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이블에 앉을 건가, 메뉴에 오를 건가…한국 자강·공존 시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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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7월 일본 도쿄에서 일본 총리 가쓰라 다로와 미국 전쟁부 장관 윌리엄 태프트가 비밀리에 마주 앉았다. 미국은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를,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서로 인정했다. 그 방에 조선의 자리는 없었다. 넉달 뒤 을사늑약이 체결됐다. “테이블에 앉지 못하면 메뉴에 오른다.”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가 올해 1월 표현한 국제질서의 냉혹함은 지금도 그대로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미국의 베네수엘라·이란 침공과 그린란드 군기지·투자독점권 확보, 중국의 남중국해·대만 지배 야심이 세계를 무력으로 영토와 이득을 챙기는 약육강식의 시대로 밀어넣고 있다. 10년 뒤, 20년 뒤 세계는 어디로 향할까.
■ 여섯개의 세계, 두 갈래 길 핼 브랜즈 미국 존스홉킨스대 교수는 트럼프 이후 가능한 세계를 셋으로 나눴다. 미·중이 각자 동맹을 거느리고 맞서는 ‘두개의 세계’(신냉전), 강대국들이 세력권을 나눠 갖는 ‘다제국 세계’, 동맹이 무너진 홉스적 무질서 속 ‘각자도생의 세계’다. 그는 역설적이게도 신냉전을 “최선의 희망”이라고 했다. 바이든 행정부의 인도·태평양 정책을 이끈 커트 캠벨 아시아그룹 회장과 러시 도시 조지타운대 교수의 판단은 다르다. 이들은 다극화, 세력권 분할, 강대국 간 협조체제와 ‘중국의 부분적 우위’, 미국 중심의 ‘동맹 규모’ 등 다섯가지 시나리오를 제시했다. 이들은 중국이 미국의 두배에 이르는 제조업 역량, 구매력 기준 30% 더 큰 경제, 세계 최대 해군력 등을 갖춘 점을 고려할 때 ‘중국의 부분적 우위’가 현실화할 개연성이 높다고 봤다. 이를 뒤집을 해법으로 동맹 전체의 힘을 규합하는 ‘동맹 규모’ 전략을 제시했다. 미국과 동맹국을 합치면 구매력 기준 국내총생산(GDP)과 군사비가 모두 중국의 두배를 넘고, 세계 제조업의 절반을 차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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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진단을 포개면 여섯개의 세계가 나온다. 질서의 형태로 ①각자도생의 세계 ②세력권 분할 ③강대국 간 협조체제가 있으며, 미·중 역학 관계를 중심에 둔 ④중국의 부분적 우위 ⑤두개의 세계 ⑥동맹 규모에 기반한 미국 진영 우위가 있다. 중국은 시진핑 체제가 이어진다고 가정하고, 미국의 경로를 둘로 나눠 보자. 트럼프 이후에도 마가(MAGA) 계열 후계자가 거래주의를 잇는 경로라면, 동맹 체제가 사실상 무력화되면서 세력권 분할과 각자도생이 뒤섞인 가운데 ‘중국의 부분적 우위’가 가장 유력해질 수 있다. 민주당 정부가 동맹 규모 전략을 추진하는 경로라면, 힘이 비슷한 두 진영이 맞서는 신냉전, ‘두개의 세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 전략이 완전히 성공하고 중국이 과잉부채와 저성장, 인구 감소에 발목 잡히면 미국 진영이 확실히 앞설 수도 있다.
■ 미·중, 소강은 있어도 종전은 없다 미·중 경쟁은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숨 고르기와 격돌이 되풀이되는 용호상박이다. 부산(지난해 10월), 베이징(올해 5월), 워싱턴(올해 9월)으로 이어진 미-중 정상회담은 소강 국면을 보여준다. 그러나 지난 24일 정상회담에서 ‘무역전쟁 휴전’을 고작 두달 연장하는 데 그친 것 자체가 그 기반의 취약성을 말해준다. 2027년부터 2030년대 초반까지는 ‘취약성의 창’이다. 미국은 올해 11월 중간선거와 2028년 대선을 전후해 국내 정치 혼란에 빠질 수 있다. 시진핑은 2027년과 2032년 당대회에서 장기 집권의 시험대에 오른다. 미국은 경제적으로 여전히 앞서지만 아시아의 국지적 군사 균형은 불리하다. 이란전 여파로 탄약·미사일 재고를 다시 채우는 데도 3~5년이 걸린다. 그사이 중국은 남중국해·대만에서, 러시아는 유럽에서 미국의 동맹 체제를 시험할 수 있다. 트럼프·시진핑·푸틴 모두 팽창주의적 야심을 품은 지도자라는 점도 불안 요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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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를 20년으로 넓혀도 전망은 밝지 않다. 미·중은 기존 패권국과 신흥 강대국이 불신과 두려움 속에 충돌로 치닫는 ‘투키디데스 함정’에 이미 깊이 들어섰다. 두 강대국은 어느 쪽도 결정적 승리를 거두지 못한 채 분야와 지역별로 우위를 나눠 갖는 장기 교착에 빠질 가능성이 가장 크다. 그 교착은 평온한 대치가 아니라 소강과 격돌이 되풀이되는 치열한 패권 경쟁이다. 강대국의 힘은 궁극적으로 경제력과 군사력에서 나온다. 경제적으로는 2030년대에 중국은 제조업, 미국은 인공지능 연산, 금융에서 앞서며 경합하다가 2040년대에야 우위가 판가름날 것이다. 군사적으로는 2030년대에 세계 차원의 미국 우위가 이어지겠지만 아시아에서는 중국의 국지적 우위가 굳어질 수 있고, 2040년대에는 경제·기술력을 군사력으로 전환해내는 능력이 승부를 가를 것이다.
