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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September 18, 2026

“단죄되지 않은 5·18 학살, 또 다른 내란을 불렀다” [오월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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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통합시 주남마을 입구. 오른쪽 농원 앞에 5·18항쟁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광주통합시 주남마을 입구. 오른쪽 농원 앞에 5·18항쟁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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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길은 1980년 5월 광주항쟁의 흔적을 따라 걷는 66.2㎞의 길이다. 횃불, 희생, 광장, 열정, 영혼, 그리고 최근 추가된 ‘한강 작가 소년의 길’까지 6개 코스다. 길을 따라 주요 현장에 사적비를 세워 친절히 안내하고 있다. 광주광역시가 만든 스마트투어 앱 ‘5·18 민주화운동’을 따라 걸으면 편리하다. 5·18기념재단 홈페이지에도 오월길 안내 코너가 따로 있다. 광주에서 태어나 고교 시절 광주를 겪은 백기철 전 한겨레 기자가 오월길 이야기를 10여 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옛 전남도청에서 광주공원 광장까지 이어지는 오월길 희생 코스는 ‘주남마을 인근 양민 학살지’와 ‘광목간 양민 학살지’를 거친다. 두 곳은 광주 남쪽 외곽 지역으로, 광주에서 각각 화순, 목포를 잇는 길목에 해당한다. 1980년 5·18민중항쟁 당시 계엄군은 항쟁 확산을 막기 위해 광주 외곽을 모두 차단한 채 오가는 시민들을 상대로 무차별 살육전을 벌였다. 희생 코스 두 곳은 그 참혹한 학살극의 대표적 현장이다.

희생 코스 다섯 번째 사적지인 배고픈다리 일대에서 다음 사적지인 주남마을 양민 학살지까지는 4㎞ 정도 거리다. 걸어서 1시간 남짓이다. 차들이 씽씽 달리는 왕복 4차선 국도변을 걷는 대신 버스를 택했다. 증심천을 따라 10분 정도 걸어 나온 뒤 남문로에서 버스를 타면 주남마을까지 여섯 정거장이다. 주남마을은 나지막한 산들 사이로 자리한 평범한 전원마을이다. 마을 입구 오른쪽에 항쟁 사적비가 있다. ‘미니버스 총격사건 이야기’란 제목으로 당시 상황을 친절히 설명하는 만화 게시판도 만들어 놓았다.

계엄군은 5월21일 오후 광주 시민들의 저항에 밀려 허겁지겁 도청을 빠져나온 뒤 이곳으로 왔다. 27일 새벽 다시 도청에 진입할 때까지 소태마을, 녹동마을, 주남마을 인근에 머물며 광주와 화순 구간을 차단했다. 하나의 생활권으로 묶여 있는 광주와 화순을 오가는 이들은 이를 모른 채 접근했다가 속수무책으로 화를 당했다. 도로를 지나는 미니버스, 대형버스, 앰뷸런스 등이 계엄군에게 공격당했다. 큰길을 피해 산길을 넘으려던 이들은 매복한 계엄군에게 붙잡히거나 죽임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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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23일 오전 발생한 미니버스 총격사건은 당시 소태동 채석장 앞 도로에서 발생했다. 지금의 광주지하철 1호선 녹동역 삼거리 일대다. 베이지색 바탕에 빨간 페인트로 “전두환 처단하라”는 글씨가 쓰인 시민군 미니버스 1대가 도청을 출발해 소태동 채석장 입구에 도착한 때는 오전 9시30분께였다. 도로 양쪽 곳곳에 계엄군이 매복해 있었다. 운전자는 벽돌공장 운전원이었던 김윤수(26)였다. 일신방직 노동자였던 고영자(25)와 김춘례(18)는 같은 화순 출신이었다. 항쟁 발발로 공장이 문을 닫자 김춘례 집에서 함께 지내다 5월23일 김춘례 할아버지 제사를 계기로 화순으로 가기 위해 도청에서 이 차량에 탔다.

