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자하의 '말하는 전기밥솥'에 노르웨이 관객들 기립박수

입센상 수상 기념 '쿠쿠' 공연…밥솥들이 증언하는 한국 청년 수난사
구자하 "왜 서양 정전으로, 인간 관점으로만 세상 바라보나"
제작 참여한 밥솥 해커 "자기만의 역사적 시선 특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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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슬로=연합뉴스) 김계연 특파원 = 지난 26일(현지시간)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극장에서 국제입센상을 받은 연출가 구자하가 사진을 찍고 있다. 2026.9.28
(오슬로=연합뉴스) 김계연 특파원 = 27일 오후(현지시간) 노르웨이 오슬로 시내 왕궁 바로 앞에 있는 국립극장. 헨리크 입센의 작품을 아직도 공연 중인 고풍스런 무대에 한국 전기밥솥 세 대가 놓였다.
'IMF의 해'로 기억되는 1998년부터 약 20년간 한국 사회 풍경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영상이 끝나자 밥솥들이 서로 싸우기 시작한다. '하나'라는 이름의 밥솥은 밥만 할 줄 아는 보통 밥솥이지만, 나머지 둘은 말도 하고 노래도 부른다. 컬러 화면 LCD(액정표시장치)까지 장착한 '세리'는 자기 표현이 뚜렷하고 입도 험하지만 정작 밥은 못 짓는다.
국제입센상 수상 기념 '쿠쿠' 공연이 끝나자 700여명의 관객들은 일어나서 2분간 손뼉을 치며 환호했다. 수상자인 구자하는 밥솥들을 가리키며 '하나'와 '두리', '세리'에게도 박수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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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슬로=연합뉴스) 김계연 특파원 = 지난 27일(현지시간)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극장에서 구자하의 '쿠쿠' 공연이 끝난 뒤 관객들이 일어서 손뼉을 치고 있다. 2026.9.28
연출가 구자하는 전기밥솥과 하리보 젤리, 로봇 장어 같은 '비인간 공연자'를 배우 대신 무대에 세워왔다. 이날 공연에 앞서 만난 구자하는 비인간 공연자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에서 이론을 공부할 때 가졌던 고민에서 시작했다고 말했다.
"과연 인간만 배우가 될 수 있는가. 한예종에 있을 때부터 불만족스러웠고 꿈꿨던 거였어요. 세상을 이해하는 데 테크놀로지, 기계, 자연, 모든 게 중요한데 왜 인간의 관점으로만 세상을 보려고 하는지 의문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래서 로보틱 오브젝트 또는 비디오 속 캐릭터가 제 배우가 된다든지 하는 비인간 관점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키려고 했습니다."
구자하는 고등학교 때 연극반 활동을 했지만 지금도 연극을 "싫어하고 있다"고 거듭 말했다. 복합 매체로 공연 작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 들어간 한예종에서는 셰익스피어와 입센, 체호프 같은 서양 정전으로 세계를 바라보면서 인간만 연기하는 연극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는 이런 분위기에서 자기만의 작업 환경을 찾을 수가 없어서 2011년 유럽으로 떠났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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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입센상 홈페이지ⓒRadovan Dranga. 재판매 및 DB 금지]
실험적인 동시대 연극에 초점을 맞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예술대학의 다스아츠(DAS Arts)는 그의 구상에 딱 맞았다. 독일 베를린에서 전자음악을 하며 준비하다가 1년 만에 암스테르담으로 갔다. 여기서 영어 과외교사로 만나 친구가 된 잭이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얘기, 그의 발음을 턴테이블로 돌려가며 영어를 익힌 사연은 한국인의 영어교육 집착을 다룬 '롤링 앤 롤링'(Lolling and Rolling)으로 이어졌다.
"밥솥을 배우로 만들고 싶다. 노래도 했으면 좋겠다."
구자하는 '하마티아 3부작' 두 번째 작품인 '쿠쿠'를 구상하면서 해커 이델라에게 전기밥솥이 말을 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이델라는 당시 독일에서 자동차나 통신기기의 보안 취약점을 찾아내는 화이트 해커로 일하고 있었다.
