다시 읽는 여행을 전합니다. 좋은 공간은 화려한 겉모습이 아니라 사람의 생활과 기억을 담아내는 그릇이라고 책은 말합니다.

고농축 디자인 스토리
박진배 ㅣ 효형출판

사진 = 효형출판

사진 = 효형출판

가끔 거리를 지나다 오래된 간판에 시선이 머물 때가 있다. 그 간판 하나로 그 오래된 골목이 번쩍이는 쇼윈도보다 인상적인 상황이 벌어진다. 세월의 흔적이 묻은 간판 하나가 마음을 이끈 이유는 무엇일까. 그 공간에 쌓인 시간과 사람들의 취향, 그리고 눈에 잘 띄지 않는 작은 섬세함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힘일 것이다.

박진배 뉴욕 패션공과대학교(FIT) 교수의 책 ‘고농축 디자인 스토리’는 바로 그 매력을 찾아 떠나는 세계 공간 기행이다. ‘공간미식가’와 ‘공간력 수업’에 이은 공간 시리즈의 완결작으로 도시와 건축, 자연과 브랜드, 오브제와 공공디자인을 넘나들며 우리가 무심코 지나쳤던 풍경의 의미를 짚는다.

저자가 전하는 핵심은 명확하다. 디자인은 단순히 예쁜 것을 만드는 일이 아니라 공간에 깃든 문화의 결을 발견하고 이야기를 전달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프랑스 파리 / 사진 = 언스플래쉬

프랑스 파리 / 사진 = 언스플래쉬

프랑스 파리의 지하철 입구가 좋은 예다. 지하철역은 어디서나 이동을 위한 시설이지만 파리에서는 아르누보 양식의 장식적인 입구가 도시의 개성을 드러내는 상징이 됐다. 평범한 출입구에 디자인을 더하자 기능적인 시설이 여행자가 찾아가는 풍경으로 바뀌었다. 공간의 쓰임새는 그대로여도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에 따라 경험은 달라진다.

미국 뉴욕의 거리에서도 비슷한 장면을 만날 수 있다. 건물 공사 때 설치하는 비계는 대개 불편하고 어수선한 구조물로 여겨진다. 그러나 명품 브랜드들은 이를 독특한 시각적 장치로 활용해 도시 경관에 익살스러운 표정을 더한다. 가려야 할 대상을 오히려 새로운 볼거리로 만든 것이다. 기획과 디자인이 결합하면 불편한 공간도 매력적인 경험의 무대가 될 수 있다.

미국 뉴욕 / 사진 = 언스플래쉬

미국 뉴욕 / 사진 = 언스플래쉬

반대로 훌륭한 건축이라도 사람들의 생활과 어울리지 않으면 외면받을 수 있다. 저자는 건축가가 만들어야 하는 것은 시각적인 껍데기가 아니라 생활을 담는 그릇이라고 강조한다. 건축의 아름다움은 외관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곳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움직이고 머무르며 공간을 경험하는지까지 고려해야 비로소 완성된다.

이런 관점은 여행자가 풍경을 바라보는 방식도 바꾼다. 멋진 건물을 만났을 때 외관만 감상하는 대신 왜 그 자리에 그런 형태로 지어졌는지, 주변 환경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공간을 둘러싼 이야기를 알게 되면 익숙한 건축물도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책은 도시를 벗어나 자연이 빚어낸 풍경으로 시선을 넓힌다. 이탈리아 토스카나의 초원 발도르차, 스위스의 마터호른, 모로코의 오아시스 등 세계 곳곳의 장소를 살펴보며 아름다운 풍경이 자연의 선물만은 아니라는 점을 일깨운다. 오랜 시간 땅을 가꾸고 자연과 공존해온 사람들의 생활 방식과 문화가 풍경의 일부가 되기 때문이다.

포르투갈 포르투 / 사진 = 언스플래쉬

포르투갈 포르투 / 사진 = 언스플래쉬

브랜드를 다루는 대목에서는 공간 경험의 중요성이 더욱 선명해진다. 매장에 들어서는 순간 느껴지는 분위기, 제품을 감싼 포장을 풀 때의 설렘, 브랜드를 상징하는 색상과 소품은 소비자의 기억을 형성한다. 온라인 쇼핑이 편리해진 시대에도 오프라인 공간이 의미를 갖는 이유다. 물건을 구매하는 행위뿐 아니라 그 과정에서 경험하는 감각과 감정이 브랜드에 대한 인상을 결정한다.

저자는 공공디자인에도 주목한다. 포르투갈의 푸른 타일과 스페인 세비야의 노란색처럼 도시를 상징하는 색채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다. 지역의 역사와 문화가 오랜 시간 축적된 결과다. 도시 곳곳의 조형물과 작은 쉼터, 자투리 공간 역시 제대로 활용하면 일상에 여유를 더하고 여행자의 기억에 남는 장면이 된다.

스페인 세비야 / 사진 = 언스플래쉬

스페인 세비야 / 사진 = 언스플래쉬

물론 모든 공간이 사람을 환영하는 것은 아니다. 책은 특정 사람의 접근을 막거나 이용을 불편하게 만드는 ‘배제 건축’의 문제도 짚는다. 디자인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질문하는 순간, 아름다움의 기준은 외관을 넘어 사회적 배려와 공공성으로 확장된다.

책은 여행을 즐기는 사람에게는 풍경을 읽는 안목을, 공간과 디자인을 다루는 이들에게는 새로운 기획의 실마리를 건넨다. 책장을 덮고 나면 여행지에서 무심히 지나쳤던 건물과 간판, 거리의 색채가 다르게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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