유일한 생존자인 홍금숙은 당시 춘태여상 1학년이었다. 버스에 같이 탔던 사람 중 박현숙(신의여자실업고 3학년)을 기억했다. 이날 오전 박현숙은 무등중 1학년이던 남동생 박대우를 데리고 집 앞에서 이 버스에 올랐다. 시내를 돌던 버스가 파고다빵 공장 앞에 가자 공장에서 빵 두 포대를 차에 실어줬다. 슈퍼마켓 앞을 지날 때는 주인이 수고한다며 음료수 한 상자를 선뜻 내줬다. 빵과 음료수를 먹고 난 후 버스가 사직공원을 거쳐 도청 앞에 도착했을 때 버스에 있던 무전기를 통해 “지금 관이 부족하다. 화순으로 가서 관을 구해달라”는 소리가 들렸다. 버스가 화순 방면을 향해 달릴 때 박현숙이 “저희 동생 좀 내려달라”고 소리치며 부탁하자 버스 기사는 마지못해 서방으로 차를 돌려 동생을 집 앞에 내려줬다. 박현숙은 동생에게 배를 하나 건네주면서 “이거 먹고 있어. 누나 금방 갔다 올게”라고 말하고 버스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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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버스는 오전 9시30분께 제11공수여단 62대대 4, 5지역대가 매복하고 있던 채석장 입구 삼거리로 들어섰다. 매복한 계엄군 중 한 명이 다가오는 버스를 향해 손을 흔들어 멈출 것을 요구했다. 무장 시위대는 총을 머리 위로 올렸고 여성들은 손과 손수건을 흔들었다고 했다. 그런데 산 쪽에서 총알이 날아와 운전하던 시위 대원이 가장 먼저 쓰러졌다. 이를 본 다른 시위 대원이 총을 쏘았지만 더 많은 총격만 당할 뿐이었다. 도로 주변에 매복했던 계엄군들이 일제사격을 했고, 버스 안은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생존자 홍금숙은 “엉덩이가 없어졌다”고 우는 박현숙과 “배가 아프다”며 울던 사람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총격 후 버스를 향해 포복으로 접근한 10여명의 군인이 엎드리거나 쪼그린 상태로 버스를 향해 10여발 총격을 가했다. 이어 3~4명의 군인이 버스로 올라가 다시 총을 쏘았고, 깨진 차창 밖으로 주검들이 던져졌다. 1차 수색 뒤 군인들이 부상 생존자 2명을 버스에서 끌어내렸고, 두 번째 수색차 올라간 군인들이 생존 여학생 홍금숙을 발견했다.

5·18조사위 2024년 보고서는 일제사격 후 계엄군이 버스에 올라 확인사살을 한 정황을 여럿 적어놓았다. 사건 후 여단본부로 이동한 정아무개 중사로부터 확인사살이 있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11공수 63대대 나아무개는 증언했다. 여고생 홍금숙이 처음에 사살당하지 않은 이유는 조그마한 체구가 의자 밑에 들어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계엄군이 버스 안에 생존해 있던 시민, 시민군을 향해 확인사살을 했다면 전쟁터에서도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잔혹한 반인륜 범죄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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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남마을 미니버스 사건이 더욱 충격적인 것은 남성 생존자 채수길, 양민석 2명을 계엄군이 연대본부로 이송한 뒤 현장에서 사살한 것이다. 한아무개 일병은 5·18조사위 조사에서 “부상자는 거의 사망 상태였다. 김아무개가 나서서 안락사시키겠다고 했다. 부상자들을 처리한 시각은 석양이 떨어질 무렵이었다. 헬기장 부근에 매장했다”고 진술했다.

주남마을 뒷산에서 억울하게 생을 마감한 두 청년은 모두 화순 출신이었다. 24살의 청년 노동자 채수길은 화순군 춘양면, 20살의 재수생 양민석은 화순군 도암면 출신이었다. 생존자 홍금숙은 양민석이 피를 흘리며 “살려달라, 어머니를 뵈러 집에 가야 한다”고 애원했지만 군인들이 쇠줄이나 포승줄로 손을 결박해 끌고 갔다고 말했다. 암매장된 두 사람의 주검은 9일 뒤인 6월1일 주남마을 뒤 저수지를 다녀오던 동네 아이들이 부패하는 냄새를 맡고 발견해 망월동 묘지로 옮겨졌다.

5·18조사위 보고서는 주남마을 미니버스 총격사건 탑승자가 애초 알려진 18명이 아니라 14명이라고 적고 있다. 여러 증언을 종합한 결과 생존 여학생 홍금숙, 11공수여단 본부 근처에서 사살돼 암매장당한 채수길·양민석, 그리고 버스에서 사망한 11명 등이다. 탑승자 14명 중 13명이 몰살한 것이다.

