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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nesday, September 23, 2026

마을 살린 책방이 폭우에 잠기자, 이번엔 마을이 책방을 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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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만의 폭우’ 피해를 입고 초토화됐던 경남 통영 ‘봄날의책방’에 보수 공사를 돕기 위해 모여든 자원봉사자들. 봄날의책방 제공
‘100년 만의 폭우’ 피해를 입고 초토화됐던 경남 통영 ‘봄날의책방’에 보수 공사를 돕기 위해 모여든 자원봉사자들. 봄날의책방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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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비탈에서 쏟아져 내린 흙더미를 말끔히 씻어낸 자리에 다시 말간 책장을 세우고 단정한 종이책을 차곡차곡 쌓았다. 지반이 깨질 정도로 거센 폭우가 지나간 곳에는, 다시는 재해에 맥없이 무너지지 않도록 단단한 외벽을 쌓았다. 작은 문도 곧 생긴다. “담을 쌓고도 대문을 두지 않는 것은/ 경계를 나누되 경계 없이 살자는 공동체의 약속”(강제윤 시 ‘대문과 담장’ 중에서)이지만, 다시는 비에 지지 않으려면 다른 도리가 없다.

지난달 17일 경남 거제·통영에 쏟아진 ‘100년 만의 폭우’로 쑥대밭이 됐던 통영 봉수골 ‘봄날의책방’이 23일 중간 정비를 마치고 재개점한다. 별안간 들이닥친 재난 이후 37일 만이다. 2014년 전혁림미술관 옆 폐가를 고쳐 출판사 ‘남해의봄날’과 함께 문을 연 뒤 12년 동안 흔들림 없이 지역의 문화 거점 구실을 해왔던 책방이 폭우와 산사태로 초토화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책을 사랑하는 이들이 입을 모아 탄식했다. 복구에 험난한 과정이 예상됐으나, 통영의 이웃들이 손을 모으고 전국의 독립 책방과 출판계가 마음을 모아 예상보다 빨리 독자들을 다시 만나게 됐다.

지난달 폭우 피해를 입고 쑥대밭이 된 경남 통영 ‘봄날의책방’ 현장. 봄날의책방 제공
지난달 폭우 피해를 입고 쑥대밭이 된 경남 통영 ‘봄날의책방’ 현장. 봄날의책방 제공

수해 사고 당일의 현장은 악몽과 같았다. 오랜만에 제주로 휴가를 떠난 길에 재난 상황을 알게 된 정은영 남해의봄날 대표는 부랴부랴 발길을 돌려 책방과 출판사가 있는 통영으로 되돌아왔다. “폭우가 지나간 자리는 참혹”했다. 1천만원어치 책이 흙탕물에 잠기고, 물에 잠긴 서가를 비롯해 책방의 집기들도 토사와 뒤엉켜 있었다. ‘이제 봄날의책방 그만하라는 하늘의 뜻이 아닌가’ 생각했을 정도다. 이웃들이 아니었다면 그 암담함을 이겨낼 수 없었으리라. 정 대표는 “펌프로도 배수가 되지 않는 상태여서 이웃들이 호스를 입에 물고 빨아들여 흙탕물을 빼냈고, 팔 걷어붙이고 바닥 청소까지 해주시더라”며 “첫날 그런 응급처치가 아니었다면 복구가 장기화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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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들만이 아니다. 전국 각지에서 ‘봄날’을 지켜내려는 손길이 답지했다. 이름도 밝히지 않은 자원봉사자들이 책방을 찾아 복구를 도왔다. 일면식도 없던 소설가 오현일씨는 “목수 일을 한다”며 책방을 찾아 사흘 내내 상주하며 서가 짜는 일을 도맡았다.

5천만원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복구 비용도 각계가 십시일반으로 모았다. 출판사 남해의봄날 책과 굿즈 등을 담은 ‘책바다봄 꾸러미’를 진행하자 삽시간에 1천여명이 모였다. 현장에서 남해의봄날 신간인 강제윤 시인의 시집 ‘바다도 숲의 안부를 궁금해하는데’를 박스째 주문해 가는 이들도 많다고 한다. 공사 기간에 지역 식당에선 책방 식구들에게 공짜 밥상을 차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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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만의 폭우’ 피해를 입고 초토화됐던 경남 통영 ‘봄날의책방’에서 보수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원래 책방에는 담벼락도 문도 없었지만, 수해 대비를 위해 벽을 쌓았다. 봄날의책방 제공
‘100년 만의 폭우’ 피해를 입고 초토화됐던 경남 통영 ‘봄날의책방’에서 보수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원래 책방에는 담벼락도 문도 없었지만, 수해 대비를 위해 벽을 쌓았다. 봄날의책방 제공

독립 책방들도 품앗이로 뜻을 모았다. 전국동네책방네트워크(책방넷)에서 수해를 입은 거제·통영의 책방 두곳을 위한 성금을 모았는데, 202개 명의의 개인·책방으로부터 1377만원이 모였다고 한다. 이대건 책방넷 회장은 “거제 ‘책방 연결’과 통영 ‘봄날의책방’에 각각 나눠 보냈다. 책방은 단순히 소상공인을 넘어서, 지역의 문화적 거점 역할을 하는 만큼 지켜내야 한다는 마음이 모인 것 같다”고 말했다.

재개점에 맞춰 ‘봄날의책방’은 다음달 1일 첫 행사로 김애란 작가의 북토크를 연다. 소설 ‘안녕이라 그랬어’로 통영시 문학상 수상차 통영을 찾는 김 작가 역시 책방이 겪은 어려움을 알고 “개런티는 받지 않겠다”고 고사했다고 한다. ‘재출발’을 축하하는 행사는 다음달 30일까지 이어진다. 10월1일부터 30일까지 책방 골목에선 ‘수해 복구 사진전’을 연다. 모두 이웃들이 찍어준 사진이다. 10월30일엔 포크 싱어송라이터 정밀아와 펜화를 그리는 이미경 작가가 책방을 찾아 축하 행사를 열 예정이다. ‘봄날의책방’을 아껴온 인연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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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도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왔지만 뜻밖의 인연들도 불현듯 찾아오니 버티고 살아갈 가치가 있는 게 아닌가.” 정 대표는 지난 한달여를 돌아보며 페이스북에 이렇게 적었다. 책방이 마을을 살리자, 마을이 책방을 살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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