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관 한 자리 200일째 공백…청와대 허찌른 조희대 앞날은

조희대 대법원장이 지난 22일 청와대의 대법관 후보자 재제청 요구를 거부하면서 올해 초부터 이어진 대법관 인선 갈등이 청와대와 사법부의 정면충돌 양상으로 번지고 있다.
청와대가 “대법원장의 제청권이 대통령의 임명권보다 우위에 있다는 인식은 헌법에 위배된다”고 반발한 데 이어 조 대법원장도 “제청 과정에 절차적 흠결이 있었다는 주장은 수긍하기 어렵다”며 재반박하면서다.
27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관 제청 갈등은 지난 1월 후보추천위원회가 노태악 전 대법관 후임으로 김민기·박순영 서울고법 고법판사와 손봉기 대구지법 부장판사, 윤성식 서울고법 부장판사 등 4명을 추천한 뒤부터 이어졌다.
조희대 대법원장은 반년 넘게 최종 후보를 제청하지 않았다. 최종 후보를 놓고 청와대와 사법부가 견해차를 좁히지 못한 탓이다.
대법관 제청 권한은 헌법상 대법원장에게 있지만, 청와대와 대법원장이 협의를 거쳐 최종 후보를 제청하는 게 관례다.
당초 대법원은 윤성식·손봉기 후보를, 청와대는 김민기·박순영 후보를 선호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대법원이 박순영 후보를 제안했지만 청와대가 김민기 후보를 요구하면서 이견이 계속됐다는 게 법조계의 설명이다.
양측 협의가 장기화하자 조 대법원장은 결국 지난 8월 18일 기존 관행을 깨고 손봉기 후보자를 이재명 대통령에게 서면으로 임명 제청했다. 대통령과 사전 협의를 거쳐 최종 후보를 제청하던 방식에서 벗어난 것이다.
청와대는 열흘 뒤인 8월 28일 손 후보자를 임명하지 않고 기존 후보 3명 가운데 한 명을 다시 제청해달라고 요구했다. 청와대는 손 후보자 제청 과정에 ‘절차적 완결성’이 충분하지 않았고 대법원 구성의 다양성 측면에서도 의문이 있다는 취지의 입장을 냈다.
사법부 안팎에선 조 대법원장이 이런 청와대 요구를 수용하기는 어렵고, 대신 후보자추천위를 다시 꾸려 새로운 후보군을 추천받는 방식, 즉 ‘새 판’을 짜서 재제청하리란 관측이 나왔다.
그러나 조 대법원장은 이달 22일 예상을 깨고 “재제청 요구에 응할 수 없다”는 입장을 냈다.
기존 후보들 중 재제청이나 새 후보자추천위 구성 모두 지금으로선 불가능하다고 한 것이다.
조 대법원장이 문제 삼은 것은 청와대의 재제청 요구에 대한 ‘헌법적 근거’다.
조 대법원장은 22일 “8월 28일자 재제청 요청 공문에는 재제청을 요청하는 구체적인 사유와 그 헌법적 근거가 적혀 있지 않다”며 “달리 재제청 요청을 정당화할 구체적인 헌법적 근거와 사유를 찾을 수 없다”고 밝혔다.
다음날에는 한발 더 나아가 청와대가 주장하는 ‘제청 과정의 절차적 흠결’도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했다. “공문의 문언상 명확한 근거와 사유가 제시돼야 헌법과 법률에 따른 절차를 진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청와대의 논리는 이와 정반대다. 대통령에게는 헌법상 대법관 임명권이 있고, 대법원장의 제청권이 대통령의 임명권을 구속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청와대는 대법원장이 제청한 후보를 대통령이 그대로 임명해야 한다는 취지라면 대통령의 임명권을 사실상 무력화하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다만, 청와대는 재제청 요청 당시 손 후보자를 임명할 수 없는 이유와 관련해선 뚜렷한 설명을 내놓지 않았다.
당시 강유정 청와대 수석대변인은 “소수자 및 사회적 약자의 인권 보호 등 대법원 본연의 역할을 고려해도 대법원 구성 다양화라는 국민적 요청에 부합하는지 의문”이라고만 밝혔다. 손 후보자가 왜 소수자나 사회적 약자의 인권 보호 역할을 할 수 없는 후보인지, 대법원 구성 다양화에 역행하는 인사인지에 대한 구체적 설명은 없었다.
헌법 제104조 2항에 따르면 “대법관은 대법원장의 제청으로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국가법령정보센터에 공개된 헌법 조항 역시 대법관 임명 과정에서 대법원장의 제청과 국회의 동의, 대통령의 임명을 각각 명시하고 있다.
문제 헌법에 대법관 임명 과정의 각 기관 권한은 규정돼 있지만, 대통령이 대법원장이 제청한 후보자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어떤 절차를 밟아야 하는지, 대법원장이 다시 후보자를 제청해야 하는지에 관한 구체적인 규정은 없다는 점이다.
대법관 인선 과정에서 대통령과 대법원장이 후보자를 놓고 의견을 교환하는 것은 오랫동안 관행으로 자리 잡아왔다.
헌법이 모든 세부 절차를 규정한 것이 아니라 각 기관의 권한을 나눠놓은 만큼 실제 인선 과정에서는 협의를 통해 접점을 찾는 방식으로 운영돼온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 ‘협의’ 자체가 작동하지 않고 있는 것. 청와대와 사법부가 헌법상 권한의 조화와 균형을 바탕으로 문제를 풀기보다 헌법상 공백을 근거로 각자 자신의 입장만 고수하고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이와 관련 한 법조계 관계자는 “헌법은 각 기관에 권한을 나눠주면서도 실제 작동 과정에서는 서로 협의하도록 만들어 놓은 것인데, 지금은 헌법의 빈틈을 두고 각자 자기 권한만 강조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조 대법원장의 이번 입장 발표 시점을 놓고도 여러 평가가 나온다.
조 대법원장은 지난 21일 청와대에서 열린 김성수 신임 대법관 임명식에 참석해 이 대통령을 직접 만났다. 당시 차담에선 대법관 재제청과 관련한 이야기는 주고받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후 이 대통령이 순방길에 올라 출국하자마자 다음날 곧바로 정면충돌로 비칠 만한 입장을 냈다.
한 일선 판사는 “법리적 측면에선 타당한 말일지 몰라도 정무적 차원에선 좋은 선택이었는지 의문”이라며 “대통령이 장관 인선과 진영 내부 갈등으로 수세에 몰리고 정책·비서실장 공백이 우려되며 해외에 있는 시점에 메시지가 나와 청와대 입장에선 불쾌하게 받아들였을 것 같다”고 했다.
일각에선 양측 갈등이 강 대 강 국면으로 치달으면서 내년 6월 조 대법원장 퇴임 전까지 노태악 전 대법관 후임 인선은 물 건너간 것 아니냐란 전망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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