■ 한국의 생존방정식 독수리(미국)와 용(중국)이 맞붙고 곰(러시아)이 그 틈을 노리는 세계에서, 한국의 생존 방정식은 다섯가지 변수에 달려 있다. ‘생존력=초크포인트(관문)×자강×디리스크(위험완화)×관리된 공존×중견국 연대’다. 각 변수가 클수록 생존력은 높아지고, 하나라도 무너지면 전체가 흔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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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크포인트는 세계 경제에 없어서는 안 될 핵심 필수재이자 관문을 뜻한다. 이를 쥔 나라는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고, 그것을 생존과 번영의 지렛대로 삼을 수 있다. 우리의 초크포인트는 반도체, 인공지능 인프라, 조선, 원전이 될 수 있다. 메모리 반도체는 이미 그 위력을 과시한다. 삼성전자·에스케이하이닉스는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의 80% 이상을 차지한다. 인공지능 모델에서 한국은 추격자이지만, 인프라 구축과 응용에 필요한 전력기기와 제조업 암묵지에서는 따라올 나라가 많지 않다. 조선은 미국이 혼자서는 재건할 수 없는 해군력의 병목이고, 원전을 짓고 운영하는 역량도 병목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초크포인트만으로는 부족하다. 3500억달러 투자 청구서가 보여주듯, 흔들리는 제국은 동맹을 먼저 약탈하려 한다. 초크포인트를 협상력으로 바꾸려면 둘째 변수가 필요하다. 바로 자강이다. 중견·약소국은 늘 방기(버림받음)와 연루(원치 않는 전쟁에 끌려감)의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스스로 지킬 힘이 있어야 버림받지 않고, 끌려가지도 않는다. 자주국방력을 기르는 한편 전시작전통제권을 조기에 환수하고, 민수용 우라늄 농축 권한을 확보해야 한다.
셋째, 디리스크의 핵심은 에너지·원자재·식량의 해외 의존도를 낮추는 것이다. 지난해 원유의 70%를 중동에서 들여왔고, 그 대부분이 호르무즈해협을 지났다. 리튬·니켈·코발트의 해외 의존도는 100%, 희토류 소재·부품의 대중국 의존도는 90%를 넘는다. 가장 간과되는 목줄은 식량이다. 2024년 식량자급률은 48%, 사료용을 포함한 곡물자급률은 22%에 그친다. 2021년 요소수 대란이 보여줬듯 강압은 가장 사소해 보이는 품목에서 시작되고, 전쟁에 휘말리면 당장 먹는 것부터 걱정해야 한다. 수입처 다변화와 비축 확대, 국내 생산 기반 강화가 시급하다. 유럽연합(EU)은 핵심 부품을 한 국가에서 30~40% 넘게 사지 못하게 하는 규칙을 검토하고 있다. 의존도를 이 선 아래로 낮춰야 강압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넷째, 미·중 사이 관리된 공존이다. 목표는 한쪽에 줄을 서는 것도, 양쪽 사이 줄타기도 아니다. 원칙을 분명히 하되 사안별로 유연하게 대응하는 것이다. 미국과는 동맹이되 종속돼서는 안 된다. 연루 요구에는 국제법적 근거, 비전투 임무, 국회 동의라는 원칙으로 대응해야 한다. 중국과는 교류하되 공급망 장악력을 앞세운 강압을 견딜 대비를 해야 한다. 미·중 간 소강기에는 교류와 협력의 공간을 넓히고, 격돌기에는 원칙을 지키며 충격을 견뎌내야 한다.
마지막은 중견국 연대다. 독수리와 용, 곰은 방식은 달라도 언제든 포식자 본성을 드러낼 수 있다는 점에서 닮았다. 중견국 연대는 그 약탈을 제어하는 그물이다. 중견국·약소국의 운명을 두고 미·중, 미·러가 거래하지 못하도록 함께 막아야 한다. ‘중견국 연대’의 주창자 카니 총리는 9월22일 유엔 총회 참석차 찾은 뉴욕에서 연대가 “지리나 규모가 아니라 문제를 중심으로” 짜여야 한다고 했다. 우리도 유럽·일본·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호주) 등과 사안별 연대를 겹겹이 쌓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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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대한제국에는 초크포인트도, 자강도, 디리스크도, 공존의 기술도, 함께할 벗도 없었다. 그래서 강대국 거래의 흥정 대상이 됐다. 2026년의 한국은 다르다. 세계 인공지능 산업은 한국산 메모리 반도체 없이 돌아가지 않고, 미 해군 재건은 한국의 조선소를 필요로 하며, 한국산 무기는 16개국으로 팔려나간다. 그러나 이런 자산도 자강을 기반으로 쓸 줄 알 때에만 힘이 된다. 어떤 세계가 닥치든 빼놓을 수 없는 나라가 되고, 최악의 세계에서도 버틸 힘을 갖추며, 두 강대국 사이에서 원칙을 지키고, 비슷한 처지의 나라들과 어깨를 겯고 나아가야 한다. 그래야 121년 전처럼 남의 테이블에 메뉴로 오르지 않고, 제자리에 앉아 거래의 당사자가 될 수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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