입센상 시상식장에서 만난 이델라는 "처음에는 아이디어가 분명하지 않았다. 밥솥들을 무대에 올려 대화하게 만들자는 정도였다"며 "서너 가지 밥솥 모델을 해킹해 테스트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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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슬로=연합뉴스) 김계연 특파원 = 지난 26일(현지시간) 국제입센상 시상식이 열린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극장에서 구자하(왼쪽)와 전기밥솥 해킹을 맡은 이델라가 사진을 찍고 있다. 2026.9.28
'쿠쿠' 크레디트에도 이름을 올린 이델라는 "구자하가 특별한 건 모든 음악을 직접 작곡하고 자기만의 역사적 시선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는 점"이라며 한국에서의 경험을 다른 언어로 옮기면서 작품에 새로운 맥락을 부여한다고 평가했다.
'쿠쿠'와 '롤링 앤 롤링', '한국 연극의 역사' 등 하마티아 3부작은 모두 개인적인 경험에서 출발해 한국 사회를 들여다본다. 구자하의 관점에서 한국의 경제·언어·문화를 관통하는 열쇳말은 제국주의다. 하마티아는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에서 주인공을 파멸로 이끄는 치명적 결함 또는 판단 오류를 뜻한다.
1998년 처음 선보인 쿠쿠 밥솥은 작품에서 IMF 구제금융 이후 한국 경제와 노동자, 청년들의 수난사 속에 함께 성장한 브랜드로 꼽힌다. 청년들을 짓누르는 한국식 '압력사회', 입센상 심사위원회가 번역할 수 없는 단어라고 표현한 '고립무원'의 상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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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슬로=연합뉴스) 김계연 특파원 = 지난 26일(현지시간)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극장에서 열린 국제입센상 시상 행사에서 구자하의 작품 세계를 정리한 영상이 상영되고 있다. 2026.9.27 dada@yna.co.kr
관객들은 곧 춤이라도 출 것 같은 밥솥들의 노랫가락에 웃음을 터뜨리다가 IMF 당시 금모으기 운동이나 2016년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망사고 같은 한국 사회의 그림자를 비출 땐 놀랍다는 반응도 보였다.
오슬로에 산다는 독일인 관객 지뷜레는 기자에게 "작품의 메시지는 전부 이해했다. 그런데 한국에서 사회적 격차가 진짜로 그렇게 심각하냐. 지금 경제가 이만큼 좋아진 이유는 뭐냐"고 물었다.
구자하는 전위적 형식과 별개로 사회를 비추는 내용은 동시대 예술의 역할이자 필요 조건이라고 말했다. "우리 역사와 정치 문제에 기여하지 않거나 연결 지점이 없다면 과연 동시대 예술이 될 수 있는지 의문이었어요. 예술 자체가 가지고 있는, 우리 사회와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힘 자체가 정치적인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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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슬로=연합뉴스) 김계연 특파원 = 지난 27일(현지시간) 노르웨이 오슬로에 있는 왕궁 앞 도로에 국제입센상 현수막이 걸려 있다. 2026.9.28
그는 난생처음 연극을 보기 위해 암스테르담에서 벨기에 시골까지 3시간 운전해 왔다는 인도인 이민자 관객 얘기를 해줬다. 그러면서 예술의 계급주의를 타파하고 전혀 생각해보지 못한 세계와 형식까지 연극의 지평을 넓히는 게 예술가로서 자신의 열망이라고 말했다.
구자하는 지난 3월 입센상 수상자로 발표된 이후 많이 달라진 건 없지만 마음가짐이 더 무거워졌다고 했다. 경력 말년 공로상에 가까웠던 이전 수상자들과 달리 아직 다섯 번째 작품을 준비 중인 자신은 할 일이 한참 많이 남았다는 이유에서다. 내년 6월 초연을 목표로 만들고 있는 '본투비 K 투비 팝'은 K팝 팬덤의 정치적 힘, K팝 쇼비즈니스에 대한 생각을 담은 작품이다.
"K팝에 대한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사실 K팝에 대한 작업은 아닙니다. 우리 시대와 상태를 이해하기 위해서 K팝의 렌즈로 세계를 보려고 하는 거죠." 그는 처음으로 자신이 직접 연기하지 않고 인간과 '비인간' 퍼포머들이 무대에 선다고 귀띔했다.
dada@yna.co.kr
제보는 카카오톡 okjebo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2026년09월28일 08시00분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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