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하는 나라로 가느냐, 민주주의로 가느냐의 분수령 [금자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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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 국가권력에 의해 ‘프락치’로 몰려 구원받지 못한 채 북으로 간 국회의원들. ‘금자’는 소녀 금자의 시선을 따라 70년이 훌쩍 넘은 그 시간 속으로 여행을 떠난다. 대한민국 친위쿠데타와 내란의 기원을 마주한다. 월화수목금 연재.
“공판 기록의 의미에 대해 그레고리 헨더슨 교수는 뭐라던가요?”
“대한민국이 독재로 가느냐 민주주의로 가느냐 그 분수령이었던 순간들을 보여준다고 했어요.”
“재판에서 판사와 피고인들이 계속 ‘증제1호’에 관해 말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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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한이라는 여자가 음부에 감추어 운반했다는 암호문서가 증거물 제1호죠. 그것이 허술하기 짝이 없는 코미디극이었음을 증명한 사람이 바로 헨더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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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에 신이문역 부근 오피스텔에서 만난 김정기 한국외대 명예교수(86,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와 긴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았다. 인터뷰라기보다는 간단히 인사를 나누는 자리였다. 짧은 대화에서 김 교수는 그레고리 헨더슨(1922~1988, 터프트대 교수 역임)이 국회프락치 사건의 진실을 캐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고 말했다.
그 중심에 놓인 문서가 이 사건과 관련한 총 17차례(결심공판 3회 포함)의 공판기록과 법률분석보고서다. 1949년 당시 주한 미국대사관 삼등서기관으로 국회연락관을 지낸 헨더슨은 공판 때마다 한국인 직원 2명을 보내 전 과정을 기록한 뒤 결심공판 뒤엔 법률고문이었던 에른스트 프랭켈의 법률분석보고서를 덧붙여 미 국무부에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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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노일환·이문원·강욱중·김옥주·김병회 등 제헌국회의원 13명은 남로당 지령을 받아 외군철퇴 등을 촉구하는 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기소돼 재판을 받고 있었다. 오제도·선우종원 등 검사들이 내세운 가장 강력한 증거, 즉 증제1호(증거물 1호)는 1949년 6월16일 경찰이 개성역에서 체포한 정재한이라는 여인의 음부에서 나왔다는 암호문건이었다. 7명의 의원이 체포되기 일주일여 전이었다.
1988년 헨더슨의 갑작스러운 죽음 뒤 1992년 부인 마이어에게서 넘겨받은 그 공판기록이 없었다면, 김 교수가 이에 기초해 2008년 ‘국회프락치사건의 재발견 Ⅰ·Ⅱ’를 출간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김 교수는 이 책에서 “(공판기록을 통해) 당시 20대 중반을 갓 넘긴 젊은 외교관 헨더슨이 이 재판에 몰두한 신앙과도 같은 집요한 관심을 읽을 수 있었다”고 했다. 당시 대사관 내에서 상사였던 드럼라이트 참사관은 헨더슨의 이런 행동을 대단히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한다. 그런데도 그는 끝까지 기록을 멈추지 않았다.
김 교수는 영어로 돼 있는 공판기록과 법률분석보고서까지 2008년 별도 자료집으로 낸 ‘국회프락치사건 재판기록’에 그대로 실었다. 종이로 받은 문서라 대학생 아르바이트생에게 타이핑을 시키고 감수를 했다. 책에 인용된 부분 이외에는 한국어로 따로 번역문을 게재하지 않았다. 이걸 14년 뒤에 처음으로 번역한 이가 있었으니, 2기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이 사건을 조사한 경찰 출신 조사관 P다. P는 2021년 가을 위원회 내부의 반대로 조사개시가 불투명한 상황이었는데도 만약을 대비해 미리 전문 번역을 완료해놓았다.
번역된 공판기록은 12포인트 글자 크기의 한글 문서로 189쪽에 이른다. 나는 국회프락치 사건의 전개과정을 공부하면서 이 번역문을 유용한 참고자료로 삼았다. 불명확해 보이거나 어색한 문장이 있으면 영어 원문과 대조하며 보았다. 영어 원문에도 작은 오류가 적지 않았다. 법률분석보고서에서 피고의 고문 관련 발언을 인용하며 기재한 공판 차수는 죄다 어긋나 있었다. 이런 실수를 잡아내는 일은 묘한 성취감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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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광욱 판사 : (증제1호를 보여주면서) 이것이 박헌영에게 올리는 보고서인가요?
