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최전방 양구, 닫혀있던 비밀 공간을 깨웠다…비로소 허락된 말간 가을
가을은 어디를 가도 붐빈다. 이름난 단풍 명소마다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여유를 찾아 떠난 여행마저 서두르게 되기 일쑤다. 시선을 북쪽으로 돌려보면 풍경이 조금 달라진다. 강원도 최전방에 자리한 양구는 청정 자연 속에서 느긋하게 가을을 보내기 좋다. 금강산으로 향하던 옛길을 따라 걷고, 산으로 둘러싸인 해안분지와 잔잔한 파로호에 머물러보자. 자연에 안긴 미술관과 박물관에서는 양구의 예술과 문화를 만난다. 가장 한적한 쉼표가 필요한 이들에게, 양구가 가만히 답을 건넨다.
분단의 땅에서 만난 평화의 물길 - 두타연
청정 자연과 분단의 흔적이 어우러진 두타연.
한국전쟁 이후 반세기 동안 사람의 발길이 끊겼던 비밀스러운 공간이 있다. 민간인 통제선 안에 숨겨진 두타연이다. 무성한 숲에는 산양이 뛰놀고 맑은 물에는 열목어가 서식하는 청정 지역이다. 이곳에서 금강산까지는 불과 32㎞. 아침 일찍 양구를 출발해 내금강으로 소풍을 다녀오던 옛 주민들의 기억이 이 길에 아득히 남아 있다.
두타연은 엄격한 출입 절차를 거쳐야만 얼굴을 보여준다. 21사단 백두산부대 옆 ‘금강산 가는 길 안내소’에서 사전 예약 확인과 신분증 검사를 마친 뒤, 먼지 흩날리는 비포장도로를 10분간 더 달려야 두타연 탐방이 허락된다. 조각공원과 두타정을 지나 출렁다리를 거쳐 원점으로 돌아오는 ‘1코스 두타연 생태탐방로’가 인기다.
탐방로 초입부터 눈에 띄는 것은 역삼각형 모양의 지뢰 표식이다. 철조망 너머 미확인 지뢰지대가 이어지며 접경 지역 특유의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조각공원 너머 단풍 물든 산자락 아래로 전차와 견인포, 자주포가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이제 하천 옆 오솔길로 걸음을 옮겨보자. 우렁찬 물줄기 소리와 함께 두타연의 비경이 다가온다. 금강산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바위를 깎아내며 만든 높이 10m의 폭포. 그 아래 들어앉은 커다란 물웅덩이가 감탄을 자아낸다. 두타정에서 내려다본 물길은 신기하게도 한반도 지형을 닮았다. 분단의 경계선에서 자연이 조용히 건네는 평화의 메시지가 아닐까.
흙에서 피어난 순백의 아름다움 - 양구백자박물관
양구백자박물관의 <양구 백토, 천 개의 빛이 되다> 전시물.
두타연의 청정 자연을 가득 담았다면, 양구 방산면의 뜻밖의 명물을 찾아가보자. 단아한 멋을 자랑하는 ‘백자’다. 방산면은 고려 후기부터 도자기 생산지로 주목받았다. 조선시대에는 왕실 백자를 만드는 원료를 공급했다. 양질의 백토와 수입천의 물, 땔감이 될 숲에 수운까지 갖춰 도자기 생산과 운반에 유리했다. 양구 일대서 발굴된 40기의 가마터가 화려했던 역사를 증명한다. 양구백자박물관에서는 흙과 물이 빚어낸 백자의 역사와 가치를 살펴본다.
전시는 고려 말부터 조선과 근대에 이르는 양구 백자의 변천사를 따라 구성된다. 불순물이 섞여 누르스름하던 백자는 시대를 거치며 점차 맑고 정갈한 빛깔과 문양으로 발전해 나간다. 단아한 빛을 얻으려 한 장인들의 집념이 느껴진다.
이어지는 공간은 수장고다. 관람객이 직접 내부로 들어가 백자를 마주하는 구조다. 비밀스러운 보물창고를 들여다보는 듯하다. 대한민국 도예가 1000명의 손길로 탄생한 <양구 백토, 천 개의 빛이 되다> 전시는 작품 하나하나 뚜렷한 개성과 웅장한 기운이 어우러져 연신 사진을 남기게 된다. 360도 파노라마 대형 스크린으로 백자의 이야기를 몰입감 있게 전하는 영상실도 놓칠 수 없는 볼거리다.
박물관 야외로 나서면 도자기 조형물과 함께 산책로가 이어진다. 붉은 담쟁이덩굴이 건물 벽면을 감싸고, 하얀 줄기의 자작나무와 알록달록한 단풍이 수놓인 야외 정원은 공간 전체를 자연의 품으로 끌어안는다. 정원의 고요함을 누린 뒤에는 박물관 뒤편의 직연폭포까지 둘러보는 코스를 추천한다.