이 사건은 당시 신군부와 계엄군이 국민을 상대로 벌인 학살극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사방이 탁 트인 국도변에서, 그것도 백주대낮에 14명의 시민이 탄 미니버스를 향해 마치 전쟁영화에서나 볼법한 총탄세례를 퍼부은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외곽 봉쇄 작전 당시 계엄군은 자위권 발동으로 전시와 다름없다는 인식을 갖게 됐고, 1인당 560발의 실탄을 지급받았다고 했다. 미니버스가 일부 무장했지만 주변에 매복한 계엄군의 화력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또 버스에는 비무장한 여성들도 있었다. 버스에 탄 시민군을 항복시키고 생명에 지장 없이 체포할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벌집 쑤시듯 일제사격을 할 게 아니라 타이어를 펑크내는 등의 위협사격만으로도 얼마든지 미니버스를 굴복시킬 수 있었다. 당시 신군부 수뇌와 그 하수인 격인 현장 지휘관들이 국민의 생명은 안중에도 없이 얼마나 무도하게 국민을 짓밟았는지를 이 사건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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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남마을 뒷산 유령골에 세워진 ‘5·18 위령비.’
주남마을 뒷산 유령골에 세워진 ‘5·18 위령비.’

미니버스 사건은 또 국군이 적과의 전쟁 중에도 결코 용납될 수 없는 파렴치한 반인도적 범죄를 우리 국민을 상대로 저질렀다는 점에서도 충격이다. 전쟁 중에도 포로로 잡힌 부상자를 치료해 생명을 보호하는 것이 국제법적 의무다. 하물며 부상 당한 우리 국민의 목숨을 어떻게든 구하려 하지 않고, 즉결처분하듯 사살하고 암매장한 것은 천인공노할 국가폭력이다. 설사 두 청년의 상태가 극도로 위중했다면 더욱 서둘러 후송해 치료받게 해야 했을 일이지 현장 지휘관과 부사관들이 제멋대로 판단해 소중한 목숨을 끊고 내팽개치듯 암매장할 일은 아니었다.

미니버스 사건이 발생한 소태동 옛 채석장 입구에서 주남마을 입구까지는 600~700m 거리다. 버스에서 총격을 받고 다친 채수길과 양민석은 경운기에 실려 주남마을 입구까지 온 뒤 마을 뒷산의 유령골이라 불린 골짜기에 있던 여단본부까지 옮겨졌을 것이다. 마을 입구에서 유령골 쪽으로 올라가는 길은 위로 갈수록 좁고 가팔라진다. 두 젊은이가 계엄군 총에 맞아 암매장된 현장에는 이들의 넋을 위로하는 ‘5·18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위령비까지 가는 마을 길 중간중간에는 사슴을 그려 넣어 희생자들 넋을 위로하는 벽화가 보이고, 영령들을 기리는 시가 적힌 추모비들도 세워져 있다. 위령비는 마을 뒤쪽 상당히 외진 골짜기에 있다. 두 젊은이를 상징하듯 두 개의 두툼한 화강암 조각이 세워져 있다. 오른쪽 조각에는 ‘1980년 5월 광주, 피지도 못하고 짓밟힌 두 청년의 넋을 위로하며 작은 돌비를 세웁니다’라고 적혀 있다. 항쟁 30돌이던 2010년 5월 세웠다고 돼 있다. 위령비를 보고 있자니 을씨년스럽고 외진 이 골짜기에서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뒤 흙더미를 뒤집어쓰고 누워있었을 두 젊은이의 원통함이 느껴지는 듯했다. 왼쪽 위령비 조각에는 ‘주남마을 5·18위령비 건립추진위’라는 제목 아래 위원들 30명의 이름이 모두 적혀 있다. 정작 희생된 당사자인 채수길 양민석 두 젊은이의 이름은 없고 건립추진위원들 이름만 잔뜩 적힌 위령비가 왠지 어설퍼 보였다.

주남마을 양민 학살지에서 다음 사적지인 광목간 양민 학살지까지 이동 거리는 5km 정도다. 큰 도로변을 걷는 길이어서 버스로 이동했다. 주남마을에서 남광주역으로 다시 들어온 뒤 버스를 갈아타고 서문대로를 타고 내려가면 송암동 광목간 양민 학살지다. 버스를 내리니 정거장 바로 앞에 사적지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서문대로와 제2순환도로가 교차하는 큰 길가 주변이어서 표지석 말고는 항쟁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길 건너 예전 원제마을에는 아파트 단지들이 들어서 있다.