이재남 : 누가 그것을 썼는지, 얼마나 정확한지 모릅니다. 저와 관련된 사항만 압니다.
사광욱 판사 : 남로당으로부터 국회에서 외군철퇴 문제에 대해 논의하라는 지시가 있었습니까? 1949년 2월26일 그 지시가 있었나요?
이재남 : 남로당은 미군 철퇴만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남로당이 미군 철퇴를 위해 고군분투한 것은 사실입니다. 이문원이나 노일환의 동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남로당 활동은 늘 철군을 목표로 하고 있었습니다. (중략)
사광욱 판사 : 노일환과 이문원이 3월19일과 6월17일 유엔한위(유엔한국위원단, UNCOK)를 방문한 것은 정확히 남로당이 예상했던 것 아닙니까?
이재남 : 외군철퇴 문제는 우리가 전혀 모르는 새 의원들 사이에서 논의된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그들이 스스로 하겠다고 결정한 것을 이용했을 뿐입니다.
1950년 1월20일 열린 제12차 공판 기록 중 일부다. 주모자로 지목된 노일환 의원에 대한 신문이 끝난 뒤 검사는 남로당 중앙위원 이재남을 증인으로 요청했다. 그는 공작원 이삼혁(하사복·김사복과 동일 인물)의 상부였다. 이삼혁은 노일환 등 국회프락치 사건으로 구속돼 법정에 선 주요 의원들에게 돈을 줘 약점을 잡은 뒤 남로당에 가입하게 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이재남의 진술은 피고들이 유죄라는 검사의 주장을 결정적으로 흔들었다.
사광욱 판사 : 증제1호가 국회 안의 남로당 공작을 설명하고 있는데요?
이재남 : 진실에 어긋나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100% 정확하다고 보장할 수는 없습니다.
(판사가 증제1호를 읽는다)
이재남 : 저는 이 보고서에 관해 자세히 모릅니다만, 그 요지는 우리가 하려고 했던 것과 일치합니다. 우리는 노일환과 이문원이 기꺼이 우리 전선에 합류할 사람이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말한 것에 우리와 부합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의 영웅주의 또는 민중의 목소리가 그렇게 시킨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자신의 확고한 신념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들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유엔한위에 진언서를 전달하는 일이나 그런 비슷한 류의 일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국회에서 논의된 문제, 즉 국회에서 의결할 수 있는 문제만을 원했습니다. 노일환은 그렇게 할 수만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진언서의 전달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국회 활동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우리는 국회가 외군철퇴를 촉구하는 결정을 내리길 원했습니다.
사광욱 판사 : 이 보고서(증제1호)는 소수의 사람만 읽을 수 있는 많은 암호가 포함돼 있습니다. 북한으로 넘어가던 길에 개성역에서 입수했습니다.
이재남 : 신문에서 보기 전까지 이것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습니다.
판사는 정재한이라는 여인이 음부 속에 숨겨 운반하다 개성에서 체포돼 압수당했다는 암호 문건을 가리키는 ‘증제1호’를 강조했다. 이 문서엔 해표(解表), 1949년 3월분 국회 공작보고, 유엔한위에 진언서를 제출하는 투쟁보고서 등이 담겨있다고 했다.
실제로 공판기록 번역문에는 ‘증제1호’라는 말이 총 63번 등장했다. 판사가 언급한 횟수는 10번이었다. 판사는 재판 내내 증제1호를 보여주고, 읽어내려갔다. 남로당 간첩의 공작으로 국회 소장파 의원들이 남로당 프락치를 구성하고 남로당의 지령에 따라 외군철퇴 운동 등을 벌인 게 사실이냐며 피고인들을 압박했다.
이재남은 검사 쪽 요청으로 나온 증인임에도 결코 검사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진술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증제1호의 신빙성에 심각한 의문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1913년 고창에서 태어나 고창고보 재학 시절부터 항일 학생운동에 참여하다 옥살이를 하고 노일환과 함께 동아일보에도 몸담았던 이재남은 “노일환이 남로당 지령에 따라 행동하지 않았고, 결국 공작은 성공적이지 않았다”는 취지로 말했다. 또한 3월19일과 6월17일 각각 유엔한위에 낸 주한외군철퇴 촉구 진언서와 미군사고문단 설치 반대 서한에 관해서는 “우리들은 단지 그들이 하겠다고 결정한 것을 이용했을 뿐”이라고 했다. 국회의원들이 남로당 지령을 받아 진언서와 서한을 유엔한위에 냈다는 게 검사 쪽 주장이었다. 이런 가운데 고문을 받았다는 증언이 첫 공판 때부터 나왔다.