화폭에 담은 삶, 고향에 남은 예술 - 박수근미술관
화백의 소박한 예술 세계를 담은 공간 박수근미술관
양구가 사랑하는 화가 박수근. 그가 처음 그림에 발을 들여놓았던 고향 정림리에 박수근미술관이 들어서 있다. 겉에서 바라보면 건물 출입구가 한눈에 보이지 않는 독특한 구조다. 화강석으로 쌓아올린 외벽은 박수근 그림 특유의 거친 질감을 떠올리게 한다. 진입로를 따라 화강암 벽을 감아 돌아 들어가야 비로소 입구가 나타난다. 화가를 만나러 가는 여정이 짧고 가볍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 길 끝에서 만난 자작나무 쉼터와 개울은 박수근의 작품 ‘빨래터’를 그대로 재현해놓은 듯 포근하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독학으로 자신만의 화풍을 일군 박수근. 그의 예술 정신이 전시 공간마다 깃들어 있다. 서민들의 삶을 통해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표현한 그림은 담백하면서도 진솔하다. 사진이 귀하던 시대의 풍경을 전하는 소중한 기록이기도 하다. 물감을 여러 번 덧칠해 화강암 질감처럼 만들어내는 마티에르 기법은 작품에 독특한 개성을 더한다.
박수근 라키비움에서는 ‘농악’ ‘빨래터’ 등 그의 대표작을 스크린에 구현한 실감형 콘텐츠를 선보인다. 현대미술관과 박수근 파빌리온으로 걸음을 옮기면 미석예술인촌 기획전 <예술가의 창>을 만날 수 있다. 관람을 마친 뒤에는 야외 산책로로 향해보자. 곱게 물든 단풍과 자연에 녹아든 건축물의 조화가 근사하다. 의자에 앉아 사색에 잠겨보는 것도 이 공간을 완벽하게 누리는 방법이다.
양구 가을 트레킹의 정수 - DMZ 펀치볼 둘레길
해안분지의 독특한 지형과 한국전쟁의 역사를 품은 DMZ 펀치볼 둘레길.
가을은 트레킹을 즐기기 좋은 계절이다. 비무장지대 속 해안면을 찾아보자. 한국전쟁 때 종군기자가 오목한 해안분지 지형을 보고 화채 그릇과 비슷하다고 하여 붙인 그 이름 바로 ‘펀치볼(Punch Bowl)’이다. 지명에 얽힌 전설도 흥미롭다. 습한 기운 탓에 뱀이 들끓어 주민들이 고통받자, 한 스님의 조언으로 돼지를 키우기 시작하면서 뱀이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바다 해(海) 자 대신 돼지 해(亥) 자를 사용해 ‘해안(亥安)’이라 고쳐 불렀다.
오목한 해안분지를 오르내리며 조성된 DMZ 펀치볼 둘레길은 총길이 73.2㎞에 달한다. 오유밭길, 먼멧재길 등 저마다의 매력을 품은 4개 코스로 이어진다. 이곳은 군사시설 보호구역이자 미확인 지뢰지대가 분포해 있어 사전 예약을 거쳐야만 입장이 가능하다. 탐방 역시 등산 지도사의 가이드에 따라 단체로 진행된다.
탐방객의 발길이 가장 많이 머무는 곳은 오유밭길이다. 난도가 낮고 전망도 좋아 부담 없이 걷기 좋다. 완만한 탐방로를 따라 걷다 보면 도솔산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도솔산은 한국전쟁 요충지이자 최대 격전지였다. 당시 해병대가 보름에 걸친 치열한 전투 끝에 승리를 거두며 도솔산을 탈환했다. 이 승리로 해병대는 ‘무적 해병’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오유밭길은 천연보호구역답게 지천으로 피어난 야생화와 야생동물의 생생한 흔적이 가득하다. 38선 이북에 자생하는 토종 잎갈나무 숲을 가로지르면 오유밭길의 하이라이트인 부부 소나무 전망대에 다다른다. 다정한 두 소나무 너머로 대암산 등 해발 1000m 이상의 고봉들이 펀치볼 분지를 감싸안은 풍경이 시원하게 내려다보인다. 단풍 물든 산자락과 굽이치는 돌산령 옛길도 눈길을 끈다. 문득 걸음을 멈추고 바라보면 계절의 소란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마을과 세상을 잇고, 가을을 품다 - 상무룡 출렁다리
파로호를 가로지르는 상무룡 출렁다리.
양구 가을 여정의 마침표는 상무룡 출렁다리다. 2022년 개통한 이 다리는 파로호 위를 335m 길이로 가로지른다. 발밑으로 파로호의 잔잔한 물결이 흐르고, 주탑 위에 올라서면 성주봉, 숫돌봉, 수리봉 등 알록달록 물든 단풍이 한눈에 담긴다. 노을이 찾아드는 시간, 호수와 단풍이 붉게 물드는 풍경은 단연 압권이다.
아름다운 풍경을 선사하는 동시에 주민들의 오랜 염원도 풀어준 공간이다. 화천댐 준공 이후 7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배를 타야만 읍내로 나갈 수 있었던 마을에 세상과 이어지는 단단한 다리가 되어준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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