광목간 양민 학살지인 송암동 일대에서 벌어진 계엄군의 만행 역시 제11공수여단 짓이었다. 11공수는 주남마을 미니버스 총격 사건을 벌인 당사자다. 5월24일 오전 주남마을 일대에 주둔하던 제7공수여단과 제11공수여단은 경계 임무를 제20사단 61연대에 인계하고 광주공항으로 이동했다. 27일의 도청 재진입 작전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7공수는 헬기로 이동한 반면 11공수는 장갑차를 앞세우고 54대의 트럭에 분승해 이동했다.

24일 오후 2시께 11공수 병력이 송암동 효천 삼거리를 지날 때쯤 바로 직전 이곳에 도착해 있던 시민군 6명을 발견하고 발포했다. 그런데 이 일대에서 매복하고 있던 보병학교 교도대 병력은 발포한 11공수 병력을 시민군으로 오인하고 선두 장갑차를 향해 대전차 화기인 90㎜ 무반동총을 발사하고 일제사격을 가했다. 15분여 계속된 계엄군 간 오인교전으로 11공수 8명 등 군인 10명이 사망했다. 항쟁 기간 중 발생한 최악의 계엄군 피해였다. 오인교전 사실을 파악한 11공수 병력은 악에 받친 상태에서 일대 마을을 샅샅이 뒤져 시민군과 주민들을 무참히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11공수의 무차별 총격으로 원제마을 앞 원제저수지에서 멱을 감던 중학교 1학년 방광범(13)이 총상을 입고 그 자리에서 숨졌다. 효덕초등학교 부근 마을 어귀에서 친구들과 놀던 그 학교 4학년 전재수(10)도 총을 맞아 숨졌다. 총소리에 놀란 아이들이 뒷동산으로 도망치던 중 전재수의 검정 고무신이 벗겨졌고, 전재수가 뒤돌아 고무신을 주워들려는 순간 쏟아지는 총탄에 쓰러졌다.

11공수와 맞닥뜨렸던 시민군 일행은 6명이었다. 11공수가 도착하기 직전 10번 트럭을 타고 와 효덕초 앞에서 내렸다. 트럭 운전자는 적재함에 타고 있던 시위대 일행에게 빨리 내리라고 소리쳤고, 머뭇거리던 시위 대원들은 하나둘씩 내려 운전자로부터 카빈 소총과 실탄을 받았다. 차에서 내린 6명이 3명씩 나누어 도로 양쪽을 경계하는 임무를 받고 움직이려던 순간 “군인이 온다”는 마을 주민의 외침을 들었다. 장갑차와 트럭 행렬의 계엄군은 무장 시위대를 보고는 총을 쏘기 시작했고 시위대는 일제히 금당마을 민가로 숨어들었다. 오인교전 후 시위대원 수색에 나선 11공수 병력은 일대 마을들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주민들에게 무차별 발포했다.

5·18조사위 보고서는 금당마을에서 계엄군에 공격당해 인가로 피신했던 시민군 6명 중 한 명인 김종철(18)이 임의 처형됐다고 적고 있다. 김종철이 수색 과정에서 체포됐으며, 62대대 6지역대 선임하사관 강아무개 상사 등으로 추정되는 병사들에 의해 희생된 것으로 판단했다. 같은 집에 숨었다 체포된 박아무개는 계엄군이 자신과 최아무개 사이에 서 있던 김종철을 총으로 쏘았다고 말했다. 이아무개는 끌려 나온 뒤 자신의 뒤에 있던 김종철이 무릎 꿇고 앉은 채 총격을 받았다고 했다.

일성마을에서도 무고한 청년 3명이 계엄군 총탄에 스러졌다. 권근립(25)은 오후 3시30분께 계엄군의 총을 맞고 손가락 부분은 대검에 잘린 채로 사망했다. 같은 마을 청년 임병철(26), 김승후(19)도 함께 총살당했다. 4~5명의 공수부대원이 하수구 고랑으로 잡혀 온 사람들을 대검으로 찌르면서 가혹행위를 저질렀고, 얼마 후 한 장교가 잡혀 온 이들 등 뒤에서 소총을 쏘았다고 11공수 군수처 운영장교 강아무개는 진술했다. 희생된 세 사람은 이 마을에서 생업에 종사하던 이들로, 시민군 활동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

광주특별시 남구 송암동 광목간 양민 학살지 표지석.
광주특별시 남구 송암동 광목간 양민 학살지 표지석.