사광욱 판사 : 피고인이 그의(이삼혁의) 협박을 받고 당에 가입했다고 자백했다고 돼 있어요.
노일환 : 제가 고문을 견딜 수 있을 정도로 건강상태가 좋지는 않았던 탓에 거짓 자백을 했습니다.
(1949년 11월17일 1차 공판)
사광욱 판사 : 하사복(이삼혁·김사복과 동일인물)이 당신은 비밀당원이 될 테니 남로당 가입에 대해 염려하지 말라고 했나요.
이문원 : 아닙니다.
사광욱 판사 : 왜 위와 같은 내용을 헌병에 자백했나요.
이문원 : 고문당했기에 거짓 자백을 했습니다.
(11월18일 2차 공판)
김병회(6차 공판)·최태규(7차 공판)·황윤호(12차 공판)도 고문 때문에 거짓 자백을 했다며 증제1호를 인정하지 않았다. 1950년 2월4일 열린 제14차 공판에 검사 쪽 증인으로 나온 남로당 서울지부 국회잠입과 소속 정해근도 판사가 증제1호를 보여주며 “이런 양식으로 보고서를 작성하냐”고 묻자 “다른 양식을 사용한다”고 했다.
김정기 교수가 전한 그레고리 헨더슨의 말대로, 이 재판은 대한민국이 독재로 가느냐 민주주의로 가느냐를 결정하는 분수령이었다. 바꿔 말하면, 대한민국이 야만적인 고문이 일상적인 국가로 가느냐 마느냐를 결정하는 갈림길이었다. 사광욱 판사는 증제1호의 증거능력이나 피고들이 수사과정에서 고문당했다는 주장이 사실인지를 검증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다. 유족들의 증언에 따르면, 국회의원들은 필동 헌병대사령부 조사실에서 혹독한 구타와 물고문, 전기고문을 당했다. 이러한 고문은 20세기 말까지 수사기관의 관행이 되어 대한민국을 지배했다.
정재한 등 증제1호의 당사자들을 증인으로 불러달라는 노일환 의원 쪽 변호사의 요청은 판사에 의해 기각됐다. 정재한은 끝까지 나오지 않았고, 재판 중 다른 건으로 사형을 당했다. 오제도 검사는 “(그 증인들이) 이 재판과 상관없다”고 말했다. 검사가 이겼다. 그리고….

“공판기록 전문을 번역했던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이 이 오피스텔로 찾아왔나요?”
“네. 여러 번 와서 자문을 구했죠.”
“그레고리 헨더슨의 공판기록이 담긴 교수님 책을 보고 김옥주 의원의 아들 김진원 선생이 진화위에 진실규명을 신청한 거잖아요”
“그런 셈이죠. 헨더슨의 그 노력이 헛되지 않았어요.”
2기 진실화해위원회는 2025년 1월21일 뒤늦게나마 ‘1949년 국회프락치 사건’(신청인 김진원·김영자)에 대한 조사개시를 결정하고 3개월도 안 된 4월15일 제105차 전체위원회에서 위원 만장일치로 결정문을 통과시켰다.* 2기 진실화해위원회 활동 종료를 불과 한 달 남겨둔 시점이었다. 담당 조사관 P가 공판기록 번역 등 만반의 준비를 해놓은 덕분이었다. 위원회는 결정문에서 “진실규명 대상자들이 수사 중 자백을 강요당하며 고문을 당한 중대한 인권침해 사건”이라고 못박았다. 여기에 더해 후손들에 대한 인권침해까지 밝힌 진실화해위원회는 국가에 사과와 명예회복을 위한 적절한 조처를 권고했다. 그러나 증제1호에 대한 판단은 내리지 못했다. 이게 한계였다.
<다음 회에 계속>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 2021년 소위원회에서 국회프락치 사건 조사개시에 관해 강경한 반대 뜻을 밝혀온 국민의힘 추천 위원 C는 이날 전체위원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C는 2025년 1월21일 국회프락치 사건 조사개시 건 재심의 때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는 당시 윤석열 탄핵심판 대리인단에서 활동 중이었다.
글쓴이 소개
사회부 기자. 베트남전 시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을 추적한 ‘베트남전쟁 1968년 2월12일’과 유해발굴을 통해 한국전쟁의 상흔을 드러낸 ‘본헌터’를 썼다. 그밖의 지은책으로 ‘유혹하는 에디터’, ‘굿바이 편집장’, ‘대한국민 현대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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