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에 진실 알리니 하루 만에 ‘민중의 적’…연극 ‘에너미’ 26일 개막

광고
한 여성이 휴대전화를 들여다본다. 알림음이 쉼 없이 울리고, 댓글이 쌓인다. “진실을 알려줘 고맙다”던 반응이 어느 순간 “지역을 망치는 사람”이라는 비난으로 바뀐다. 뉴스 자막이 떠오르고, 실시간 채팅창은 폭주한다. 몇시간 전까지 지역사회의 기대를 한몸에 받던 여성이 이제 ‘민중의 적’으로 불린다.
서울시극단이 오는 26일부터 11월14일까지 서울 세종문화회관 엠씨어터에 올리는 연극 ‘에너미’는 헨리크 입센의 ‘민중의 적’을 재해석한 작품이다. 스코틀랜드 극작가 키어런 헐리가 2021년 현대적으로 각색한 것을 강훈구 작가가 번역·윤색하고 서울시극단 단장 이준우가 연출한다.
1882년 쓰인 입센의 원작은 온천 도시의 수질 오염을 발견한 의사 토마스 스토크만이 공익을 위해 사실을 밝히려 하지만, 도시의 지도자와 언론, 주민은 지역경제의 손실을 우려해 그를 외면하고, 결국 ‘민중의 적’이 되는 얘기를 다룬다. ‘에너미’는 140년 전 쓰인 오랜 갈등 구조를 유지하면서도 배경, 인물의 성별과 세대를 재배치했다. 배경은 쇠퇴하는 스코틀랜드 소도시, 온천은 대형 워터파크 리조트 ‘빅 스플래쉬’가 됐다. 주인공 커스틴 스토크만은 원작의 의사를 성별과 세대까지 달리해 재구성한 인물이다. 과거 확성기를 들고 개발 반대 시위를 벌이던 활동가였지만, 이제 고향으로 돌아와 친환경 리조트 사업을 제안하고 상임이사가 된 그는 개장 당일 아침 수돗물이 오염됐다는 검사 결과를 받아든다. 갈등한다. 딸을 둔 엄마라는 점이 그를 더 복잡하게 한다. 과거 신념을 위해 몸을 던졌지만 이제 자신이 지켜야 할 삶이 있다. 그의 언니인 시장 보니와의 갈등도 단순한 선악 대결이 아니다. 보니에게 리조트는 정치적 성과이자 주민의 일자리와 생계를 책임질 사업이다. 막대한 투자금과 일자리 1200개가 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 보니는 동생에게 침묵을 요구하며 대립한다.
광고

‘에너미’는 신문과 시민집회를 중심으로 전개되던 원작의 여론 형성 무대를 에스엔에스와 유튜브 라이브방송 등 오늘날 디지털 미디어 환경으로 바꿨다. 고뇌하던 커스틴이 오염 사실을 올리자 게시물은 순식간에 확산된다. 하지만 댓글과 영상은 사실을 잘게 잘라 새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커스틴은 순식간에 ‘정신병을 앓는 여자’ ‘일자리 1200개를 날린 배은망덕한 사람’으로 변한다. 그의 학력, 사생활까지 공격 대상이 되고, 화살은 딸에게까지 향한다. 진실보다 발화자 공격에 몰두하는 익숙한 풍경이 펼쳐진다.
작품은 채 24시간이 되지 않는 시간 안에 벌어지는 일을 다룬다. 강훈구 작가는 지난 6일 제작발표회에서 “진실을 밝히는 영웅에서 민중의 적으로 추락하는 이야기가 관객에게 더 속도감 있게 다가갈 수 있도록 집중했다. 2021년 각색본엔 없는 게 에스엔에스 댓글, 영상 등을 서라운드로 관객에게 다가오게 한 것”이라며 “관객이 그 공포를 직접 체험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광고
광고
과거엔 여론 형성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이제 뉴스보다 댓글과 영상이 빠르고, 사실 확인 이전에 수많은 사람이 자기 확신을 갖는 시대다. ‘에너미’는 바로 그 속도가 민주주의와 개인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묻는다. 이준우 연출은 “각자가 보는 세상이 너무 다르다. 너무 많은 분열과 혐오가 있는 요즘 에스엔에스나 미디어에 가볍게 던지는 말들이 섬뜩하고 무섭게 다가올 때가 있다”며 “내가 살아온 시간 자체가 파헤쳐지고 가족 등 모든 것들이 타인의 공격 대상이 되는 일을 겪어야 하는 커스틴 박사의 경험은 나조차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하고 무서울 것이라 생각하고 작품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이준우 연출은 라이브 방송과 실시간 채팅, 댓글과 뉴스 자막 등을 배우의 연기와 동시에 무대 위에 펼쳐놓을 예정이라고 한다.

주인공 커스틴 역엔 배우 문소리와 이봉련이 더블 캐스팅됐다. 문소리는 “제가 겪은 그런 (비슷한) 경험을 떠올리고 싶지 않다. 여기선 문소리 개인 일은 좀 덮어두고, 커스틴 역만 얘기하고 싶다”고 했다. 작품이 남 얘기 같지 않다는 것이다. “늘 고민한다. 내가 언제, 어떻게 말해야 하나. 또 어떤 주제에 대해 언급해야 되고, 말아야 되나. 이 모든 것들은 늘 고민의 연속이다. 앞으로도 사람은 크게 안 변하고 삶은 비슷한 방식으로 지속되지 않을까 싶다. 그때마다 저도 많이 상처받지 않고 제 말로 인해 다른 사람도 상처받는 일이 없기를 그저 바랄 뿐이다.”
KioskNews shows a cleaned-up reading view extracted from the publisher’s page — the original always lives on their site, not ou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