5·18조사위 보고서를 보면, 항쟁 기간 광주 외곽에서 희생된 민간인 숫자는 모두 64명에 달한다. 주남마을 일대에서만 21명이 희생됐다. 13명이 희생된 미니버스 피격 사건 이외에도 헌혈차가 피격되고, 트럭이 공격받고, 산길을 넘어가다 총격을 받는 등 무고한 인명들이 희생됐다. 광목간 송암·효덕동 일대에서도 20명이 숨졌다. 계엄군이 도로를 차단한 줄 모르고 접근한 차량이나 도보 이동자들이 많이 희생됐다. 광주 시내에서는 도청과 금남로 일대에서 62명이 숨지는 등 모두 88명이 희생됐다. 또 전남 지역 6명, 전북 지역 1명, 미상 7명이었다. 광주 외곽 희생자 64명은 광주 시내 희생자 88명에 못 미치지만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항쟁 기간 광주 외곽에서 계엄군의 어처구니없는 반인도적 범죄로 원통하게 숨져간 이들이 너무도 많았다.

5·18조사위는 2024년 6월 4년6개월여 간의 조사를 마무리하면서 주남마을과 송암동 민간인 집단학살 혐의자 9명을 검찰에 고발했다. 여기에는 두 사건에 직접적 책임이 있는 11공수여단의 여단장부터 장교, 부사관, 병사들이 포함됐다. 11공수가 이틀에 걸쳐 연쇄적으로 자행한 민간인 학살 범죄에 대한 형사적 단죄가 첫발을 뗀 것이다. 이와 함께 5·18조사위는 광주역 발포, 헬기 사격 및 지휘·왜곡 관련으로 당시 군 고위 장성 5명을 내란목적살인 등의 혐의로 고발했다. 모두 14명의 고위 장성과 장교, 병사들이 항쟁 이후 44년 만에 국가기관에 의해 추가로 고발된 것이다.

5·18조사위는 주남마을 사건과 관련해 최웅(준장/11공수여단장), 이제원(중령/62대대장), 최규진(소령/62대대 4지역대장), 정아무개(중사/62대대), 김아무개(하사/62대대)를 고발했다. 송암동 사건과 관련해서는 최웅 여단장 외에 김대벽(소령/61대대 작전장교), 강아무개(중위/여단본부 군수처 운영장교), 김아무개(하사/61대대), 이아무개(일병/61대대)를 고발했다.

5·18조사위는 두 사건을 단순 살인이 아닌, 국제형사법 상의 반인도적 범죄(민간인 학살) 및 집단살해 혐의를 적용해 공소시효 없이 처벌해야 한다며 관련자들을 검찰에 고발했다. 두 사건은 새롭게 실체가 드러난 게 아니라 대부분의 뼈대는 1995년 5·18특별법 제정 이후 검찰 수사 과정에서 드러난 상태였다. 검찰은 당시 두 사건 등과 관련한 살해죄, 상해죄 등 개인적 법익을 침해하는 범죄행위를 수사했음에도 기소 단계에서 이를 제외했다. 전두환 노태우 등 신군부 핵심 16명만을 반란 및 내란죄로 기소했다. 법원은 이에 따라 전두환 황영시 정호용 주영복 이희성 차규헌 최세창 등 신군부 수뇌 7명에게만 광주 유혈진압의 책임을 물어 내란 목적 살인죄를 적용했고, 살인 행위를 직접 자행한 광주 현장의 지휘관이나 병사들에게는 책임을 묻지 않았다. 1980년 광주에서 수많은 인명을 사상한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른 계엄군의 범죄에 대해 고작 고위 장성 7명만이 처벌된 것이다.

5·18특별법이 제정된 1990년대 후반의 정치적 분위기는 신군부 내란 수괴는 처벌하되 나머지는 묻어두자는 식이었다. 김영삼이 검찰 수사 단계에서, 그리고 김대중이 1997년 정권교체 이후 주도한 이 흐름이 당시 정치적으로는 효과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역사의 법정에서 보면 틀린 것이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1980년 광주에서 저질러진 잔악한 내란 및 살인 행위에 대한 총체적 단죄가 이뤄지지 않음으로써 오늘날 윤석열 내란수괴와 그 하수인들이 활개를 치듯 내란을 도모했다. 12·3 내란을 수사한 2차 종합특검이 마구잡이식 수사로 국민에게 피로감을 줬다거나, 계엄 및 내란 관련 실무·지휘 라인을 추가로 기소한 것이 무리라는 것은 정치적으로는 맞을 수 있다. 하지만 5·18 광주라는 역사의 렌즈를 통해 보면 2차 종합특검의 적극적 수사 및 기소를 마냥 탓할 수만은 없다. 5·18 광주에서 어긋났던 내란과 반인도적 범죄에 대한 단죄 행태를 또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그런 차원에서 5·18조사위가 항쟁 발발 44년만에 제기한 반인도적 범죄 혐의자들에 대한 단죄는 더는 늦춰져서는 안 된다.

희생 코스의 광목간 양민 학살지는 희생된 민간인은 물론 계엄군 병사들에게도 비극의 현장이다. 5월24일 송암동에서 발생한 계엄군 간 오인교전으로 군인 10명이 사망했다. 부사관 4명, 병사 5명이었다. 이들의 죽음 역시 억울하고 원통하기는 마찬가지다. 5·18조사위는 2024년 보고서에서 ‘군인과 경찰의 피해’를 별도 항목으로 정리했다. 항쟁 당시 계엄군 사망자는 모두 22명이었다. 경찰 사망자는 4명이었다. 계엄군 최초 사망자는 5월20일 밤 광주역 인근 신안 사거리에서 시위대가 몰고 온 화물트럭에 치여 숨진 정관철(26·제3공수여단) 중사였다. 5·18조사위 보고서는 군 사망자 22명 중 절반이 넘는 14명이 시위대의 폭력이나 총격에 의한 것이 아니라 계엄군 간 오인교전이나 과실에 의한 사망이라고 적었다. 경찰 사망자 4명은 시위 진압 과정에서 시위대 차량에 치여 숨진 이들이었다. 부상 당한 일반 병사들은 면담조사에서 계엄군으로 광주에 투입됐다는 사실조차 가족에게 제대로 말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기억 속에 살았고, 그 트라우마로 여전히 고통스럽다는 입장을 호소했다.

독일 베를린장벽 기념공원에는 분단 시절 동, 서베를린을 가른 장벽을 넘어 서베를린으로 탈출하려다 목숨을 잃은 희생자 132명을 기리는 ‘추모의 창’이 있다. 장벽을 넘다 총에 맞거나 사고로 숨진 이들이다. 희생자들 사진과 이름을 빽빽이 담아 전시하고 있다. 추모의 창 근처에는 베를린장벽에서 경비를 서던 중 사망한 동독 병사 8명의 얼굴과 이름을 적은 별도의 추모판이 세워져 있다. 그다지 눈에 띄지는 않지만 차분히 이들 병사의 슬픈 죽음을 위로하고 있다. 사망한 동독 병사들 역시 징집병이었고, 동료의 오발 사고나 탈출자의 반격, 심지어 탈출을 시도하는 동료 경비병에 의해 희생된 비극적 측면이 있다는 점이 감안됐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희생된 계엄군 병사들 역시 체제와 역사의 희생양일 뿐이다. 그들의 죽음도 적절한 형태와 방식으로 위로하고 추모할 수 있어야 한다.

글·사진 백기철 조선대 자유전공학부 객원교수 kckc100@naver.com

참고문헌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 종합보고서(2024)
황석영 이재의 전용호,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창비, 2017)
강상우, ‘김군을 찾아서’(후마니타스, 2020)
5·18민중항쟁고등학생동지회, ‘5월, 새벽을 지킨 소년들’(백산서당, 2023)광주전남여성단체연합, ‘광주, 여성’(후마니타스, 2012)
백기철, ‘베를린장벽길 산책’(솔과학, 2025)
광주통합시 스마트투어 앱 ‘5·18민주화운동’
5·18기념재단 홈페이지 https://518.org/base/main/view

글쓴이 백기철은 광주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1980년 광주항쟁 때 고교 2년생으로 광주를 겪었습니다. 2023년까지 서울에서 ‘한겨레’ 기자로 33년간 일했습니다. 최근 2년여 동안 매주 광주를 찾을 일이 생겨 틈틈이 오월길을 걸었습니다. 그 사이 한강 작가는 ‘소년이 온다’로 노벨문학상을 받았습니다. 한강 작가의 작품을 따라 걷는 오월길은 더욱 애잔하면서도 명징했습니다. 오월길에서 접한 광주의 어제와 오늘 이야기를 담아 독자들과 만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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